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대전이 끝난 지 이미 수백 년이 흘렀다. 어둠의 신이 마지막 신성을 거두며 영원히 소멸했고, 그를 따르던 어둠의 무리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신계의 문이 천둥소리와 함께 닫혔고, 선계와 인간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더 이상 신이 인간의 기도를 듣지 않았고, 더 이상 구름 위에서 인간의 삶을 굽어보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인간은 신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었다.
전쟁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면서 인간계의 마을과 성읍은 다시 번영하기 시작했다. 논밭에는 푸른 싹이 돋아났고, 장터에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더 이상 신들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는 인간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삶을 일궈나갔다.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 백운촌. 이곳은 대도시만큼 번화하지는 않았지만, 산과 물이 어우러져 아늑하고 평화로웠다. 마을 입구에는 늙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고, 그 아래에는 항상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봉와였다.
그녀는 느티나무 뿌리에 걸터앉아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긴 은발이 바람에 흩날렸고, 하늘하늘한 흰 옷자락이 땅에 살짝 닿았다. 그녀의 얼굴은 더 이상 신녀로서의 신성한 광채를 띠지 않았지만, 여전히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오히려 인간의 감정이 섞이면서 그 미모가 더욱 생생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봉와, 또 거기 있었구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용와였다. 그도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지만, 여전히 곧은 어깨와 당당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는 단정하게 묶였고, 허리에는 긴 검이 차 있었다. 비록 신력을 대부분 내려놓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용와. 너도 일 끝났어?"
"응, 마을 서쪽 논에 물꼬를 틀어줬어. 장로님께서 가뭄 걱정을 하셔서 말이야."
용와가 그녀 옆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랜 세월 쌓인 편안함이 흐르고 있었다. 수백 년을 함께 살아온 존재들답게,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이 참 대단하지 않니?" 봉와가 조용히 말했다. "신이 없어도 잘 살아가는 걸 보면."
"원래 인간은 그런 존재였어." 용와가 대답했다. "우리는 그저 그들이 스스로 설 때까지 도와준 것뿐이야."
"그래도... 가끔은 그리워져. 저 구름 위에서 바라보던 시절이."
봉와의 목소리에 살짝 그늘이 드리웠다. 용와는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 그도 가끔은 그리웠다. 신력이 마음껏 흐르던 때, 하늘과 땅을 자유롭게 넘나들던 시절. 하지만 그건 과거일 뿐이었다.
"우린 이미 선택했잖아." 그가 말했다. "이 삶을 살기로."
"응, 선택했어." 봉와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은빛 눈동자에 부드러운 빛이 스쳤다. "네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야, 용와."
용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뺨이 살짝 붉어졌지만, 봉와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가슴 한편에서 뭉클하게 올라오는 감정을 누르며, 그저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세월은 그렇게 흘렀다.
십 년, 이십 년, 오십 년. 인간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지만, 그들에게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시간 속에서 그들의 모습은 조금씩 변해갔다. 봉와의 얼굴에서는 소녀의 청순함이 사라지고, 어엿한 여인의 아름다움이 깃들었다. 가슴은 풍만해졌고, 허리는 더욱 가늘어졌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곤 했다.
용와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어깨는 더욱 넓어졌고, 턱선은 각지게 다듬어졌다. 어느덧 그는 마을에서 가장 잘생긴 청년으로 소문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봉와의 곁을 지켰고, 그녀가 누군가에게 청혼받을 때마다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도 그랬다. 마을 잔치가 열린 날, 젊은 사냥꾼이 봉와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고백을 했다. 봉와는 예의 바르게 거절했지만, 그 젊은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용와는 그 광경을 멀찍이서 바라보다가, 술잔을 벌컥비웠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봉와가 다가와서 물었다.
"괜찮아." 용와가 대답했지만, 그의 눈빛은 어두웠다.
"왜 화났어?"
"안 화났어."
"거짓말. 네 표정을 내가 모를 것 같아?"
봉와가 그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손이 스쳤고, 용와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봉와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봉와." 그의 목소리가 쉰 듯 울렸다. "너는... 왜 아직도..."
"뭘?"
"...아니야. 미안."
그가 손을 놓았다. 봉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품고 있는 감정을. 하지만 그녀는 신이었고, 그는 신의 수호자였다. 그 신분의 벽을 넘는 것은 금기였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었다.
"용와, 나는..."
"됐어. 그냥 내가 취한 것뿐이야."
그날 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곳에서 한숨을 쉬며 잠을 청했다. 봉와는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용와는 지붕 위에 누워 별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각자의 마음을 안고,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며칠 후, 평화는 무너졌다.
한밤중, 하늘이 갑자기 붉게 물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불덩어리가 하늘을 가르며 땅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별똥별이 아니었다. 너무나 거대했고, 너무나 어둡고 위협적인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모두 대피해!" 용와가 마을 한복판에서 외쳤다. "봉와, 마을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하지만 너는?"
"나는 저것을 막을 거야!"
용와가 몸을 날렸다. 비록 신력을 대부분 내려놓았지만, 그의 검술은 여전히 신의 경지에 있었다. 그는 허공을 가르며 떨어지는 운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섬광이 번쩍이고, 굉음이 대지를 울렸다. 운석은 두 동강이 났지만, 그 파편들이 마을 주변에 쏟아졌다.
그러나 운석이 부서지면서 검은 안개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대지와 공기를 물들였다. 용와가 그 안개를 막아보려 했지만, 그의 검은 허공만을 베어낼 뿐이었다.
"용와!" 봉와가 달려왔다. "이 안개는... 뭔가 이상해. 신성한 힘이 통하지 않아."
"그래, 이건 인간 세계의 것이 아니야."
그 안개 속에서 냉기가 뻗어 나왔다. 봉와가 몸을 움츠렸다. 그녀의 피부가 소름이 돋았다. 익숙하지 않은 두려움, 그것은 그녀의 신성을 위협하는 힘이었다.
"이대로 두면 마을이 모두 잠길 거야." 용와가 말했다. "봉와, 너도 힘을 써. 신력의 일부라도 남아 있지 않나?"
"그래, 하지만..."
봉와가 두 손을 모아 주문을 외웠다. 그녀의 몸에서 은백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그 빛은 검은 안개에 닿자마자 흐려졌다. 그녀는 신력을 잃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 힘은 예전처럼 순수하게 빛나지 않았다. 인간과 섞여 살면서 그녀의 신성은 점점 희석되고 있었다.
"안 돼, 막을 수 없어."
"그럼 진짜 힘을 쓰는 수밖에." 용와가 이를 악물었다.
그가 공중에 검을 휘둘러 막을 만들었다. 거대한 금빛 장벽이 마을을 감쌌다. 검은 안개가 부딪히며 쉭쉭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장벽은 곧 금이 가고 있었다. 용와의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용와, 무리하지 마!"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 하지만 시간이 얼마 없어. 빨리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땅이 울렸다. 운석이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거대한 검은 기둥이 하늘을 찔렀고, 그 주변의 모든 생명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풀은 시들었고, 나무는 말라 죽었다. 땅은 갈라지고, 공기에는 썩은 냄새가 감돌았다.
봉와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그녀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두려움, 분노, 그리고... 이상한 욕망. 그것은 그녀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검은 안개가 그녀의 몸을 스치자, 그녀의 피부가 화끈거렸다. 그녀는 그 힘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끌리고 있었다.
"봉와?" 용와가 그녀의 표정을 이상하게 여겼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의 눈동자 속에 스며든 어두운 빛을 용와는 보지 못했다. 운석의 어둠이 이미 그녀의 마음에 틈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 밤, 그들은 일단 마을을 지키는 데에 집중해야 했다. 그들은 아직 몰랐다. 이 검은 안개가 곧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