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과 사악의 대전이 끝난 날, 하늘은 유난히 맑고 푸르렀다. 전장을 뒤덮었던 어둠이 걷히고, 신령과 인간이 함께 누리는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봉와와 용와는 신계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신력의 일부를 포기하고 인간 세상에 남아, 이 땅을 지키며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봉와는 마을 한복판에 작은 서당을 열었다. 나무로 지은 소박한 건물이었지만, 그 안에는 그녀가 신계에서 배운 모든 지식이 담겨 있었다. 아이들은 매일 아침 모여들어 그녀의 가르침을 듣고, 어른들도 틈틈이 찾아와 이야기를 들었다.
“태초에 신들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만들었습니다. 빛과 어둠, 하늘과 땅, 그리고 생명의 씨앗을.”
봉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녀의 긴 은발은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붉은 눈동자는 지혜로 빛났다. 아이들은 숨죽여 그녀의 말을 들었다.
한편 용와는 정기적으로 대지를 순찰했다. 그는 긴 검을 차고, 산과 들판을 넘나들며 어둠의 기운이 스며들지 않는지 살폈다. 그의 어깨는 어느 때보다 넓어졌고, 얼굴 선은 더욱 굳건해졌다. 인간과 함께 살아간 지 수년, 그의 몸과 마음은 점점 인간의 것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느 늦봄 오후, 용와가 순찰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봉와가 서당 마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공중에 원을 그리자 작은 별빛이 반짝였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봉와는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용와의 가슴을 간질였다.
“용와님,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해주실 건가요?”
가장 어린 아이가 달려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용와는 무뚝뚝한 얼굴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은 없어. 내일은 들려주마.”
그가 봉와와 눈을 마주쳤다. 순간 그녀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용와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것은 그녀가 신계의 존재이며, 자신은 그저 인간과 신의 경계에 선 전사일 뿐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세월은 흘러갔다. 봉와의 용모는 더욱 우아해졌다. 그녀의 허리는 가늘고, 피부는 옥처럼 투명했으며, 걸음걸이마다 은은한 향기가 풍겼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백발의 신녀’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감출 수 없는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날도 용와는 순찰을 마치고 돌아와 서당 마루에 걸터앉아 물을 마셨다. 봉와는 멀리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굵은 팔뚝에서 힘이 느껴졌다. 그가 웃는 얼굴은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느냐?”
용와가 그녀를 발견하고 물었다. 봉와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오늘의 수업을 정리하고 있었어요.”
“네 얼굴이 붉다. 혹시 열이 나는가?”
용와가 다가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길이 닿자 봉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괜찮습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살짝 밀어내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신과 인간의 벽이 더욱 선명해졌다. 신녀가 전사에게 연정을 품다니, 이는 신계의 율법을 어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은 그 율법보다 더 크게 뛰고 있었다.
밤이 되자 봉와는 서당 마당에 혼자 서서 별을 바라보았다. 은하수가 하늘 가득히 흐르고, 달빛이 대지를 은빛으로 물들였다. 그녀는 손을 들어 별을 향해 뻗었다.
“신들이여, 이 마음을 어찌해야 합니까?”
속삭임은 바람에 실려 사라졌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대신 그녀의 눈앞에 용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굳센 눈빛, 애써 감추려는 부드러움, 그리고 순찰에서 돌아올 때마다 전하는 그 작은 미소.
“나는 이미 인간을 닮아가고 있어요.”
봉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얗고 가는 손에 핏줄이 보였다. 신령일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온기가 이 손끝에 있었다. 그녀는 점점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음도, 몸도, 그리움도.
다음 날 아침, 용와는 일찍 일어나 마을을 순찰했다. 들판에는 보리가 물결치고, 아이들은 강가에서 놀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이상한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서당으로 돌아왔을 때, 봉와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흔들자 작은 꽃잎들이 허공을 날았다. 아이들은 까르르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용와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곧 그리움이 되었다.
“용와님, 오늘은 저와 함께 순찰을 다녀오시겠어요?”
봉와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용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들은 서당을 나와 숲길을 걸었다. 봄바람이 나뭇잎을 스치고, 새들이 지저귀었다. 봉와는 용와의 옆에서 걷는 것이 더없이 행복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동시에 두려움이기도 했다.
“요즘 마음이 이상해요.”
봉와가 작게 말했다. 용와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인간의 감정이 점점 더 짙어지는 것 같아요. 신령일 때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는 가슴을 꽉 채워요.”
용와는 아무 말 없이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그게 나쁜 일은 아니야. 우리는 이곳에 살기로 선택했잖느냐.”
“하지만 이런 감정이 두렵습니다. 만약 제가 너무 인간에 가까워진다면, 신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봉와의 눈에 슬픔이 어렸다. 용와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하고 거칠었다.
“네가 신의 의무를 저버린다면, 내가 대신할 것이다. 나는 너를 지키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니까.”
그 말에 봉와의 가슴이 떨렸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용와에게는 더없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그날 밤, 봉와는 혼자 서당에 앉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직시해야 했다. 용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사랑이 신의 길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면서도, 그 감정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인간인가요, 아니면 신인가요?"
작은 속삭임이 방 안에 울렸다. 달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 눈물은 신이 아닌 인간의 것이었다.
인간 세상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었다. 마을은 더욱 번영하고, 사람들은 서당에서 배운 지식으로 더 나은 삶을 살아갔다. 하지만 봉와와 용와의 마음은 그 변화의 중심에서 더욱 깊어져만 갔다. 그들은 서로에게 끌리는 것을 알면서도,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속에 품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다. 인간 세상은 봄과 가을을 반복하며 아름다움을 더해갔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봉와와 용와는 더욱 인간에 가까워져 갔다. 그들의 마음은 신이 아닌 인간의 것이었고, 그들의 사랑도 인간의 사랑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들은 서로에게 고백하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고, 마음속에 간직할 뿐이었다. 언젠가는 그 감정이 터져 나올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은 미루고 또 미루었다.
그리고 어느 날, 용와가 순찰을 마치고 돌아와 봉와에게 말했다.
“봉와, 너의 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봉와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용와의 눈은 진지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는 신과 인간의 경계에 서 있다. 이 감정을 마주하는 것이 두렵지만, 피하고 싶지도 않다.”
“용와님...”
봉와의 목소리가 떨렸다. 용와는 그녀의 손을 잡아 가슴에 가져다 댔다.
“기다리자. 때가 되면 우리는 이 감정을 마주할 것이다.”
그 말에 봉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 고인 눈물이 마침내 흘러내렸다. 그것은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기다림의 눈물이었다.
그날 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오래도록 말없이 앉아 있었다. 달빛이 그들의 그림자를 하나로 이어주었다. 인간 세상은 평화로웠고, 그들의 마음은 그 평화 속에서 더욱 깊어져만 갔다. 봉와는 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 이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일 날이 오리라고. 그리고 그날을 위해 그녀는 기다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