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월의 슬픔

站点:NovelAI.one内容:前8章在线试读ID:da31504c更新:2026-07-26 22:44
에스테 가문의 영지에서 그레이모어 학원까지 이어지는 마차 길은 봄기운이 완연했다. 성월은 창밖으로 스치는 푸른 들판을 바라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학원 입학 허가서가 놓여 있었고, 양피지에는 금박으로 ‘성월 에스테’라는 이름이 또렷이 찍혀 있었다.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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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통로

에스테 가문의 영지에서 그레이모어 학원까지 이어지는 마차 길은 봄기운이 완연했다. 성월은 창밖으로 스치는 푸른 들판을 바라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학원 입학 허가서가 놓여 있었고, 양피지에는 금박으로 ‘성월 에스테’라는 이름이 또렷이 찍혀 있었다. 마차 바퀴가 돌부리에 걸려 덜컹거릴 때마다 맞은편에 앉은 리나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괜찮아, 리나. 학원만 도착하면 다 나아질 거야.”

성월이 나긋하게 말했다. 리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낡은 외투 소매 끝에는 실밥이 풀려 있었고, 성월의 새하얀 레이스 장갑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래도 성월은 리나를 데리고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지난해 여름, 사냥터에서 길을 잃었을 때 리나는 아무 조건 없이 손을 내밀어 주었다. 이제 그 은혜를 갚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에스테 영애께서 굳이 평민 입구로 가실 필요가...”

마부인 노인이 마차 밖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성월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결정한 일이야. 나는 리나와 함께 입학할 거야.”

마차가 학원의 외곽 담장을 따라 난 길로 접어들었다. 왼쪽으로는 귀족 전용 입구가 보였다. 대리석 기둥이 늘어선 웅장한 통로에는 벌써부터 화려한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제복을 입은 하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반면 오른쪽 평민 입구는 낡은 철문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 앞에는 이미 수십 명의 평민 학생들이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야.”

리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창밖을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여기라면 자신도 낯설지 않을 것이라는 표정이었다. 성월은 그런 리나의 옆모습을 흘끗 보더니 마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가 멈추자 두 사람은 함께 내렸다. 성월의 검은 머리카락이 봄바람에 흩날렸고, 값비싼 여행용 외투가 햇빛을 받아 은은한 광택을 냈다. 평민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이런 복장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리나는 그 시선들이 불편한 듯 어깨를 움츠렸다.

“괜찮아, 리나. 곧 끝날 일이야.”

성월은 리나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대기 줄 맨 뒤로 걸어갔다. 그녀는 이런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고작 하루 이틀 불편을 감수하면 그만이었다. 학원 측에 신분을 알리는 대로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을 터였다.

줄은 천천히 줄어들었다. 입구에는 커다란 수정판이 서 있었고, 학생들이 그 앞에 서면 수정판이 푸른 빛을 내며 신원을 확인했다. 귀족은 금빛, 평민은 푸른빛이 반짝이는 시스템이었다. 리나가 먼저 수정판 앞에 섰을 때, 수정판은 희미한 푸른 빛을 냈다. 기록 담당 사감이 무표정하게 종이를 건네며 말했다.

“리나. 평민. 12동 4호실.”

리나는 서둘러 종이를 받아 들었다. 다음은 성월의 차례였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수정판 앞으로 걸어가서 왼손을 수정판 위에 얹었다.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닿은 순간, 수정판이 깜빡이며 아래에서부터 푸른 빛이 올라왔다.

‘푸른색이라고?’

성월은 순간 멈칫했다. 당연히 금빛이 떠야 할 자리에서 낯선 푸른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기록 담당 사감은 그 빛을 확인하자마자 기계적으로 서류를 찍어내며 말했다.

“성월. 평민. 12동 4호실.”

“잠깐만요. 무슨 착오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성월은 침착하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사감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서류를 내밀었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시스템이 그렇게 표시했으니 그런 겁니다. 다음.”

“제 말은, 저는 에스테 가문의...”

“다음 학생 오세요.”

사감이 목소리를 높이며 성월의 뒤를 바라보았다. 뒤에 서 있던 평민 학생 하나가 머뭇머뭇 다가왔다. 성월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순간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리나의 불안한 눈빛이 그녀를 붙잡았다.

“성월아... 괜찮아?”

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이미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만약 여기서 성월이 소동을 일으키면, 아마도 리나는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게 될 것이 뻔했다. 성월은 잠시 숨을 고르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분명 시스템 오류일 거야.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나중에 교무실에 가서 말하면 돼.”

그녀는 사감이 건넨 서류를 받아 챙겼다. 종이에는 ‘평민’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찍혀 있었다. 성월은 그 글자를 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에스테 가문의 후계자가 평민 취급을 받다니, 이 학원도 참으로 관리가 허술했다. 하지만 그 허술함이 오늘 저녁까지만 지속될 일이었다.

“가자, 리나. 개학식에 늦지 말아야지.”

12동 기숙사는 학원 구석의 낡은 석조 건물로, 귀족 구역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좁은 복도에는 곰팡내가 배어 있었고, 계단 난간은 손잡이가 닳아 반들거렸다. 4호실 문을 열자 두 평이 채 안 될 것 같은 방이 나타났다. 침대 두 개가 벽을 따라 붙어 있었고, 그 사이로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나 있었다. 창문은 하나였고, 창틀에는 먼지가 켜켜이 앉아 있었다.

“여기가... 우리 방이야?”

리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짐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이런 환경에 익숙한 듯 금세 적응하는 모습이었지만, 성월의 표정은 굳어졌다. 그녀의 개인 침실 하나보다도 작은 공간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곳에서 단 하룻밤도 잔 적이 없었다.

“말도 안 돼.”

성월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이 방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침대에 얹힌 매트리스는 생각보다 푹신했고, 리나는 벌써 외투를 벗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괜찮아, 성월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내가 사는 곳은 이 방보다 더 작거든.”

그 말이 성월의 마음을 찔렀다. 그녀는 말없이 가방에서 장갑을 꺼내 끼고 침대 먼지를 털었다. 그래도 직접 청소하기는 싫어서 장갑을 낀 채로 먼지를 닦아 냈다. 진작에 알고 있었다. 리나가 얼마나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는지, 그리고 그런 리나가 얼마나 순수한 마음씨를 가졌는지.

‘하루만 참자. 내일이면 모든 게 바로잡힐 거다.’

성월은 그렇게 되뇌며 자리에 앉았다. 리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고마워, 성월아. 나 때문에 이런 데까지 와 줘서...”

“무슨 소리야. 친구는 당연히 함께해야 하는 거야.”

성월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온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고, 후회는 없었다. 다만 이 상황이 조금 더 빨리 해결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개학식은 중앙 광장에서 열렸다. 거대한 마법 조명이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고, 학원의 상징인 은빛 성월 문장이 깃발에 펄럭였다. 학생들은 신분에 따라 구역이 나뉘어 있었다. 앞쪽에 놓인 금박 의자들은 귀족 학생들의 자리였고, 뒤쪽의 긴 나무 벤치는 평민 학생들의 자리였다.

리나와 함께 평민 구역에 앉자, 익숙한 얼굴들이 저 앞쪽에서 그녀를 향해 돌아보곤 했다. 레인 블레이크가 금발을 넘기며 비웃음을 흘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사벨라 모어 교사가 연단 옆에서 학생들을 바라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빅토르 폰 스트레이는 이미 술에 취한 듯 눈을 반쯤 감고 있었고, 세바스찬 그레이는 벤치 뒤쪽의 기계 장치를 만지작거리며 관심 없는 표정이었다.

“어머, 저거 에스테 가문의 영애 아니야? 어쩌다 저기 앉았대?”

“듣자 하니 시스템 오류였다던데, 진짜일까? 아니면 무슨 사연이...”

귀족 학생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번졌다. 성월은 그 말들을 또렷이 들었지만, 고개를 꼿꼿이 들고 정면만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은 리나의 손을 여전히 잡고 있었다. 리나의 손바닥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고, 얼굴은 다시 창백해져 있었다.

“저만 아니었어도, 성월이가 이런 수모를 겪지 않았을 텐데...”

리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성월은 그 말에 잠시 눈을 감았다. 리나의 죄책감이 손을 타고 전해져 오는 듯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대답했다.

“수모 같은 게 어디 있어. 저런 시선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아. 그리고 곧 진실이 밝혀질 거야. 아버지께서도 가만히 계시지 않으실 테니까.”

사실 그 말은 반은 믿음이었고, 반은 바람이었다. 에스테 가문의 눈과 귀는 학원 안에도 분명히 있을 터였다. 이 상황이 하루 이상 지속될 리 없었다. 개학식의 연설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성월은 속으로 그 생각만을 되뇌었다. 귀족들의 시선은 계속해서 그녀의 뒤통수에 꽂혔지만,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날 밤, 기숙사 방 안은 더없이 적막했다. 리나는 피곤했는지 잠옷으로 갈아입자마자 침대에 누워 깊이 잠들었다. 성월은 그런 리나를 한 번 바라보고는 조용히 일어나 창가로 갔다. 달빛이 좁은 방 안으로 희미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는 외투 안주머니에서 작은 통신용 마법석을 꺼냈다. 달걀 크기만 한 이 수정구에는 에스테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고, 가문의 직통 연락망이 설정되어 있었다. 보통 이 마법석은 어떤 마법 차단막도 뚫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출력을 가지고 있었다.

성월은 마법석을 두 손으로 감싸고 조용히 마력을 불어넣었다. 평소라면 곧바로 푸른 빛이 반짝이며 아버지의 서재로 연결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아무 빛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시도했다. 이번에는 더 강한 마력을 쏟아부었다. 마법석이 미세하게 진동하더니, 이내 모든 반응이 사라졌다.

‘차단되어 있다...?’

성월은 심장이 차갑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믿기지 않아서 마법석을 창문 밖으로 내밀어 보았다. 그 순간에도 주변의 마법 차단막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신호를 걸러내고 있었다. 마치 이 건물 전체가 거대한 우리 안에 갇힌 듯했다.

‘이건 단순한 오류가 아니야. 의도된 차단이야.’

차가운 한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개인 통신마저 이렇게 완벽하게 막는 학원이라면, 그곳은 오직 하나의 가능성만을 의미했다. 외부와의 접촉을 원천 차단하는 제도적 장치. 그리고 그 장치가 지금 자신을 향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

‘왜지? 누군가 일부러...?’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추측하기는 이르다. 이곳은 규모가 큰 만큼 학원 차원의 마법 차단막이 있을 수 있었다. 단지 가문의 마법석과 호환되지 않을 뿐일지도 몰랐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성월은 마법석을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곳이 어쨌든, 내일이면 교무실에 가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면 그만이었다. 지금은 밤이었고, 어둠 속에서는 모든 것이 본 모습보다 크게 보이기 마련이었다. 아침이 오면 이 불안도 사라질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리나의 고른 숨소리가 방 안에 잔잔하게 울렸다. 성월은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가문에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사실, 푸른 빛으로 표시된 자신의 신분, 그리고 오늘 받은 그 모든 시선들이 뒤엉켜 그녀의 의식을 어둠 속에서 계속 흔들었다. 불길한 예감이 마음 깊은 곳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신분의 위장

성월은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낡은 교복이 찢겨진 허벅지를 제대로 가리지도 못했고, 핏자국이 군데군데 말라붙은 천이 살갗에 달라붙었다. 주변 평민 학생들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들어 감히 그녀를 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에는 익숙해진 두려움만이 떠돌았다. 성월은 이미 수차례 교칙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진 처벌을 겪었지만, 그녀의 등뼈는 여전히 곧았다. 어쩌면 부러질 대로 부러져 이제는 형체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리나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려 했으나, 성월은 아무 말 없이 그 손을 뿌리쳤다. 손길이 닿는 순간 느껴지는 온기가 너무나 끔찍했다. 그 따뜻함은 과거 자신의 침실 창가로 쏟아지던 햇살을 떠오르게 했기에. 지금 자신이 발 딛고 선 이 지옥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기억이기에.

“괜찮아?”

리나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언제나 불안으로 가득했다. 성월을 바라볼 때면 죄책감이 짙게 깔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성월은 짧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목청에서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 비명으로 성대는 상했고, 말하고자 하는 의지는 산산조각난 지 오래였다.

몇 줄기 차가운 빛이 교실 천장의 좁은 창을 통해 쏟아져 내렸다. 강단 위에는 이사벨라 모어가 서 있었다. 검은 타이트 스커트에 와이셔츠를 차려입은 여교사는 얇은 금속 지휘봉으로 칠판을 두드리며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목이 움직일 때마다 은색 식별표가 희미한 서걱임을 냈다. 그녀는 아카데미에서 평민 교화 과정을 전담하는 자 중 하나로, 겉으로 보기엔 엄격하지만 공정한 교사였다. 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오늘은 아카데미의 예의범절에 대한 복습이다.”

이사벨라의 목소리는 의외로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칼날처럼 가느다란 차가움이 숨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관성적으로 교실을 훑다가, 구석에 있는 성월에게서 멈췄다. 교실 분위기가 순간 팽팽한 거미줄처럼 긴장감을 머금었다.

“거기 있는 에스트. 자네가 대답해 보게. 귀족 영식과 동석할 때, 평민이 반드시 지켜야 할 복식 규정은 무엇인가?”

단순한 질문이었다. 교칙에 길들여진 평민이라면 즉시 답해야 할 문제였다. 신체를 낮추고, 시선을 발끝으로 두며, 어떠한 장신구도 하지 않는다. 그 답을 성월도 머리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굶주림과 수면 부족으로 몽롱해진 의식 속에서, 입술이 무심코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석양회(夕陽會)의 격식에 따르면, 은연사(銀緣紗)로 된 장갑을 착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가 적어도 남작 작위 이상일 경우……”

문장이 끊겼다. 실수임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석양회’는 하급 귀족이라도 함부로 입에 올리기 힘든 상류층의 비공식 모임 이름이었다. ‘은연사’는 일반인이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고급 직물이었다. 교실 안의 평민 학생들은 일제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단어의 무게는 오직 이사벨라의 귀에만 정확히 박혔다.

여교사의 손가락이 지휘봉을 서서히 감아쥐었다. 그녀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놀라움이 아니라, 짐승이 우연히 더 귀한 먹잇감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 같은 것이 서서히 얼굴에 퍼졌다.

“대단히 박식하군, 에스트.”

이사벨라가 천천히 강단에서 내려왔다. 그녀의 구두 굽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는 작은 천둥 같았다. 성월은 차가운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성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소리쳤지만, 육신은 이미 일어서서 도망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사벨라는 성월의 바로 앞에 멈춰 서서 그녀의 턱을 지휘봉으로 들어 올렸다. 차가운 금속이 피부에 닿자, 성월은 비로소 자신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수업이 끝나면, 따로 복습을 좀 해야겠다.”

이사벨라가 가볍게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리나가 무언가 항의하려는 듯 몸을 움직였지만, 성월이 눈빛으로 제지했다. 더 이상의 저항은 더 깊은 나락을 의미할 뿐이었다.

#

아카데미의 교사 전용 사무동은 남루한 교실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이사벨라는 자신의 과목실로 돌아오자마자 손가락으로 허공에 떠 있는 권한 인터페이스를 터치했다. 신원 정보가 기록된 수정판이 황색 빛으로 반짝이며 켜졌다.

‘에스트, 기초 정보 열람.’

수정판 위로 성월의 납작한 기록이 떠올랐다. 변경 지방의 평민 출신, 가족 구성원 없음. 식별 등급은 최하, 신체 지표는 보통. 모든 것이 지루할 정도로 평범한 수치였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포기하지 않고 손가락을 밑으로 쓸어내리며, 평소에는 교사도 보지 않는 계통 부호의 세부 사항을 열람했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교육’을 해온 그녀만이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기록은 겉으로 매우 깨끗했지만, 혈통 계통 코드에 미세한 오버레이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바탕이 되는 원본 혈통 등급이 인위적으로 낮은 쪽으로 ‘덮어쓰기’ 되어 있었다.

“재밌군.”

이사벨라는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응시했다. 에스트. 그녀의 뇌리 속에서 어떤 가문의 문장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몰락했거나 이미 소멸한 귀족 가문들 중 하나일 것이다. 고아가 되어 신분이 뒤바뀌었다거나, 아니면 무슨 연유에서건 감히 신분을 위조하고 이 지옥에 발을 들인 백치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이유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결과였다. 지금 자신의 손아귀 안에 진짜 귀족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 그녀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천천히 번졌다. 이사벨라는 그 데이터의 오류를 수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오버레이를 더욱 강화하고, 상위 권한자라도 쉽게 알아보지 못하도록 몇 겹의 추가 암호를 걸었다.

“무대의 막을 올리기 전에 주연이 들통 나면 재미없으니까.”

이사벨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녀의 눈은 이미 단순한 교칙 위반의 처벌이 아닌, 더 크고 정교한 계략을 그리고 있었다.

#

같은 시각, 특별 학생회실은 우아한 소네트의 선율로 가득 차 있었다. 실내는 겉으로 보기엔 고풍스러운 귀족의 살롱이었다. 하지만 벽에 걸린 초상화들의 시선은 어딘지 모르게 음산했고, 그 뒤로 숨겨진 공간들은 이곳이 단순한 모임 장소가 아님을 암시했다.

레인 블레이크가 실내를 둘러보며 팔걸이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앉았다. 은발의 학생회장은 마치 명화 속 인물처럼 정교한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언제나 깊은 심심함이 깃들어 있었다. 평범한 쾌락에는 이미 면역이 되어 버린, 권태에 찌든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그 여자에 대한 조사 자료는?”

레인이 물었다. 손에는 와인잔 대신 얇은 데이터 시트가 들려 있었다. 세바스찬 그레이가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왔다. 검은 장갑으로 정교하게 손질된 금속 도구들을 매만지며, 그는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걸음걸이, 목을 기울이는 각도, 허리를 숙일 때의 저항. 모두 전형적인 귀족 숙녀의 흔적이야. 지난주 처벌로 등에 피부가 갈라졌는데도 불구하고, 그 품위를 완전히 버리지 못하더군.”

세바스찬은 마치 예술 작품을 비평하듯 말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한계 상황에서 인간이 드러내는 모순이었다. 찢겨지고 더럽혀졌으나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태생의 흔적 같은 것.

“하지만 여기 기록을 보면 분명히 최하급 평민이야.”

빅토르 폰 스트레이가 품에서 약병을 꺼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의 손에는 불그스름한 액체가 들어 있는 주사기가 들려 있었고, 팔뚝에는 기이한 이식 조직이 꿈틀거렸다. 그는 생물 개조에 심취해 있었고, 그가 만드는 ‘육축’들은 교내 지하에 있는 비공식 실험 사육장에 갇혀 있었다.

“그러니까 기록이 가짜라는 뜻이겠지.”

레인이 시트를 내려놓으며 결론지었다. 그 순간, 문이 열리고 이사벨라가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눈빛을 한 번 본 순간, 레인은 자리에서 약간 몸을 일으켰다. 드물게 보는 흥분이 그 여교사의 얼굴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블레이크 군, 아주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답니다.”

이사벨라가 자신의 수정판에 떠 있는 데이터를 허공에 펼쳐 보이며 말했다.

“에스트라는 학생 말입니다. 혈통 코드에 개조 흔적이 있어요. 틀림없이 타락한…… 아니, 떨어진 귀족입니다.”

세바스찬의 손가락 동작이 멎었다. 빅토르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번졌다. 그리고 레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전에 느꼈던 그 묘한 위화감이 마침내 실체를 드러낸 순간이었다. 교문에서 처음 그 여자를 보았을 때, 그 평범한 복장 아래에 숨겨진 비굴하지 않은 눈동자를 보았다. 바로 그 눈동자였다.

“이사벨라, 기록을 바로 잡았습니까?”

레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사벨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숨겼습니다. 지금 당장 드러내면, 그냥 신분 사칭죄로 처리되어 지루하게 끝나버리니까요.”

그녀는 잠시 숨을 멈추고, 네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의 농도가 바뀌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우리는 좀 더 흥미로운 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령, 그녀가 스스로 무대 위에서 모든 것을 실토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것도 가장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레인의 입가에 마침내 그 심심함을 깨부수는 광기가 번졌다.

“계략의 윤곽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당신 셋의 도움이 필요해요.”

이사벨라는 수정판을 끄며, 세바스찬과 빅토르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세바스찬 군은 무대 장치와 그에 걸맞은 보조 도구들을 준비해 주시고, 빅토르 군은 혹시라도 있을 생리적 거부 반응을 통제할 약물을 준비하세요. 그리고, 레인 회장께서는…….”

그녀가 잠시 뜸을 들였다.

“연회의 초대장을 직접 전달하는 역할을 맡아 주십시오. 귀족 대 귀족으로서 말이죠.”

레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성월을 학생회 전용 응접실로 소환할 구실들이 그려지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서류상으로는 평민이지만, 그 내면에는 부러지지 않은 어떤 고고함이 숨겨져 있는 여자.

“함정이 완성될 때까지, 그녀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해.”

레인이 최종 지시를 내렸다.

“그러다 무대가 완성되는 날, 철저히 밟아 주마. ‘귀족’이라는 것의 마지막 파편까지 완전히, 산산조각내 버리는 거다.”

네 사람의 낮은 웃음소리가 우아한 연주곡에 섞여 실내에 잔잔하게 번져 갔다.

전락의 시작

교실은 조용했다. 오후의 햇살이 높은 아치형 창문을 통해 쏟아져 내려 마룻바닥에 길고 옅은 금빛 띠를 드리우고 있었지만, 그 온기는 방 안을 가득 채운 차갑고 적대적인 공기를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모든 시선이 교실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성월 에스트에게 꽂혀 있었다.

레인 블레이크가 학생회 임원석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자세는 교과서처럼 완벽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왼손 검지에는 순은으로 된 회중시계 줄이 느슨하게 감겨 있었고, 시계 본체는 마치 시계추처럼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게 네 책상 서랍에서 나왔어, 에스트 양.”

레인의 음성은 낮고 부드러웠지만, 고요한 교실의 모든 구석구석까지 또렷이 울려 퍼졌다. 그가 손목을 살짝 틀자 회중시계가 공중에서 한 바퀴 돌다가 긴 줄에 매달려 멈췄다. 뚜껑이 열리며 반쯤 비어 있는 사금 가루 주머니가 드러났다. 법적으로 사금은 제국 화폐국에서만 정제할 수 있으며, 사적인 소지는 2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는 중죄였다. 이 시계는 평민 학생이 몰래 숨겨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 이 증거물은 성월의 소지품에서 나왔다고 지목되고 있었다.

“나는——나는 이걸 본 적도 없어요.”

성월의 목소리는 더 높고 더 날카로워지려는 것을 애써 눌러 담느라 약간 떨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곧게 세우고 턱을 치켜들었다. 십 년간 몸에 밴 귀족 예절이 그녀에게 명령하고 있었다. 절대 약해 보이지 마라, 절대 고개를 숙이지 마라. 하지만 교복 아래에서는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본 적이 없다고?”

레인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절반은 호기심, 절반은 실망이 섞인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은 학생회가 증거를 조작했다는 뜻인가, 아니면 훔친 주제에 감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인가?”

교실 구석에서 누군가 억누른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사벨라 모어 교사는 칠판 옆에서 팔짱을 끼고 조용히 서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금테 안경 너머로 빛나는 눈빛은 해부용 칼날처럼 차갑고 예리했다.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열 필요가 없었다. 이건 수업이니까. 단지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수업일 뿐이었다.

레인이 한 걸음, 또 한 걸음 다가왔다. 구두 굽이 마룻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리듬을 타며 울려 퍼졌다. 그는 성월의 바로 앞에 멈춰 서서, 거의 귀에 바짝 붙일 듯 가까운 거리까지 몸을 숙였다. 회중시계가 마지막으로 한 바퀴 돌며 ‘딸깍’ 하고 닫혔다.

“평민 절도죄에 관한 교칙 조문을 낭독해 주지.”

레인의 어조는 우아한 만찬회에서 디저트를 주문하는 것만큼이나 태연했다.

“학교 대강당에서 공개 태형 40대. 사건의 주모자로 판단될 경우, 두피에서 발바닥까지 가죽이 완전히 벗겨진 채 교문에 3일간 효수된다. 공범에게는——”

그가 말을 멈추고, 고개를 약간 기울여 성월의 동공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듯 응시했다.

“공범에게는 설근 적출 및 양손 엄지 절단. 일생 동안 문맹과 불구 상태로 감옥에 수감되는 형벌이 내려져. 아, 네가 괜찮다면야 나도 상관없어. 하지만……”

레인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느릿느릿 교실 맨 뒷자리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리나가 마치 폭풍 속에 버려진 작은 새처럼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앉아 있었다. 그녀의 너클이 책상 모서리를 움켜쥐느라 하얗게 변해 있었고, 입술을 깨물어 그 자리로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녀는 자신이 떨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네 그 소중한 평민 친구는, 아마 평생 다시는 펜을 쥘 수 없을지도 모르지.”

성월의 동공이 격렬하게 수축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미친 듯이 파르르 떨리다가 순식간에 멈췄다. 그녀는 리나를 돌아보았다. 리나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무언가 소리치려는 듯 입을 벌렸지만, 목구멍에서 새어 나온 것은 가늘게 갈라진 숨소리뿐이었다.

성월은 돌아서서 다시 레인을 마주 보았다. 그녀의 척추는 여전히 곧았지만, 그건 이제 귀족의 자존심을 지탱하는 뼈대가 아니었다. 그건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가 마지막으로 지키는,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는 의연함일 뿐이었다.

“……내가 한 짓이에요. 혼자서요. 리나와는 아무 상관없어요.”

레인의 미소가 마침내 완전히 피어났다. 그는 마치 봄날의 첫 번째 장미를 감상하듯 경탄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좋아.”

그가 반 걸음 물러서며 가볍게 손뼉을 쳤다. 순간 교실의 불빛이 어두워졌다. 누군가 모든 커튼을 쳤다. 네 귀퉁이에서 마법 등불 촛대가 저절로 타오르며 푸르스름한 빛을 발산했다. 세바스찬 그레이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앞면이 볼록한 돋보기처럼 생긴 얇은 수정판이 들려 있었는데, 그 곡면 아래로는 비현실적인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빛을 흡수하고 증폭시켜, 마치 수백 개의 작은 태양이 성월 한 사람 위에 집중적으로 내리쬐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레인은 회중시계를 천천히 풀어 손에 쥐더니 손목을 살짝 비틀었다. 시계 뚜껑이 열리며 그 안에 담긴 사금이 모두 바닥으로 쏟아졌다. 가는 모래알 같은 금빛 입자들이 수정판을 통과한 강렬한 빛줄기에 포착되어 눈부시게 반짝였고, 마치 작은 별들이 발밑에서 폭발하는 듯했다.

그리고 레인은 우아하게 무릎을 굽혀 앉아, 그 반짝이는 사금 위에 자신의 혀를 대고 침을 흘렸다. 걸쭉하고 투명한 액체가 귀중한 금빛 입자들을 적시고 뒤섞어 탁하고 더러운 진흙처럼 만들었다. 그가 일어서며 손수건으로 입가를 천천히 닦아냈다.

“죄를 인정했으니, 태형과 효수형은 면제해 주겠다.”

레인의 목소리는 지극히 다정한 어조로 바뀌었다. 마치 상을 주는 것처럼.

“그럼 이제, 내가 사정해 준 이걸 깨끗이 핥아서 치워라. 무릎 꿇고. 혀로.”

교실 안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응고되었다. 이사벨라 교사가 살며시 입술을 오므리며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흡족한 탄성을 내질렀다. 세바스찬이 수정판의 각도를 살짝 조정하자 빛은 더욱 집중되어 바닥에 흩뿌려진 사금과 정액의 혼합물을 또렷이 비추었다. 역겨울 정도로 선명하게, 금빛과 탁한 흰색이 뒤섞인 오물이었다.

성월은 굳은 채 서 있었다. 그녀의 무릎 관절은 마치 녹슨 기계처럼 빳빳하게 굳어 버렸다. 그녀의 뇌가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무릎을 꿇어라, 무릎을 꿇지 않으면 리나가, 리나의 혀가, 리나의 손가락이……. 하지만 육체는 말을 듣지 않았다. 십 년 동안 혈관 속에 흐르며 길들여진 귀족의 피가, 에스트 가문의 모든 선조들이 수백 년간 지켜온 존엄이라는 것이 그녀의 다리를 굳게 땅에 박은 채 부르르 떨고 있었다.

“3초 주겠다.”

레인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올렸다.

“3.”

성월의 무릎이 살짝 휘청였지만 그래도 버텼다. 입술을 깨물어 피가 났다. 짜고 비릿한 피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2.”

이사벨라가 칠판 옆에 세워둔 자작나무 교편을 집어 들었다. 가늘고 긴 나무 몽둥이가었다. 그녀가 교편을 손바닥에 가볍게 두드리자 ‘퍽, 퍽’ 하고 낮고 묵직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교실 안에 있는 모두의 심장을 한 번씩 덜컥 내려앉게 했다.

“1——”

숫자가 채 끝나기도 전에 세바스찬이 움직였다. 그는 선반에 올려둔 마법 도구를 집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성월의 뒤로 다가가, 왼손 다섯 손가락을 펴서 거미줄처럼 성월의 뒤통수와 목덜미를 감쌌다. 그의 식지는 정확히 경동맥이 지나가는 후두골 아래 오목한 부분을 눌렀다. 격렬한 통증과 함께 감각 신경이 순간적으로 마비되어, 성월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무릎이 무너지듯 꺾여 바닥에 처박혔다. 무릎뼈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 충격이 척추를 타고 올라가 그녀의 시야가 새하얗게 변했다.

“안 돼! 안 돼요, 성월아!”

리나의 외마디 비명이 교실을 찢었다. 그녀가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려 했지만, 그림자 속에서 뻗어 나온 여러 개의 마법 사슬이 그녀의 팔다리와 허리를 칭칭 감아 자리에 묶어 버렸다. 리나가 미친 듯이 몸부림쳤지만, 사슬은 갈수록 더 조여들 뿐이었다. 그녀는 울부짖었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으며, 콧물이 옷깃을 적셨다.

성월은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거의 쓰러질 듯 몸을 구부렸다. 그녀의 눈앞 30센티미터 거리에, 레인이 남긴 그 더럽고 끈적한 액체 덩어리가 사금과 뒤섞여 반짝이고 있었다. 수정판에서 내리쬐는 강한 빛 아래, 그 액체의 질감과 온갖 더러운 불순물이 하나하나 낱낱이 드러났다. 성월의 위장이 뒤틀리며 위액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삼켜 버렸다.

이사벨라가 느릿느릿 다가왔다. 가죽 구두의 앞코가 성월의 시야에 들어왔다. 구두 코는 손톱이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신발 굽은 광이 나도록 반짝였다.

“너를 가르쳤던 예절 수업을 기억하느냐?”

이사벨라의 음성은 마치 무도회장에서 요정을 칭찬하듯 다정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자작나무 교편이 날카로운 파공성을 내며 그대로 성월의 엉덩이에 내리꽂혔다. ‘찰싹!’ 소리보다 더 무겁고, 살갗이 찢어지는 소리가 섞인 듯한 굉음이었다. 성월의 허리가 활처럼 뒤로 젖혀졌다. 마치 전기가 통과한 듯 온몸이 경련했다. 타는 듯한 통증이 엉덩이에서 시작해 척수를 타고 정수리까지 치솟았다. 교편이 스쳤을 교복 치마 천이 실밥이 터지며 미세한 갈라진 틈을 드러냈다.

“예의란, 윗사람이 베푸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사벨라는 마치 교실에서 평범한 수업을 하듯 천천히 읊조렸다.

“레인 회장님께서 자발적으로 정액을 제공하셨고, 이는 네가 머리를 조아려 감사히 받들어야 할 은총이야. ‘핥아 치워라’가 아니라, ‘혀로 모셔라’라고 표현해야 맞는 거 아니겠니.”

두 번째 교편이 이번에는 허벅지 뒤쪽을 갈겼다. 성월은 자신의 치아를 통해 새어 나오는, 억누를 수 없는 신음을 들었다. 그건 완전히 낯선, 마치 야수가 다쳤을 때 내는 듯한 신음이었다. 다리 뒤쪽의 살이 빠르게 부어오르며 펄떡거리는 감각, 그리고 맥박이 그 상처 부위에서 단독으로 뛰는 듯한 격렬한 고통이 느껴졌다.

세바스찬의 손가락이 성월의 목덜미를 잡은 채 다시 한 번 힘을 주었다. 이번에는 척추 위쪽 신경 다발을 눌러, 거친 굴욕감과 통증이 뒤섞인 어떤 강제적인 굴종감을 느끼게 했다. 성월은 자신의 의지가 산산조각 나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고개가 한 번, 또 한 번 더 낮아졌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짚으며, 동물처럼 상반신을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발가락 끝이 교복 구두 속에서 경련하며 구겨졌다. 치마가 위로 말려 올라가 벌겋게 달아오른 허벅지 살갗과 교편에 맞아 붓고 갈라진 상처 부위가 그대로 바깥 공기에 드러났다.

마침내 그녀는 혀를 내밀었다.

혀끝이 바닥에 닿는 순간, 대리석의 차가운 감촉이 먼저 전해졌다. 그다음은 점액의 미끈거리고 생소한 질감, 마지막으로 사금 알갱이의 까끌까끌한 금속성 촉감이 미뢰를 덮쳤다. 그리고 맛——약간 짜고, 비릿하고, 쇠 맛이 나는 어떤 원초적인 비린내가 구강 전체를 가득 메웠다. 위액이 다시 한 번 식도를 타고 역류했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구역질을 참으며 삼켰다, 삼켰다. 혀끝이 더듬어 바닥에 붙은 그 차갑고 끈적한 액체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혀로 핥아 입안으로 거둬들였다. 그 끈적한 실타래 같은 것이 혀뿌리와 입천장을 감싸며 일부는 턱 밑으로 흘러내려 교복 칼라를 적셨다.

레인이 위에서 굽어보고 있었다. 그는 마치 감상을 마친 미술 평론가 같은 표정을 지었다.

“혀를 더 길게 내밀어. 혀뿌리가 보여야 해. 그게 진심으로 속죄하는 자의 예의다.”

이사벨라의 교편이 다시 휘둘러져 이번에는 허리에 떨어졌다. 성월의 혀가 몸부림치듯 길게 튀어나왔다. 그녀는 혀의 감촉과 미각의 신호를 뇌가 더는 처리하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세바스찬이 수정판을 든 채 빛을 그녀의 얼굴에 직접 비추자, 모든 것이 너무나도 선명해졌다——혀끝에 묻어나는 침과 이물질, 코끝이 바닥을 스치며 붉게 까진 상처, 충혈된 눈동자와 눈 가장자리에 맺힌, 마지막 자존심이 무너지며 흘러내리는 눈물 한 방울.

리나의 울음소리가 이미 쉰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제발…… 제발 그만둬…… 나야, 나를 벌해…… 제발……”

아무도 그녀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모두가 집중하고 있었다. 한때 교실에서 가장 곧았던 척추가, 어떻게 완전히 땅바닥에 납작 엎드리는지를.

바닥에 떨어진 마지막 한 방울의 탁한 액체가 사금 알갱이 한 알을 뒤덮은 채 혀끝에 닿아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을 때, 성월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레인이 무릎을 꿇고 앉아 손수건을 꺼내, 마치 가장 다정한 연인처럼 그녀의 입가에 묻은 침과 먼지, 그리고 남은 흔적을 닦아주었다.

“아주 잘했어.”

레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보아하니 평민을 상대하는 새로운 예절을 조금씩 배우고 있는 모양이군.”

이사벨라도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교편을 거두었다. 세바스찬이 손을 놓자, 성월은 갑자기 지지를 잃은 인형처럼 옆으로 쓰러졌다. 그녀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뺨을 붙인 채 웅크렸다. 그녀의 등 뒤로, 교편에 맞아 부르튼 상처가 격렬하게 욱신거렸고, 허벅지 뒤쪽은 이미 새파랗게 멍들어 검은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조명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커튼이 열렸다. 오후의 햇살이 다시 교실을 비추었지만, 그 빛은 이제 부서진 교복과 올이 풀린 머리카락, 그리고 다 닦아내지 못한 채 바닥 이음새에 박혀 반짝이는 사금 알갱이들만을 비출 뿐이었다.

빅토르 폰 스트레이가 교실 문을 밀고 들어왔다. 그의 어깨에는 두툼한 가죽 공구함이 걸려 있었고, 벨트에는 각종 은제 소도구가 차고 넘쳐났다. 그는 바닥에 웅크린 성월을 내려다보며 마치 실험 샘플의 상태를 기록하는 듯한 눈빛을 보였다.

“조교장으로 옮기는 일은 나한테 맡겨.”

빅토르의 목소리 톤은 평범한 일상 업무를 논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사벨라 선생님, 오늘 밤 초기 적응 훈련 일정이 잡혀 있습니까?”

이사벨라가 금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아주 살짝 미소 지었다.

“물론이지. 오늘 밤은 자세 교정이 주된 내용이다. 육체가 기억할 수 있을 때까지, 무릎을 꿇는 것은 단지 하나의 훈련 동작일 뿐이며 숨 쉬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가르쳐 줘야 해.”

성월은 두 사람의 대화를 귀로 들으면서도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녀는 조교장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다. 1학년 때 이사벨라가 예의 수업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다——“문제가 있는 학생들이 다시 태어나는 신성한 장소”라고. 이제 그녀는 ‘문제가 있는 학생’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빅토르가 그녀의 겨드랑이를 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성월의 다리는 완전히 힘을 잃은 채 바닥을 질질 끌었다. 교실을 나서 복도로 접어들자, 공기는 한순간에 차갑고 눅눅하게 변했다. 벽에 걸린 등불이 푸르스름하고 어두운 빛을 발하며 길고 비뚤어진 그림자를 드리웠다. 복도 천장은 점점 더 낮아져 마치 사람을 집어삼키려는 식도의 벽처럼 느껴졌다.

지하로 통하는 회전 계단 입구에서, 빅토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뒤따라 걸어오는 리나를 내려다보았다. 리나는 누군가의 부축도 없이 허둥지둥 따라오고 있었는데,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두 눈은 이미 퉁퉁 부어 있었다.

빅토르가 무심하게 내뱉었다.

“돌아가라, 평민. 조교장은 너 같은 게 올 데가 아니야.”

리나는 거기 멈춰 서서 두 손으로 자신의 팔을 꼭 껴안았다. 그녀의 손톱이 팔뚝 살을 파고들어 피가 났지만, 그녀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는 성월의 뒷모습이 계단 아래 어둠 속으로 사라지면서, 머리카락이 질질 끌리며 생명 없는 해초처럼 계단 모서리에 스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둠의 심연에서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그건 마치 살점을 씹어 삼키는 듯한, 무겁고 축축한 소리였다.

문이 닫혔다.

복도에는 리나 혼자만 남았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자신의 두 뺨을 세게 때렸다, 또 때렸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그 비명을——울부짖음도, 울음도, 주문도 아닌, 오로지 인간의 목소리로는 낼 수 없는 어떤 소리를 삼켜 버렸다.

——

조교장의 밤은 완전한 칠흑 같았다. 그곳에는 창문도, 양초도, 빛을 낼 수 있는 어떤 물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면은 축축하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돌판이었고, 공기 중에는 생석회와 오래 묵은 핏자국이 뒤섞인 냄새가 감돌았다.

성월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무릎을 껴안았다. 이사벨라가 말한 ‘자세 교정’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빅토르는 그녀를 들여보낸 후 한마디 말도 없이 문을 잠그고 사라졌다. 이 완벽한 어둠과 고요 속에서 감각이 점차 왜곡되기 시작한다. 그녀는 상처 입은 부위가 어둠 속에서 이상하리만치 맥박을 치며 뛰는 것을 느꼈다. 마치 또 하나의 심장이 등과 허벅지 뒤쪽에 돋아난 듯했다. 손목에 찬 시계가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시간 감각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1분 전의 일이 1시간 전의 일처럼 느껴졌고, 교실에서 겪은 굴욕은 평생 동안 가라앉지 않을 끈적한 염액처럼 피부에 들러붙어, 계속해서 천천히 모공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의 혀는 아직도 그 맛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리석 바닥의 차가움, 점액의 미끈거림, 사금의 쇠 맛, 그리고 레인의 손수건이 입가를 스칠 때 나던 백단향의 은은한 향기. 이 모든 감각의 기억이 뒤섞여, 그녀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재생되었다. 그녀는 혀를 입천장에 대고 세게 빨아 보았지만, 그 맛은 이미 미뢰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있었다.

“나는…… 나는 에스트 가의……”

그녀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극도로 낯설고 약하게 울렸다.

‘에스트 가의’라는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자, 그녀의 뇌리에는 문장의 로고가 떠올랐다. 순은 방패 위에 피어난 장미, 전투의 맹세, 조상들의 초상화, 3백 년의 영광. 하지만 그 이미지들은 곧 왜곡되기 시작했다. 순은 방패가 녹아 진흙이 되고, 피어난 장미가 진한 액체를 흘리며, 전투의 맹세가 리나의 호느낌으로 변했다. 조상들의 초상화 속 인물들이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에스트 가의……”

그녀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지만, 이번에는 더는 이어 나갈 수 없었다. 그 성 뒤에는 어떤 단어가 붙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영광? 존엄? 전통? 이 단어들은 이 어둡고 눅눅한 지하 감방에서 금속이 녹슬 듯 빠르게 부식되어 버렸다.

그녀는 문득 리나를 생각했다. 리나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기숙사로 돌아갔을까?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을까? 성월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적어도 리나는…… 적어도 그 애는 괜찮아야 해, 나의 이 모든 것이 가치 있으려면——.” 하지만 말을 마치기도 전에, 깊은 곳에서부터 파도처럼 밀려오는 맹렬한 증오가 그 위로를 집어삼켰다. 그건 리나를 향한 증오가 아니라, 바로 이 등가교환 앞에서의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증오였다. 그녀는 귀족의 딸이며,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모든 교환이 그녀에게 유리하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자신의 존엄을 바쳐야 거우 평민 친구의 손가락 몇 개와 혀뿌리 하나를 겨우 지킬 수 있었다. 이 교환 비율 자체가 그녀가 알고 있던 세상의 질서를 뒤흔드는 조롱이었다.

어둠 속에서 시간은 이미 길고 가느다란 실처럼 무한히 늘어져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성월은 언제부턴가 엉덩이를 축축한 돌바닥에 붙인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돌벽에서 스며나오는 한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가 뒷머리까지 파고들었다. 상처 부위는 더 이상 욱신거리지 않고, 그 대신 깊은 뼛속까지 저릿저릿한 통증으로 변해 있었다. 배고픔이 시작되었지만, 위장에 대한 생각은 곧바로 또 그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입안에 남은 비린내. 그녀가 머리를 세게 흔들며 이 생각을 떨쳐내려 하자, 그 동작으로 인해 목덜미에 남은 세바스찬의 손가락 자국이 또다시 옥죄는 듯한 통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전에 그녀는 ‘굴욕’이 감정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며, 곧게 선 척추와 단호한 의지로 버틸 수 있는 것이라 믿었다. 지금에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 진정한 굴욕은 육체의 차원에 속하며, 살갗의 찰과상, 혀끝의 미각 기억, 뼈마디의 통증, 그리고 어둠 속에서 무한히 증폭된 감각 왜곡이라는 형태로 사람을 완전히 집어삼킨다는 것을. 그건 기둥이 무너지는 게 아니라, 마치 흰개미가 나무를 갉아먹듯, 하루살이가 제방을 파먹듯 조용히 진행되는 파괴였다.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시각, 바깥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이사벨라의 구두 소리였다——일정한 리듬, 차분한 속도. 마치 매일 밤 같은 시간에 병실을 순회하는 의사 같았다.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추었고, 몇 초의 정적 후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사라지는 방향으로.

그 발소리가 성월에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했다. 오늘 밤은 단지 시작일 뿐이라는 것. 더 많은 ‘수업’이, 더 많은 ‘교정’이, 더 많은 ‘훈련’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이사벨라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녀에게 시간은 많았다. 그건 마치 좋은 포도주를 빚는 것처럼 천천히, 천천히 발효시켜야 했다.

성월은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뜨는 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더듬어 자신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광대뼈, 콧대, 턱선——이 모든 뼈대들은 여전히 그녀가 아는 그 얼굴의 윤곽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 끝으로 전해지는 감촉은 왠지 낯설었다. 마치 가면을 만지는 것 같았다. 아니면 어쩌면 이게 진짜 살갗이고, 저 너머에 있는 것이 비로소 가면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자신의 입가가 천천히 위로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미소였다. 어떤 내용도, 어떤 의미도 담고 있지 않은 미소. 단지 얼굴 근육이 저절로 수축되어 만들어진 일그러짐이었다. 이 어두컴컴한 감방에서, 아무도 이 미소를 보지 못했다. 바로 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 미소를 한층 더 아이러니하고 위험하게 만들었다.

“에스트 가의……”

그녀는 또다시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 성 뒤에 어떤 단어 하나를 덧붙였다. 그 단어는 오직 자신의 심장 박동을 통해서만 들릴 수 있을 정도로 작고 희미했지만, 일단 입 밖으로 나오자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더는 떼어낼 수 없는 먹빛 뼈대가 되었다. 그 뼈대가 그녀 안에 뿌리내리고, 싹을 틔우고, 퍼져 나갔다.

——

새벽이 되었을까, 아니면 아직 한밤중일까.

조교장의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 들어온 것은 이사벨라와 빅토르였다. 이사벨라는 한 손에 촛대를 들고 있었고, 빅토르의 손에는 가죽 끈과 금속 버클이 달린 정교한 마구 형태의 새들브라이들이 들려 있었다.

이사벨라가 촛대를 들어 올리자, 촛불이 안정된 노란 빛을 발하며 성월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녀는 성월이 벽에 기댄 채 철조망 너머로 빛을 바라보는 표정을 보았다. 그 시선이——아니, 그건 더 이상 어제 아침 교실에 서 있던 그 무모하고 곧은 눈빛이 아니었다. 그 속에서 이사벨라는 어떤 아주 작고 미세한 변화를 포착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전락’이 첫발을 내딛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빅토르가 새들브라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가죽과 금속이 돌바닥에 부딪히는 낮고 탁한 소리를 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성월의 얼굴 높이에 자신을 맞추었다. 그의 눈빛은 장인이 재료를 살피듯 진지하게, 진지하게, 한 올 한 올, 한 치 한 치, 성월의 얼굴 윤곽과 목선을 관찰했다.

“회복력이 아주 뛰어나군.”

빅토르가 마치 자신에게 말하듯이 말했다.

“좋은 재료야.”

성월은 그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벽에 등을 기댄 채, 웅크린 자세로, 두 눈을 반쯤 감고 촛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왼손 검지는 미세하고 빠르게 떨리고 있었고, 손톱이 이미 손바닥 살을 파고들어 네 개의 붉은 피딱지가 앉은 초승달 모양의 상처를 남겼다.

이사벨라가 촛대를 높이 치켜들어 불빛이 더 넓은 범위를 비추게 했다. 그녀의 그림자가 천장과 벽면에 기이한 형상으로 펼쳐졌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고, 그 목소리는 한밤중 예배당의 오르간처럼 엄숙하고 맑았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자. 오늘의 수업은 ‘올바르게 걷는 법’을 가르쳐 줄 거야.”

빅토르의 손이 성월의 발목을 잡았다. 성월은 반항하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반항이라는 관념 자체가 마치 아주 오래된, 유치한 동화 속의 한 페이지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빅토르가 자신의 발목을 들추고, 양말을 벗기고, 차가운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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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줄과 기어다니기

목줄이 채워지는 순간, 성월은 가죽 냄새를 맡았다. 차갑고 억센 가죽이 목을 조이며 숨통을 옥죄었다. 레인 블레이크는 우아한 손가락으로 목줄 버클을 채우면서 미소 지었다.

"자, 이제야 제법 개답구나. 에스트 가문의 영애께서 이렇게 멋진 목걸이를 하시다니."

성월은 바닥에 무릎 꿇고 있었다. 교복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찢긴 천 사이로 멍든 살갗이 드러났다. 허벅지에는 지난밤 세바스찬이 남긴 칼자국이 아직도 욱신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레인이 목줄을 팽팽하게 당겼다.

"고개 들어, 성월. 개가 주인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면 버릇없는 거야."

강제로 턱이 들렸다. 성월의 까만 눈동자에는 이미 생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꺼지지 않는 한 점의 불씨, 증오의 잔불이 숨어 있었다. 레인은 그걸 즐겼다. 완전히 꺼뜨릴 수 있다는 생각에 전율했다.

"오늘은 식당까지 산책을 좀 하자. 물론, 개답게 기어서."

그가 목줄을 휙 잡아당겼다. 성월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손바닥이 차가운 돌바닥에 쓸리며 껍질이 벗겨졌다. 이사벨라 모어가 복도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 있었다.

"레인, 네 발로 걷는 자세가 완벽하지 않구나. 다시 가르쳐야겠어."

이사벨라는 다가와 구두 코로 성월의 허벅지 안쪽을 쿡 찔렀다.

"다리를 더 벌려. 엉덩이는 높이 들고. 암캐가 꼬리 내리면 되겠니?"

성월은 떨리는 팔로 몸을 지탱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무릎이 돌바닥에 긁히는 고통은 이미 익숙했다. 그녀는 네 발로 기었다. 손과 무릎으로 복도를 전진할 때마다 찢긴 교복이 바닥에 끌렸다. 레인은 마치 진짜 산책이라도 하듯 여유롭게 걸으며 목줄을 쥐었다.

복도는 길었다. 아카데미의 오래된 석조 복도는 고딕 양식의 아치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붉은색과 푸른색 유리를 통과한 빛이 성월의 등에 얼룩덜룩 그림자를 드리웠다. 한때는 이 복도를 고개 치켜들고 걸었던 자신이 떠올랐다. 에스트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망토를 휘날리며.

이제는 네 발로 기어다니는 짐승이 되었다.

갑자기 발소리가 들렸다. 성월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복도 바닥의 돌 틈새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발걸음, 그 작고 조심스러운 발소리는 너무나 익숙했다.

리나였다.

리나는 복도 모퉁이에서 멈춰 섰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흘러나오는 울먹임을 막을 수 없었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친구 성월, 아니 그녀가 알던 당당하고 거만하던 귀족 아가씨가 네 발로 바닥을 기고 있었다. 목에는 가죽 목줄이 감겨 있었고, 드러난 허벅지에는 피멍과 상처가 가득했다.

"성, 성월아…"

리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나 그 순간 레인이 고개를 돌리며 미소 지었다.

"아, 평민 학생이네. 마침 잘 왔어. 우리 성월이 얼마나 개처럼 귀여운지 좀 보렴."

레인은 성월의 목줄을 세게 잡아당겼다. 성월의 목이 뒤로 젖혀지며 기침이 터져 나왔다.

"멈추지 마, 성월. 계속 걸어. 아니, 계속 기어."

성월은 리나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볼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리나가 보는 것이, 그 친구가 울고 있는 것이, 그 어떤 고문보다 참기 힘들었다. 손톱이 땅에 긁히며 부러져 나갔다. 무릎에서 피가 배어나와 돌바닥에 붉은 자국을 남겼다.

리나는 두 걸음 다가왔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제발… 레인 회장님… 제발 그만…"

레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명령하니? 평민 주제에. 아니면 너도 개가 되어볼래? 네 친구랑 나란히 기어 보던가."

리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두려움, 죄책감, 무력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녀의 다리가 풀렸다.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눈물만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성월은 그때서야 고개를 돌렸다. 리나를 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무표정했지만, 그 순간 그 눈동자 속에서 리나를 이해시켰다. *가만히 있어. 아무것도 하지 마. 너까지 이렇게 될 필요 없어.*

리나는 그 눈빛을 읽었다. 그래서 더욱 비참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친구를 구할 수도, 대신 고통받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바닥에 엎드려 흐느껴 울었다.

"자, 이제 그만 가자. 개 밥 줄 시간이야."

레인이 지루하다는 듯 목줄을 다시 당겼다. 성월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그녀는 다시 네 발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복도에 모여든 귀족 학생들이 깔깔거리며 손가락질을 했다.

"봐봐, 에스트 영애가 바퀴벌레처럼 기어가잖아."

"교복 찢어진 거 좀 봐. 속살이 다 보이네."

"어제 세바스찬한테 당하고도 걸을 수 있어? 대단한 회복력인데?"

조롱이 비수처럼 꽂혔다. 성월은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고 싶었지만, 손은 바닥을 짚느라 자유롭지 못했다.

식당 입구에 도착했을 때, 성당의 파이프 오르간 같은 웅장한 식당 문이 열렸다. 평소 귀족 학생들이 우아하게 식사하는 홀. 샹들리에 불빛이 현란하게 반짝이는 그곳으로, 성월은 네 발로 기어 들어갔다.

구둣발이 보였다. 수많은 구두, 부츠, 하이힐. 그들이 만든 원 안으로 성월이 끌려 들어갔다. 레인이 목줄을 풀지 않고 그대로 테이블 다리에 묶었다.

"거기 앉아 있어, 성월. 아니지, 거기 엎드려 있어."

빅토르 폰 스트레이가 다가왔다. 그의 군화에는 쇠 징이 박혀 있어 걸을 때마다 찰칵 소리가 났다. 그는 뭔가를 쟁반에 담아 들고 있었다. 쟁반을 성월의 코앞 바닥에 철퍽 내려놓았다.

쇠로 된 개밥그릇이었다. 그 안에는 걸쭉한 죽 같은 것이 담겨 있었는데, 식당에서 나오는 요리가 아니라 남은 찌꺼기를 긁어모은 듯한 흉물스러운 냄새가 풍겼다.

"자, 먹어. 개밥이다. 영양가도 생각해서 특별히 내가 영양제를 섞어줬어. 네가 곧 내 실험실에서 쓸 몸이니까 건강해야 해."

빅토르는 웃으며 말했다. 그의 광적인 눈빛은 성월을 하나의 재료로 바라보고 있었다.

성월은 개밥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위가 뒤틀렸다. 냄새만으로도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녀는 먹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안 먹으면 억지로라도 먹여."

빅토르가 발을 들었다. 낡은 군화 바닥이 성월의 얼굴을 짓눌렀다. 쇠 징이 관자놀이를 찔렀다. 아픔과 동시에 모욕감이 뇌를 강타했다. 발바닥 냄새, 가죽 냄새,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의 머리가 바닥으로 내리눌리며 뺨이 개밥그릇 가장자리에 닿았다.

"먹으라고. 개가 할 일은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뿐이야."

이사벨라가 의자에 걸터앉아 다리를 포개며 말했다.

"성월, 네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바로 체념하는 거야.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눈빛. 하지만 그것도 오래 못 갈 거다. 몇 주만 지나면, 넌 이 밥그릇을 핥으면서도 기뻐할 거야."

성월은 떨리는 혀로 죽을 핥았다. 역겨운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썩은 야채와 탄 고기 조각이 씹혔다. 토할 것 같았다. 그러나 계속 핥았다. 목구멍을 억지로 넘겼다. 위가 경련을 일으켰지만, 그녀는 삼켰다. 살기 위해서,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기 위해서.

세바스찬 그레이가 조용히 다가와 쪼그려 앉았다. 그는 손에 작은 전기 충격기를 들고 있었다.

"성월, 제대로 먹어야지. 허벅지 근육이 위축되면 내가 재미없잖아."

그는 충격기를 성월의 옆구리에 갖다 댔다. 찌직 하는 소리와 함께 고통이 번개처럼 퍼졌다. 성월의 몸이 경련하며 웅크려들었다. 개밥그릇이 넘어지며 죽이 바닥으로 흘렀다.

"아, 이걸 엎질렀네. 못된 개야."

레인이 혀를 찼다. 그가 성월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흘러내린 죽에 얼굴을 처박았다.

"깨끗이 핥아. 바닥까지 반짝반짝하게."

식당 안에 있던 수많은 귀족 학생들이 구경하며 깔깔거렸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돔 천장에 메아리쳤다. 성월은 죽과 먼지가 섞인 것을 핥아먹으면서,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마음속에 새겼다.

식사 시간이 끝날 무렵, 빅토르가 다시 다가왔다. 그는 이번에 바늘이 달린 작은 유리병을 꺼내 들고 있었다.

"오늘 밤 실험실로 데려가기 전에 혈액 샘플이 필요해. 가만히 있어."

그는 성월의 팔을 낚아채 거칠게 정맥을 찾았다. 바늘이 찔러 들어가는 순간, 성월은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주사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혈액 성분이 꽤 좋네. 역시 귀족 핏줄은 달라. 네가 우리 프로젝트의 결정적인 열쇠가 될 거야."

빅토르의 말에 이사벨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하지만 그 전에 정신 교육을 더 시켜야 해. 아직 저 반항하는 눈초리가 사라지지 않았어."

레인이 테이블 다리에 묶인 목줄을 풀며 말을 이었다.

"걱정 마. 반항할 의지 같은 건 곧 사라질 테니까."

그날 밤, 성월은 지하실 감금실로 돌아왔다. 차갑고 축축한 돌방에는 지푸라기만 깔려 있었다. 그녀는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온몸이 아팠다. 무릎은 피딱지로 덮였고, 손톱은 부러지고 깨졌다. 허벅지의 칼자국은 덧나려고 욱신거렸다. 입 안은 썩은 음식 맛과 피 맛이 뒤섞여 참혹했다.

그러나 육체의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를 짓누르는 것은 절망이었다. 오늘 복도에서 마주친 리나의 얼굴.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일그러진 그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리나는 평생 자신을 자책하며 살아갈 것이다. 성월 자신은 이제 평생 개로 살아가거나, 아니면 빅토르의 실험체로 변해 죽을 것이다.

아니, 죽을 수 있을까?

실은 그게 가장 큰 고문이었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 목숨을 끊어 이 모든 수치와 고통을 끝내고 싶었다. 더 이상 개가 되지 않고, 더 이상 도구가 되지 않고.

성월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혀를 길게 빼고, 이를 악물었다.

파직.

끔찍한 통증과 함께 피가 입 안을 가득 채웠다. 혀 끝이 잘려나갔지만, 아직 절반은 붙어 있었다. 한 번에 끊지 못했다. 고통이 전신을 덮쳤다. 눈앞이 하얘졌다. 피가 기도를 넘어가며 쿨럭거렸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이를 악물려고 했지만,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이사벨라였다. 그녀는 잠옷 차림에 겉옷을 걸친 모습이었지만, 눈은 전혀 졸리지 않은 포식자의 것이었다.

"이런, 이런. 자살 시도라니. 예상했어. 그래서 몰래 지켜보고 있었지."

그녀는 성실하고 빠르게 다가와 성월의 턱을 움켜잡았다. 피투성이가 된 입을 벌리게 하고, 혀의 상처를 확인했다.

"혀를 깨물었구나. 하지만 겁쟁이처럼 반밖에 못 끊었어. 귀족이라는 자가 자살 한 번 제대로 못 하니?"

이사벨라는 웃으면서도 냉정하게 처치를 시작했다. 그녀는 작은 응급 처치함에서 지혈제 가루를 꺼내 성월의 입 안에 쏟아부었다. 피 맛과 약 맛이 뒤섞여 극심한 메스꺼움을 일으켰다.

"내일 빅토르가 실험하기 전에 죽으면 안 되니까, 목숨만 붙여놓을게."

말을 마친 그녀는 더 큰 가죽 케이스를 열었다.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마스크와 구속구가 정리되어 있었다. 이사벨라는 그중에서 입 부분에 쇠창살이 달린 입마개를 꺼냈다.

"앞으로는 이걸 계속 착용할 거야. 잠잘 때도, 밥 먹을 때도, 씻을 때도. 네 입은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 열리지 않아. 음식을 먹을 때는 빨대나 튜브를 통해서만 가능하지. 그리고 혀도 못 움직이게 고정할 거야."

성월은 계속되는 고통과 출혈로 정신이 혼미해져 가면서도 이사벨라의 말을 들었다. 입마개가 얼굴에 밀착되는 감각이 느껴졌다. 가죽 끈이 머리 뒤에서 단단히 묶였다. 쇠 프레임이 입을 완전히 가두었다. 혀를 깨물려 해도 이가 닿을 수 없었다. 이제 소리조차 마음대로 낼 수 없는 진짜 짐승이 되었다.

이사벨라는 일어서며 쓰다듬듯 입마개 너머로 성월의 머리를 토닥였다.

"좋아, 이제 자살 따위는 꿈도 꾸지 마. 너는 우리가 완성할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해. 완벽한 걸작품으로 거듭날 거니까."

그녀가 떠난 후 감금실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성월은 입마개 안에서 숨을 쉬었다. 피 맛이 가시지 않는 입 안에서, 그녀는 고통 속에서도 생각했다.

그래, 이제는 죽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살아남아, 언젠가 이 지옥을 빠져나가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돌려주는 것.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 쇠 프레임 사이로 스며 흡수되었다. 성월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 이전과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절망은 서서히 어떤 형태의 어둡고 단단한 결의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

백합의 함정

교무실은 차가운 정적에 잠겨 있었다. 이사벨라 모어는 창가에 기대어 손끝으로 찻잔을 맴돌리며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문이 열리고 성월 에스트가 들어왔다. 발걸음은 무겁고 눈빛은 흐릿했다. 한때 당당하던 귀족 아가씨의 흔적은 이미 옅어지고, 지옥을 거친 자의 피로가 뼛속까지 스며 있었다.

이사벨라는 부드러운 손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렴, 성월. 요즘 많이 지쳤구나. 나는 네가 스트레스를 풀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성월은 말없이 앉았다. 시선은 바닥에 박혀 있었다. 이사벨라는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손끝은 가벼웠지만 그 촉감은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 섬뜩했다.

"이곳은 안전해. 아무도 방해하지 않아. 마음속 얘기를 나에게 털어놓아도 돼."

이사벨라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나긋나긋했다. 그녀는 성월의 등 뒤로 돌아가 양손으로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긴장을 풀어. 몸이 이렇게 굳어 있잖니. 네가 리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걸 희생했는지 나는 알고 있어. 하지만 너 자신을 돌보는 것도 잊지 말아야지."

리나의 이름이 나오자 성월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이사벨라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고 계속했다.

"너는 참 고귀한 선택을 했구나. 귀족의 품격으로 평민을 구하다니. 하지만 지금은 네 몸과 마음이 너무나 지쳐 있어. 나는 그런 너를 돕고 싶어."

그녀의 손은 어깨에서 목선으로, 다시 쇄골 쪽으로 미끄러졌다. 손끝이 피부에 닿을 듯 말 듯 스치며 낯선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성월의 몸은 경직되었지만 저항하지 않았다. 지난 몇 주 동안 그녀는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걸 뼈저리게 배웠기 때문이다.

"편안해져야 해. 몸은 솔직하니까. 네가 느끼는 고통, 두려움, 죄책감…… 모두 나에게 맡겨."

이사벨라는 성월 앞으로 돌아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두 눈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뱀처럼 깊고 위험했다.

"눈을 감아 봐. 내 손길에만 집중하는 거야."

성월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쓰다듬고, 귓가를 지나며, 목덜미를 간질였다. 감촉은 너무나 부드럽고 능숙해서, 고통에 찌든 몸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했다. 근육이 조금씩 풀리고 호흡이 깊어졌다.

"잘하고 있어. 이게 바로 진정한 교감이야. 우리 둘만의 비밀이지."

이사벨라는 속삭이며 손을 들어 성월의 턱 밑을 살짝 쳐들었다. 엄지손가락이 아랫입술을 스쳤다.

"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니? 너의 희생, 너의 순수함…… 나는 그런 네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성월의 눈꺼풀이 떨리고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살짝 꼬였다. 이사벨라는 그녀의 내면이 무너지는 틈을 정확히 노렸다. 그녀는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이제 조금만 더 나에게 다가와 줘. 네 마음을 완전히 열어 봐."

입술이 거의 닿을 듯한 거리에서 그녀가 멈췄다. 따뜻한 숨결이 섞이며 공간이 왜곡되는 듯했다.

"성월, 나에게 입맞춤을 해 주겠니? 네가 나를 신뢰한다는 증표로……."

성월의 온몸이 굳어졌다. 눈을 떠서 이사벨라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혼란과 반감, 그리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도움을 청하고 싶어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 방은 고립무원의 함정이었다.

이사벨라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부드러운 겉모습 아래 강철 같은 강제력이 숨 쉬고 있었다.

"리나를 생각해. 네가 협조한다면 나는 그녀가 지금보다 훨씬 편안하게 지내도록 해 줄 수 있어. 하지만 만약 거부한다면……."

말은 채 끝나지 않았다. 그 암시는 독사보다도 날카로웠다. 성월의 숨이 막혔다. 리나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이곳에 왔을 때 피 흘리며 웅크린 모습, 자신을 구하려 애쓰던 눈빛. 이사벨라의 말은 거절할 수 없는 명령으로 성월의 심장에 뿌리박혔다.

성월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무릎에서 무릎으로 죄어 오는 절망을 삼켰다. 그리고 마침내 떨리는 입술을 이사벨라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순간 이사벨라의 혀가 침입해 왔고, 강제적이고 능숙한 키스가 시작되었다. 성월은 눈을 꼭 감았지만 몸부림치는 혐오감을 감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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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장면은 방 구석의 화려한 금박 액자 너머, 숨겨진 카메라 렌즈에 의해 완벽하게 포착되고 있었다. 그리고 화려한 장식으로 둘러싸인 지하의 밀실에서 귀족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생중계를 즐기고 있었다.

레인 블레이크는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어 크리스털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화면을 응시했다. 그의 입가에는 포식자의 미소가 번졌다.

"보라구, 이사벨라 선생님의 수업은 언제나 이렇게 매력적이야.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코를 높이 세우던 성월 에스트가, 지금은 선생님 발아래 키스하는 걸 배우고 있잖아."

세바스찬 그레이는 손에 든 소형 컨트롤러를 가지고 카메라 각도를 미세하게 조정하며 감상에 빠졌다. 화면에는 두 사람의 밀착된 실루엣이 클로즈업되었다. 성월의 굳은 어깨와 살짝 떨고 있는 손가락마저 선명했다.

"허나 여전히 본능적인 반발이 보여. 하지만 그게 더 재미있어. 완전히 길들이는 과정을 관찰하는 맛이 있지."

레인은 가볍게 웃으며 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그녀의 의지는 아직 완전히 꺾이지 않았어. 리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녀의 최후의 방패야. 하지만……."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 방패도 결국 그녀를 묶는 사슬일 뿐이지. 이사벨라 선생님은 그것을 완벽하게 이용하고 있어."

세바스찬은 카메라를 조정하면서 다른 모니터로 손끝을 가리켰다. 그 모니터에는 별실에 갇힌 리나가 무릎을 웅크리고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비치고 있었다.

"두 여자의 반응을 동시에 보는 것도 재미있어. 한쪽은 영문도 모르고, 다른 한쪽은 친구를 위해 타락해 가고…… 정말 우아한 비극이야."

레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면 속 성월의 얼굴 클로즈업 쪽으로 다가갔다. 눈꺼풀 밑으로 흐르는 눈물 한 방울조차 렌즈에 포착되어 있었다.

"계속 방송해. 놓치는 순간이 없도록. 나는 앞으로의 전개가 더욱 기대되네. 빅토르가 그녀의 '업그레이드' 계획을 끝내면 모든 게 완벽해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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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라가 마침내 입술을 떼자 성월은 의자에 주저앉듯 기대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입술은 부풀어 올랐고 눈에는 생기를 잃은 채 눈물이 맺혀 있었다. 방금 전 모든 게 악몽 같았다. 하지만 입안에 남은 낯선 달콤함은 이것이 현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부드럽게 성월의 머리카락을 빗겨 주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했어, 얘야. 네 협력은 충분한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어. 약속한 대로……."

그녀는 몸을 살짝 숙여 성월의 귀에 입김을 불어넣듯 속삭였다.

"곧 리나를 보게 해 줄게. 하지만 기억해야 해. 이것은 보상이지, 자유가 아니야. 보는 것만 허락돼. 대화도, 신체 접촉도 없어. 알겠지?"

성월의 심장이 마치 누군가에게 꽉 움켜쥔 듯 아팠다. 리나를 만나는 것, 그녀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갈망하던 기적이었다. 하지만 이사벨라가 정한 조건은 그녀의 희망 위에 다시 한 번 쇠사슬을 채우는 고문이었다.

"대답이 필요한데, 성월. 원하지 않으면 상관없지만……."

"하겠어요. 무슨 조건이든…… 리나를 보고 싶어요."

성월의 목소리는 쉰 듯 갈라져 있었다. 이사벨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곧게 폈다.

"좋아. 그런 의지가 바로 더 많은 '진보'로 이어지는 법이지."

그녀는 우아하게 책상으로 걸어가 작은 종을 한 번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복을 입은 학생이 문을 열었다. 세바스찬 그레이였다. 그의 손에는 태블릿이 들려 있었다.

"세바스찬 군, 에스트 양을 격리 관찰실로 안내해 줘. 아주 짧은 면회야. 반드시 규정을 지키도록."

세바스찬은 과장된 예의로 고개를 숙이며 눈을 반짝였다.

"물론입니다, 모어 선생님. 저를 따라오시죠, 숙녀분."

성월은 마비된 듯한 다리를 움직여 일어서며 그의 뒤를 따랐다. 교무실을 나서기 전에 뒤를 돌아보니, 이사벨라는 이미 창가로 돌아가 찻잔을 들고 여유롭게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방금 전의 장면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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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는 길고 어두웠다. 세바스찬은 무거운 쇠문 앞에서 멈추더니 벽에 붙은 생체 인식 장치에 열쇠를 꽂았다. 문이 낮은 굉음과 함께 열리자 특유의 소독약 냄새와 눅눅한 공기가 밀려왔다.

"여기서부터는 절대적인 침묵입니다. 그녀를 보는 것만 허락됩니다. 만약 규칙을 어기면 영상을 즉시 차단할 뿐만 아니라, 리나에게 가해지는 고통의 강도가…… 아시죠?"

세바스찬의 가벼운 말투에는 무서운 위협이 깃들어 있었다. 성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려움을 삼켰다.

세바스찬은 그녀를 작은 방으로 이끌었다. 방은 완전히 어두웠고, 오직 중앙에 매달린 커다란 유리창만이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것은 단방향 투시 유리였다. 성월이 다가가자 심장이 멎는 듯했다.

유리 저편은 텅 빈 하얀 방이었다. 방 한가운데 나무 의자가 하나 있었고, 리나가 그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척해졌고, 얼굴에는 핏기라곤 없었다. 눈은 깊게 꺼졌고, 깡마른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성월을 찌른 것은 리나의 눈이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허공만을 응시했다. 그 눈동자에는 빛이라고는 없었다.

성월은 손을 들어 무심결에 유리창을 만졌다. 차가운 감촉이 그녀의 손바닥을 찔렀다.

리나……

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규칙을 어기면 리나를 해칠 것이다. 그녀는 유리에 기대어 조용히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저편의 리나는 갑자기 살짝 고개를 들었다. 마치 무언가 느낀 듯이. 그녀의 시선이 성월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지만, 초점은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입술은 살짝 떨리고, 떨리는 손을 들어 허공을 향해 내밀었다.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가장 가까운 누군가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아는 듯이.

성월은 유리를 넘어 뚫고 나가 리나의 손을 붙잡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파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실내의 조명이 켜지고 세바스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 종료입니다."

영상이 끊겼다. 유리창은 다시 한 번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성월이 잃었던 것은 단지 만남의 순간뿐만이 아니라, 그 안에 있던 마지막 온기조차 빼앗겨 버린 듯했다.

"이런 게 보상이라고……?"

그녀의 목소리는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세바스찬은 무표정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모어 선생님은 만나게 해 준다고 약속하셨죠. 약속은 지켜졌습니다. 지나친 기대는 금물입니다, 에스트 양."

성월은 유리창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손톱이 바닥을 긁었다. 복수심이라고 할까, 절망이라고 할까,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녀의 가슴속에서 검은 불길로 타올랐다. 리나의 얼굴, 이사벨라의 키스, 레인의 미소,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영혼 속에서 뒤섞이며 증오라는 이름의 괴물로 응결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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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 블레이크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든 와인잔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그는 모니터 속에 무릎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성월의 모습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름다워.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찬란한 빛을 내는 법이지. 하지만 아직이야. 그 빛이 증오로 타오르는 점이 더욱 우리의 취향에 맞아."

곁에 앉은 세바스찬이 카메라 영상을 재생하며 냉정하게 분석했다.

"그녀의 정신 방어 메커니즘이 전환점을 맞고 있어. 전형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반응. 지금쯤이면 빅토르가 개입해 조건 반사를 더욱 강화할 시기야."

레인은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에게 연락해서 '백합의 함정'은 이미 떡밥을 뿌렸다고 전해. 다음 단계는 한층 더…… 야성적인 맛이 나도록 해야지."

그는 마지막으로 화면에 남아 있는 성월의 흐릿한 잔영을 한 번 흘끗 보며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그 미소 속에서 성월 에스트의 앞으로 다가올 지옥은 더욱 깊어만 갔다.

교실의 군연

자습 시간이었지만, 교실 안에는 무거운 적막이 흐르지 않았다. 오히려 은밀하고 축축한 긴장감이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귀족 학생들은 책상에 앉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느슨한 원을 그리며 교탁 주변에 모여들었고, 그들의 눈빛은 한결같이 굴욕으로 빛나고 있었다. 레인 블레이크는 우아하게 손가락을 들어 올렸고, 그 동작은 마치 지휘자가 서곡을 알리는 것 같았다.

“오늘의 자습 주제는 ‘맹수의 조교’다. 성월 에스트, 이리 와서 시범을 보여라.”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명령의 냉혹함을 감추지 못했다.

성월 에스트는 교실 뒤편 구석에 서 있었다. 낡은 교복이 바람에 살짝 흔들리고, 은발이 흩어져 반쯤 감긴 눈을 가렸다. 그녀는 이미 수 개월 전 지옥의 문턱을 넘어선 자의 무감각을 익히고 있었다. 발걸음이 마루바닥을 스치듯 다가갔고, 어떤 저항도 없었다. 그녀가 교탁 앞에 멈춰 서자, 빅토르 폰 스트레이는 참을성 없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덜미를 눌러 차가운 나무 탁자 위에 상체를 엎드리게 했다.

“제법 훈련이 잘 됐군. 이제 매일 밤 우리에게 몸을 바치는 법을 배웠나 보지?”

빅토르의 목소리는 금속과 피비린내를 머금은 듯 낮고 탁했다.

세바스찬 그레이는 묵묵히 도구 상자를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뚜껑이 열리자, 정교하게 연마된 가죽 끈, 금속 고리, 늘어나는 집게들이 교실의 약한 불빛 아래 차갑게 빛났다. 그의 손가락은 능숙하게 벨트 하나를 집어 들었고, 지체 없이 성월의 양 손목을 교탁 가장자리에 단단히 묶었다. 이어서 발목도 탁자 다리에 고정되었다. 성월은 몸을 움츠렸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단지 입술을 깨물며 눈 속에 거의 꺼져가는 불씨 하나를 남겼다.

“아직도 남아 있네, 그 눈빛.”

이사벨라 모어 선생이 교탁 옆에 서서 긴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며 가느다란 하이힐로 성월의 허벅지 안쪽을 스치듯 비볐다. 그녀의 화장한 얼굴에는 자애로운 교사의 미소가 번졌지만, 눈동자 깊은 곳에는 사냥꾼의 냉기가 서려 있었다.

“오늘은 특별히 실물 수업이야. 여성의 육체가 어떻게 도구로 분해되는지, 너희 모두 자세히 보도록.”

레인이 말을 마치자, 세바스찬은 이미 단검을 들어 성월의 교복 앞섶을 찢었다. 천이 찢어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교실을 가르자, 드러난 쇄골과 창백한 가슴은 촛불 아래 밀랍처럼 빛났다. 몇몇 학생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세바스찬은 가죽 끈을 들어 상체가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그녀의 가슴 밑동을 단단히 동여맸다. 가죽이 조여들 때마다 성월은 무심코 몸을 떨었고, 그 미세한 떨림은 주변의 욕망을 더욱 자극했다.

“피부가 좋군. 안타깝다, 점점 더 많은 흉터를 새겨야 할 텐데.”

세바스찬의 말투는 마치 예술적 감상을 평하는 듯했고, 손은 이미 둥글납작한 집게를 집어 들고 있었다. 찬 금속이 살갗에 닿자 성월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가벼운 신음을 흘렸다. 짧고 가느다란 소리가 목구멍에서 흘러나와 교실을 떠돌았다. 이사벨라 선생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순수해. 이제 천천히 길들여야 해.”

이어서 그녀는 리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리나는 교실 구석에 서서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고, 얼굴은 눈물로 뒤덮여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묶인 성월에게서 떼어낼 수 없었고, 죄책감이 그녀를 거의 짓뭉갤 듯했다. 레인이 리나를 향해 손짓하자, 그녀는 반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싫어요... 제발... 저는...”

“싫다고? 네가 그럴 자격이라도 있다고 생각해?”

레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했지만, 그 속에는 거역할 수 없는 압박감이 실려 있었다.

“네가 여기 살아 있는 건 누구 덕인데? 성월 에스트의 희생 덕이야. 그런데 이제 그녀를 조금 돕는 것조차 망설이는구나?”

리나의 다리가 풀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한 걸음 한 걸음 교탁 앞으로 다가갔다. 학생들은 모두 그녀를 바라보며, 장난감을 감상하는 듯한 경멸과 탐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리나는 성월 곁에 다가가서도 여전히 시선을 들지 못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미 찢어진 교복 조각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키스해라, 여기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네가 평소에 얼마나 애틋하게 그녀를 좋아했는지 말이지.”

이사벨라 선생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매혹적이었지만, 리나에게는 지옥의 메아리와 같았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입술을 덜덜 떨며 천천히 몸을 굽혔다. 입술이 닿는 순간, 성월은 갑자기 눈을 떴고, 두 사람의 눈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순간, 마른 우물 같은 눈에서 마지막 빛 한 줄기가 반짝였지만, 리나의 눈물이 그 위에 떨어지자 곧 사라져 버렸다.

리나의 입술은 차갑고 딱딱했지만, 성월의 입술은 마치 죽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리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 이 입술이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자신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안심시켰다는 것을. 부드러운 촉감과 흘러내린 눈물이 뒤섞여 성월의 광대뼈를 스치고 흘렀다. 리나의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움직여 성월의 어깨를 붙잡았고, 그녀는 어깨의 뼈가 유난히 도드라져 얼마나 심한 고문을 겪었는지 알 수 있었다.

“됐다, 가만히 있어라.” 레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는 리나의 손목을 잡고, 그 손을 아래로 내리눌러 찢어진 치마 안으로 집어넣었다. “서로 돕는 법을 배워야지, 그렇지 않겠어?”

리나는 격렬히 몸부림쳤지만, 팔은 쇠집게처럼 붙들려 있었다. 손가락이 강제로 아래로 뻗어나갔고, 촉촉한 곳에 닿자 위가 뒤집히는 듯한 구역질이 치밀었다. 성월의 몸은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가 다시 중심을 잃고 풀어졌다. 그녀는 리나를 보지 않았다. 시선은 허공을 뚫고 저 멀리 교실의 천장 모서리만 응시할 뿐, 마치 영혼이 이미 이 타락한 육체를 떠난 듯했다.

교실 안은 거친 숨소리로 가득했다. 누군가는 이미 바지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빅토르는 성월의 뒤로 걸어가 굵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척추를 짚으며 한 마디 한 마디 평가를 내렸다.

“골격이 아주 좋아. 몇 군데 개조하면 더 많은 무게를 견딜 수 있을 거야. 이사벨라 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서두르지 마라, 빅토르.” 이사벨라가 살짝 웃으며 치마에서 얇은 채찍을 꺼내 그녀의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먼저 그녀가 ‘사람 됨됨이’가 무엇인지 잊게 해야지. 그래야 새 물건을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채찍이 첫 번째 맹렬한 타격을 내리쳤다. 날카로운 통증이 전류처럼 성월의 척추를 타고 올라갔고, 그녀의 상체가 활처럼 뒤로 젖혀졌다.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채찍이 연달아 떨어졌다. 피부 위에 붉은 줄무늬가 빠르게 돋아났고, 몇몇은 살갗이 터져 새빨간 핏방울이 스며 나왔다. 귀족 학생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차례로 다가와 벨트를 풀고 바지를 내렸다.

첫 번째로 올라탄 이는 레인의 측근으로 어두운 남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성월의 둔부를 움켜쥐고, 그 연약한 선홍색 줄무늬를 손톱으로 세게 파고들었다. 이어서 힘껏 밀어 넣자, 건조한 질 벽이 거친 마찰을 버티지 못했다.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단숨에 의식을 덮쳤고, 성월의 손가락은 나무판에 생쥐처럼 할퀴는 소리를 냈다. 리나는 바로 옆에서 무릎이 풀려 쓰러졌지만, 이사벨라가 머리를 붙잡아 고개를 반드시 들고 보게 만들었다.

“잘 봐라, 리나. 이것이 평민이 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기여다.”

남자는 거칠게 충돌했고, 탁자가 찍찍거리는 소리를 냈다. 성월의 은발은 맥없이 흔들렸고, 몇 가닥은 입가에 달라붙고 몇 가닥은 탁자 아래로 쓸려 내려갔다. 그녀는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그저 손목을 묶은 가죽 끈이 살을 파고드는 고통만 집중해서 느꼈다. 그 고통이 하반신의 참상보다 더 진실되게 그녀에게 살아 있음을 알려주었다.

남자가 만족하며 물러서자, 또 다른 사람이 다가왔다. 릴레이 경기처럼, 그들은 차례대로 그녀의 체내로 밀고 들어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액과 정액이 허벅지 안쪽을 따라 흘러내려 피와 뒤섞여 어두운 붉은 자국을 남겼다. 성월의 하반신은 이미 감각을 잃었다. 단지 둔하고 부풀어 오르는 듯한 찢어짐만 있을 뿐이었다. 그 찢어짐은 나팔꽃처럼 퍼져나가 온몸을 삼켰다.

빅토르는 그 틈을 타 금속 기구를 꺼냈다. 의료용 견인기 같은 물건으로 그녀의 다리를 반으로 접어 무릎이 완전히 책상에 붙게 했다. 이제 체액이 더욱 방해받지 않고 흘러나와 좁은 혈 구멍에서 시뻘건 피가 섞인 액체가 방울져 떨어졌다. 세바스찬은 탁자 아래에 유리잔을 놓아 그 타락한 액체를 받았다.

“이런 고귀한 혈통도 결국 더러운 액체로 변하는구나.”

그는 잔을 들어 올려 관찰하며, 붉은 등불이 비친 포도주처럼 감상했다.

리나는 이미 울음을 터뜨려 목이 쉰 채로, 이사벨라의 발아래 엎드려 연신 애원했다.

“그만해 주세요... 죽겠어요... 정말 죽을 거예요...”

“죽겠다고? 하, 그녀는 지금쯤 살아서 죽어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할걸.”

이사벨라가 리나의 머리카락을 확 잡아채 그녀의 고개를 탁자 아래로 내리눌렀다. 그곳은 피비린내와 악취가 사납게 코를 찔렀다.

“잘 봐라, 이 피와 오물이 바로 네 죄의 증거다. 평생 짊어지고 살아라.”

교실 안의 향락은 오후 내내 계속되었다. 창밖의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교실 안의 불빛도 점점 희미해졌다. 성월은 이미 여러 번 실금을 했다. 의식은 몇 번이고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가 통증 때문에 강제로 깨어나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귀족 학생들은 지친 줄 몰랐다. 그들은 바퀴벌레처럼 한 무리가 물러가면 또 한 무리가 올라타 그녀의 체내에 흔적을 남겼다. 일부는 심지어 그녀의 항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더 팽팽하고 침범당하지 않은 구멍은 그들의 광적인 집착을 불러일으켰다. 뒤틀린 파열음이 성월의 몸 안에서 격하게 메아리쳤다. 그녀는 이미 악취를 풍기는 정액과 혈괴 외에는 배출할 수 없게 되었다.

레인은 교탁 한쪽에 기대어 이 모든 것을 감상하며 손에 쥔 회중시계를 열었다.

“시간이 꽤 늦었구나.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그가 명령을 내리자, 학생들은 비로소 느릿느릿 물러났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여전히 여운이 남아 있었다. 몇몇은 떠나면서도 성월의 납작 엎드린 엉덩이를 한 번 더 꼬집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성월은 풀렸다. 손목과 발목은 이미 깊은 보라색 끈 자국이 생겼다. 그녀는 탁자 위에서 미끄러지듯 떨어져 교실 구석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치마는 찢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드러난 하반신은 선혈과 흉터가 어지러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죽은 듯 눈을 감고 오직 미약한 호흡만이 그녀가 아직 살아 있음을 증명할 뿐이었다.

리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빅토르가 한 손으로 밀어내 벽에 세게 부딪히게 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평민. 오늘의 마지막 수업은 ‘화장실 예절’이다.”

그는 성월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마치 파손된 인형을 끌듯 교실 안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그곳 벽에는 익숙한 구멍이 뚫려 있었고, 벽의 다른 쪽은 인접한 교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구멍의 가장자리는 닳은 가죽으로 덧대어져 있고, 아래쪽에는 반쯤 엎드린 자세를 고정하는 금속 링이 달려 있었다. 세바스찬이 이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허리를 굽혀 성월의 무릎과 손목을 링에 뚫어 그녀의 자세를 완전히 고정시켰다. 등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굽어졌고, 허리는 낮게 가라앉아 엉덩이가 구멍 중앙에 정확히 맞춰졌다.

“공중 변기, 육변기, 이름은 아무렇게나 불러도 좋아. 어차피 이제 유일한 기능만 남았으니까.”

빅토르는 성월의 뒤통수를 툭툭 치며 구멍 저편으로 고개를 밀어 넣었다. 차가운 벽돌 표면이 그녀의 광대뼈에 밀착되었고,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반대편 교실의 어렴풋한 불빛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몇몇 낯선 귀족 학생들이 그곳에서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그들은 이 ‘시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잘 들어라, 에스트. 다음에 누군가 네 얼굴 앞에 서면, 입을 벌리고 그들의 배설물을 받아라. 한 방울도 흘려선 안 된다. 알겠나?”

세바스찬의 목소리는 마치 격식을 갖춘 시종처럼 예의 바르고 거리를 두었다.

성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완전히 흐려져 있었다. 더 이상 눈물도, 분노도 없었다. 단지 생물이 극한의 환경에서 본능적으로 만들어 낸 허깨비 같은 적응일 뿐이었다. 입술이 살짝 떨리더니 천천히 열렸다. 그녀는 반대편에서 바지 지퍼가 열리는 소리를 들었고, 이어서 마지막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타락의 소리가 들렸다.

이때, 그녀의 의식 깊은 곳에서 마지막 남은 인성의 잔재가 마치 거미줄처럼 완전히 끊어졌다. 그녀는 증오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천천히 혀를 내밀고, 그 생전 처음 맡는 악취와 따뜻한 액체를 조용히 맞이했다.

리나는 벽 모퉁이에 웅크린 채 그 장면을 바라보며 입을 크게 벌렸지만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오직 죄책감만이 뱀처럼 그녀의 심장을 옥죄여,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었다.

교실 안,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촛불처럼 타올랐다. 이사벨라 선생은 매끈한 하이힐로 마룻바닥을 톡톡 두드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오늘 수업은 아주 성공적이었어.”

벽 구멍의 낮과 밤

복도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낡은 가죽 구두가 돌바닥을 스치는 소리, 웃음소리, 그리고 무언가를 속삭이는 목소리. 성월은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다. 벽 구멍의 돌은 차갑고 축축했고, 어깨와 머리를 짓누르는 압박감이 마치 무덤 속에 갇힌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무릎을 구부린 채 거친 돌바닥에 파묻혀 있었고, 두 팔은 몸통에 바짝 붙인 채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다. 움직일 수 있는 신체 부위라곤 벽 반대편으로 뚫린 구멍 밖으로 나와 있는 하반신뿐이었다.

“오, 오늘은 이걸로구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세바스찬 그레이의 차분하고 계산적인 어조. 그가 다가와서 허벅지 뒤쪽을 가볍게 쥐었다. 성월은 반사적으로 몸을 떨었지만, 근육은 이미 완전히 굳어 있었다. 손가락이 피부를 쓸자, 차가운 금속이 닿는 감각이 이어졌다.

“이 위치, 정말 완벽해. 지나가다가 슬쩍 사용하기에 참 편리하지?”

레인 블레이크의 우아한 음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허리를 두드리며 마치 전시품을 감상하는 듯한 말투로 덧붙였다.

“게다가 누군지 알 수 없으니 더 흥미롭잖아. 귀족들에겐 익명의 즐거움을 주고, 평민들에겐 우월감을 안겨주지.”

“그 평민 놈들은 몰라. 여기가 누군지.”

이사벨라의 부드럽고 교활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녀의 구두 소리가 다가갔다. “한때 저들을 군림하던 성월 에스트인지 말이야. 아이러니하지 않니? 지금 저들은 생각 없이 네 몸을 사용하고 있지만, 정작 네 존재조차 모르는 거야.”

비웃음이 퍼졌다. 성월은 돌 틈으로 스며드는 작은 빗방울 같은 수분을 핥으려고 입술을 움직였지만, 혀가 닿는 건 먼지뿐이었다. 여기는 지하 복도의 한쪽 벽. 옛날 쓰레기 배출구였던 구멍을 개조해 만든, 이름조차 없는 밀실의 일부였다. 그녀의 상반신은 어둠 속에 단단히 갇혔고, 다리만 밖으로 나와 있었다.

첫째 날, 그녀는 구멍 틈새로 보이는 희미한 빛줄기에 의지했다. 복도 저편에서 학생들이 걸어 다니는 발소리, 어쩌다 들리는 대화 내용. 그들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하반신을 향해 다가올 때,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둘째 날, 그녀의 무릎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돌바닥의 날카로운 파편들이 살갗을 찢어놓았고, 고인 물은 핏물로 붉게 물들었다. 어떤 이는 부드럽게, 어떤 이는 거칠게 그녀를 사용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를 접기 시작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목이 쉬었고, 어차피 누구도 듣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셋째 날, 복도가 조용해지는 밤이 되면, 벽 반대편에서 무거운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철컹. 구멍이 완전히 잠기는 순간이었다. 성월은 어둠 속에 홀로 남았고, 유일한 감각은 등 뒤에서 흘러내리는 차가운 물방울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한껏 젖혀 벽돌 틈 사이로 스며드는 수분을 받아먹었다. 핥고, 핥고, 계속 핥았다. 쇠 맛이 났지만, 목숨을 붙잡는 유일한 끈이었다. 배고픔과 갈증, 그리고 찢어질 듯한 통증이 뒤섞여 몸을 흔들었다.

“리나...”

무의식중에 그 이름이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한때 다정했던 친구의 얼굴이 어둠 속에 떠올랐다. 지금쯤 아마 따뜻한 침대에 누워 평화로운 잠을 청하고 있겠지. 자신의 희생 덕분에 살아남은 그녀. 성월은 친구를 구했다는 생각에 잠시나마 미소 지으려 했지만, 입꼬리는 경련을 일으킬 뿐이었다. 따뜻함 대신 스며드는 건 점점 짙어지는 증오였다.

왜 나만? 왜 이렇게까지?

넷째 날 아침, 철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거친 손들이 그녀의 다리를 잡아당겼다. 근육이 마비되어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돌바닥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몸 전체가 쑤시는 통증으로 뒤틀렸다.

“일어나.”

이사벨라의 차분한 목소리. 그녀는 회초리로 성월의 등판을 가볍게 두드렸다.

“다리가 안 돼요...”

“그럼 기어. 짐승에게 다리는 필요 없잖니.”

성월은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이사벨라를 올려다보았다. 여교사의 눈빛은 온화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속에 감춰진 것은 순수한 학대의 쾌락이었다. 성월은 손톱이 부러지도록 바닥을 긁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복도 저편에서 빅토르 폰 스트레이가 다가왔다. 그는 손에 이상한 기계 장치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금속과 가죽이 뒤섞인, 도저히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내 생각엔 이제 진짜 훈련을 시작할 때가 된 것 같아. 육체적 개조도 스케줄에 넣었고.”

빅토르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사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하지만 먼저 네 발로 걷는 법부터 가르쳐야겠어. 이리 와, 성월. 내 사랑스러운 작은 애완동물.”

성월은 온 힘을 다해 머리를 들었다. 목이 뻣뻣하게 굳어 쉽사리 돌아가지 않았다. 복도 끝, 희미한 빛 속에서 레인 블레이크의 우아한 실루엣이 보였다. 그는 등을 돌린 채, 한 권의 책을 읽고 있는 듯했다. 관심조차 없는 태도였다. 그러나 성월은 알았다. 바로 그가 모든 시나리오를 설계했음을, 바로 그가 고귀한 자의 의지가 산산조각나는 것을 감상하는 자임을.

그녀의 내면에서 마지막 남은 빛줄기처럼 희미하던 온기가 사그라들었다. 대신 검고 뜨거운 무언가가 심장을 조여왔다. 증오와 절망. 그것이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 감정의 소용돌이였다. 그녀는 손톱으로 돌바닥을 다시 한 번 긁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몸이 지옥 같았지만,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언젠가, 반드시.

벽 틈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그녀의 등에 떨어져 차갑게 스며들었다. 그녀는 더 이상 핥지 않았다. 이제 지독한 갈증 속에서도, 망가진 몸을 끌고 나아가는 이 순간만이 그녀를 인간에서 무언가 다른 것으로 바꾸고 있었다.

쇠사슬과 낙인

쇠사슬이 바닥을 끌리는 소리가 축축한 돌바닥에 울려 퍼졌다. 조련실 공기는 소독약과 쇠, 그리고 더 오래되고 끈적한 냄새로 가득했다. 세바스찬 그레이는 천천히 가죽 앞치마를 매만지며 벽에 걸린 도구들을 살폈다. 그의 손끝이 인두기 손잡이를 스치자 희미한 금속성 진동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성월 에스트는 쇠사슬에 매달린 채 손목이 무감각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몸은 이미 몇 시간의 조련으로 지쳐 있었고, 무릎은 바닥에 닿을락 말락 한 상태로 허공에서 살짝 흔들렸다. 찢긴 교복 조각이 어깨에서 축 처져 있었고, 피부 위로 올라온 붉은 자국들은 이전 세션의 기록이었다. 그녀의 흐릿한 시선이 세바스찬의 등 뒤로 향했다.

이사벨라 모어가 구석에 우아하게 서 있었다. 그녀의 단정한 투피스는 이 장소와 어울리지 않게 깔끔했고, 손에는 작은 노트가 들려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얇게 올라갔다. “세바스찬, 오늘은 촉각 훈련으로 시작하죠. 번호를 새기는 것은 기본적인 소속감을 심어주는 데 효과적이에요.”

빅토르 폰 스트레이는 금속 테이블 위에 올려진 전기 충격 막대를 점검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단순한 인두질인가? 나는 좀 더 생리적인 데이터를 원해. 근육 반응과 신경 전도 속도를 기록해야 해. 어떻게 자극을 줘야 이 육축이 가장 효율적으로 반응하는지 알아내야지.”

레인 블레이크는 구석의 가죽 안락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와인잔이 들려 있었고, 우아한 태도는 마치 오페라를 감상하는 것처럼 여유로웠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그럼, 시작하지.”

세바스찬이 돌아섰다. 그의 손에 들린 인두기의 끝이 붉게 달아올라 희미한 빛을 뿜었다. 뜨거운 공기가 성월의 허리 주변 피부를 간질이며 닭살을 돋게 했다. 그녀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지만, 사슬이 그녀를 꼼짝 못 하게 붙들었다. 세바스찬의 다른 손이 그녀의 찢어진 블라우스 자락을 걷어 올려 허리 아래쪽을 드러냈다. 차가운 손가락이 척추를 따라 살짝 눌렀다.

“움직이면 번호가 지저분해질 테니, 얌전히 있어.”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마치 의료 시술을 설명하는 어조였다.

성월의 이가 악물렸다. 그녀는 말하려 했지만 목구멍에서 갈라진 숨소리만 새어 나왔다. 그녀의 의식은 이미 여러 겹으로 부서져 있었지만, 어떤 깊은 곳의 불씨가 그녀의 눈에 반짝였다. 증오인지, 아니면 리나의 얼굴을 떠올리며 붙잡은 마지막 광기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인두기가 닿았다.

쇠가 살갗에 닿는 순간,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기 타는 냄새가 퍼졌다. 고통은 즉각적이고 무자비했다. 그것은 단순한 화상이 아니었다—쇠가 피부를 파고들어 진피를 지지고, 신경 말단을 문자 그대로 불태우며 등을 타고 척수를 따라 두개골까지 번지는 벼락 같은 충격을 보냈다.

성월의 입이 벌어졌다. 그녀의 몸이 사슬에 매달린 채 격렬하게 뒤틀렸고, 허리는 인두기에서 떨어지려 했지만 세바스찬의 손이 그녀의 골반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녀의 성대가 찢어져 나가는 듯한 비명을 뿜어냈다—그것은 인간의 목소리라기보다 짐승의 절규에 가까웠다. 목젖이 떨리고, 침이 입술 밖으로 튀었으며, 그녀의 온몸이 생존 본능으로 폭발했다.

“아… 아아아아악—!”

그 비명은 돌벽에 부딪혀 기괴한 울림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손톱이 허공을 긁었고, 쇠사슬이 그녀의 사지를 잡아당기는 힘을 견디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녀의 눈은 충혈되어 불거졌고,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방 안에 웃음소리가 번졌다.

레인은 천천히 손뼉을 쳤다. 그의 와인잔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주 훌륭해, 세바스찬. 이 반응은 정말… 예술적이야.”

그의 다른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카메라 렌즈가 성월의 경련하는 신체를 정확히 포착하고 있었다. 그의 미소는 한층 깊어졌고, 화면 속에서 인두기가 천천히 움직이며 그녀의 허리에 반듯한 숫자를 완성해가는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07.” 그것이 세바스찬이 새긴 숫자였다. 피부가 새까맣게 그을린 선들로 이루어진 번호는, 이제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처로 남을 것이었다.

빅토르는 이미 전기 충격 막대를 켜고 있었다. 가느다란 전극 끝에서 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그가 이사벨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쌤, 기록 좀 해주시겠어요? 어떤 신경 다발이 가장 흥미로운 반응을 일으키는지 봐야 하니까.”

이사벨라는 노트를 펴고 만년필을 들었다. 그녀의 자세는 마치 세미나에서 발표를 듣는 학자처럼 침착했다. “물론, 빅토르. 자, 시작하세요. 우선 표층 통각 수용체부터.”

빅토르가 다가서자 성월의 숨이 가쁘게 몰아쉬어졌다. 허리의 통증이 계속해서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고, 그녀의 다리는 이미 제대로 힘을 주지 못해 경련을 일으켰다.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 눈으로 들어가 따끔거렸지만, 그녀는 눈을 깜빡일 힘조차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에 고정된 채,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전기 충격 막대가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살짝 스쳤다. 푸른 스파크가 피부 위로 튀었고, 즉시 근육들이 격렬하게 수축했다. 성월의 몸이 활처럼 휘어졌다가 사슬에 부딪혀 덜컹거렸다. 통증은 날카롭고 국소적이었지만, 신경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는 충격은 더욱 끔찍했다. 그녀의 입에서 다시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이번에는 목소리가 갈라져 젖은 듯한 소리로 변했다.

“하, 반응 속도 0.3초.” 빅토르가 태블릿을 한 손에 들고 데이터를 입력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전근 그룹 수축 강도는 높아. 흥미롭군.”

그가 전극을 움직여 이번에는 옆구리로 가져갔다. 갈비뼈 바로 아래, 신경이 밀집된 부위였다. 스파크가 더 길게 지속되었다. 성월의 신체가 더 이상 자발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순수한 반사로 뒤틀렸다. 그녀의 복부 근육이 물결치듯 경련했고, 그녀의 시선이 잠시 초점을 되찾았다가 다시 풀렸다. 그녀의 입술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말인지 기도인지 알 수 없는, 형체 없는 음절들이었다.

레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천천히 성월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구두 굽이 돌바닥에 울리는 소리가 규칙적이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 바로 앞에 멈춰 서서, 휴대폰을 들어 그녀의 눈을 확대했다. 줌 렌즈가 충혈된 흰자위, 확장된 동공, 그리고 흘러내린 눈물의 궤적을 선명하게 포착했다.

“눈빛이 아직 남아 있군.” 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감상적이었다. “하지만 곧 사라지겠지. 자, 성월. 아니, 이제 ‘07’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그의 손길은 단단했고,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에 감겼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며 연구했다. 성월의 혀끝에서 피비린내가 올라왔지만, 그녀는 그에게 침을 뱉을 기력조차 없었다. 그녀의 잔존 의식은 단지 검은 안개 속에 떠 있었고, 그 안개 속에서 리나의 얼굴이 왜곡되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세바스찬이 인두기를 제자리에 걸며 물었다. “다음 순서는?”

이사벨라가 노트를 덮으며 미소 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과도한 자극은 육체를 망가뜨려서 오히려 쓸모없게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그녀는 성월의 축 늘어진 몸을 훑어보며, 마치 가축의 품질을 평가하듯 고개를 기울였다. “상당히 튼튼하군요. 기본 내구성은 훌륭해요.”

빅토르가 전기 충격 막대를 끄며 어깨를 으쓱였다. “근육의 반응 패턴은 충분히 기록했어. 더 깊은 신경절 자극은 다음 세션에서 하지.”

레인이 손을 놓았다. 성월의 머리가 앞으로 푹 숙여졌다. 침이 실처럼 끊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숨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얕아졌고, 가슴의 움직임은 미미했다. 그녀의 의식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소리가 멀어지고, 빛이 바래고, 고통조차도 둔탁한 울림으로 변해갔다.

바로 그때, 레인의 목소리가 물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희미하게 그녀의 귀에 닿았다.

“이 장난감, 어쩌면 꽤 가치가 있을지도 몰라. 지하 투기장에 팔면 귀족들이 재미로 던져 둔 전리품보단 오래 버틸 테니까.”

그 말이 차갑고 느린 칼날처럼 그녀의 의식이 가라앉은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지하 투기장. 팔려 가는 것. 장난감. 그 말들은 추상적인 공포가 아니라, 이제 곧 닥칠 구체적인 미래의 그림을 그려냈다. 피와 함성, 구경꾼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끝없이 이어질 고통의 연속. 그녀는 더 이상 성월 에스트가 아니라—진짜로 하나의 물건, 하나의 번호, 하나의 육축이 되는 것이었다.

성월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의 안구 뒤쪽에서 무언가가 마지막으로 끓어올랐다. 증오인가, 두려움인가, 아니면 이미 부서져버린 자존심의 마지막 파편인가.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시야 가장자리에서 어둠이 좁혀들어왔고, 마침내 모든 것이 무(無)로 빠져들었다.

그녀가 완전히 축 늘어지자, 빅토르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경동맥을 짚었다. “그냥 실신했어. 바이탈은 안정적이야.”

이사벨라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내일은 제동 훈련을 시작하죠. 이 아이는 투기장 환경에서 제동이 걸리지 않으면 위험할 테니까.”

레인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마지막으로 성월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쇠사슬에 매달려 축 늘어진 그녀의 등에는 아직도 열기를 머금은 상처가 붉게 빛나고 있었고, 허리의 검게 그을린 번호는 조련실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무릎은 바닥에 닿아 있었고,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린 채였다.

“수고했어.” 레인이 짧게 말하고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세바스찬이 장갑을 벗으며 마지막으로 뒤돌아보았다. “밤새 여기 매달아 둘까요?”

이사벨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바닥에 내려놓고 목줄만 채워 두세요. 내일을 위해 체력을 아껴야 해요. 탈수만 되지 않게 조치하고.”

그녀의 말투는 마치 경주마를 관리하는 마부처럼 실용적이었다. 빅토르는 이미 태블릿에 내일의 실험 계획을 입력하고 있었고, 세바스찬은 쇠사슬을 풀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능숙하게 움직여 사슬을 하나씩 분리했다. 성월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고, 찬 돌바닥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방을 나서는 이사벨라가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차가운 전문가의 것이었다. “내일은 이 아이의 한계를 조금 더 시험해 보죠. 결국, 투기장에 내보낼 거라면 고통 내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려야 하니까.”

문이 닫혔다.

조련실 안에는 이제 적막만이 남았다. 어둠 속에서, 돌바닥에 쓰러진 성월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무의식적인 경련인지, 아니면 아직 꺼지지 않은 무언가의 반사인지 알 수 없는 작은 움직임이었다. 그녀의 허리 위로, 사슬에 긁힌 자국과 인두로 지져진 ‘07’이라는 번호가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천장의 어딘가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바닥에 부딪혔고, 그 소리는 텅 빈 공간 속으로 오래도록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