정의와 사악의 대전이 끝난 지도 수백 년이 흘렀다. 어둠의 신은 완전히 소멸했고, 인간계와 선계는 단절되어 서로의 존재조차 잊혀져 갔다. 그 격전의 중심에 섰던 동방의 신와들도 각자 길을 선택했다. 광명의 신와 용와와 지혜의 신와 봉와는 신력을 버리고 평범한 인간의 삶을 택했다. 그들은 신위의 무게 대신 인간의 땀과 눈물을 선택한 것이다.
용와는 마을의 경비병이 되었다. 그의 어깨는 여전히 넓고 등은 곧았으며, 얼굴은 세월이 흘러도 준수함을 잃지 않았다. 다만 신력 대신 인간의 힘으로 마을을 지키는 그의 눈빛에는 더욱 깊고 단단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매일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성벽을 따라 순찰을 도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봉와는 마을의 스승이 되었다. 그녀는 지혜의 신와 시절의 기억과 지식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세월은 그녀를 더욱 우아하고 성숙한 여인으로 만들었다. 키가 크고 자태가 당당한 그녀는 긴 치마를 입고 마을 서재를 오가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차분했지만, 그 속에 담긴 지혜는 깊고 예리했다.
두 사람은 매일 마을의 작은 광장에서 마주쳤다. 용와가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과 봉와가 서재로 향하는 길이 겹치는 곳이었다.
"봉와님, 안녕하십니까?"
용와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중후했다.
"용와, 또 밤새 순찰했니?"
봉와가 살짝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걱정이 스며 있었다.
"네, 마을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용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녀의 눈을 마주하면 가슴 한복판이 뜨거워져서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신와 시절에도, 인간이 된 지금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용기는 없었다. 쓸모없는 과거의 신와가, 지혜와 아름다움을 겸비한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봉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의 곧은 등을 바라보며 가슴 한구석이 저미는 것을 느꼈다. 그가 자신을 피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승이라는 자리와 신와 시절의 자존심 때문에 먼저 다가설 수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어져 갔다.
어느 날 저녁, 하늘이 이상하게 반짝였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별빛이 붉게 타오르며 대지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대한 운석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운석은 마을에서 멀지 않은 황량한 평원에 떨어졌다. 충격으로 땅이 흔들리고 먼지가 하늘을 덮었다. 그 순간, 수백 년 전에 사라졌어야 할 어둠의 기운이 운석에서 뿜어져 나왔다.
운석은 깨어졌다. 그 틈에서 보라색 촉수들이 꿈틀거리며 나오기 시작했다. 촉수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땅을 타고 번져 나갔고, 주변의 풀과 바위를 집어삼켰다. 곧 그 자리에는 거대한 마굴이 형성되었다. 마굴은 암자색 안개를 내뿜으며 점점 확장되었다.
마을의 경비병들이 먼저 그 이상을 감지했다. 용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마굴이 생긴 방향을 바라보며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마기의 기운이었다.
"경비병들을 모아라. 마을 경계를 강화하고, 주민들에게 집 안에 머물라고 전하라."
용와가 엄숙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검을 챙겨 들고 직접 순찰을 나섰다. 마을의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한편, 마을 서재에서 글을 가르치고 있던 봉와도 그 기운을 감지했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드리운 보랏빛 구름과 땅에서 솟아오르는 어둠의 기운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이건... 마기?"
봉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신와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그들은 어둠의 신과 싸우며 인간계를 지켰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신력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지켜야 할 마을과 제자들을 생각했다. 누군가가 그 마굴을 조사해야 했다. 그리고 만약 그곳이 위험하다면, 용와가 직접 나서기 전에 먼저 확인하고 싶었다.
봉와는 긴 치마를 걷어 올리고 서재를 나섰다.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과거 지혜의 신와로서의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마을을 빠져나와 황량한 평원으로 향했다. 발밑의 흙은 이상하게 뜨거웠고, 공기 중에는 매캐한 냄새가 감돌았다. 그녀가 운석이 떨어진 곳에 가까워질수록 마기의 농도는 짙어졌다.
마침내 그녀가 거대한 분화구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숨을 삼켰다. 분화구 중앙에는 거대한 마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보라색 촉수들이 그 주변을 감싸고 꿈틀거리며, 마치 그녀를 유혹하는 듯했다.
봉와는 조심스럽게 한 걸음 내디뎠다. 그녀는 지혜의 신와로서의 예리함으로 마굴의 구조를 분석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발밑의 땅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어?"
봉와의 비명이 짧게 울려 퍼졌다. 그녀는 균형을 잃고 마굴 속으로 떨어졌다. 거대한 어둠이 그녀를 집어삼켰고, 그녀의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녀가 떨어진 곳에서 보라색 촉수들이 더욱 격렬하게 꿈틀거리며 그녀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마을 성벽 위에서 순찰을 돌고 있던 용와가 멀리서 들려오는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운석이 떨어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가슴 한편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봉와...!"
그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성벽을 뛰어내려 그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