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국 수도에 위치한 제일테크 본사 회의실. 통유리창 너머로 초고층 빌딩 숲이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이고 있었지만, 그 경치를 즐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장채아가 탁자 위에 놓인 서류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깔끔하게 정돈된 단발머리, 날카로운 눈매, 재킷 라인을 따라 흐르는 단호한 분위기. 서른다섯 젊은 CEO 특유의 결단력이 그녀의 모든 동작에 배어 있었다.
"그러니까, B국에서 우리 기술에 투자하려면 제가 직접 가야 한다는 거죠?"
"예, 총재님." 진봉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단정한 슈트 차림의 남자 비서는 항상 그렇듯 한 걸음 물러나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결코 장채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B국 측은 최종 결정권자의 직접 방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리인 파견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장채아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탁, 탁. 규칙적인 소리가 침묵 속에 울렸다. 그녀의 회사는 지금 중대한 분수령에 서 있었다. 차세대 반도체 공정 기술을 둘러싼 글로벌 경쟁에서 뒤쳐질 경우, 수년간 쌓아올린 경쟁력이 단숨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유일한 돌파구는 B국이었다.
문제는 B국이었다.
"여성 혼자 출입이 불가능하다는 건 알겠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동행하는 남성이 반드시... 그런 관계여야 한다는 조건이 말이 됩니까?"
진봉은 태블릿을 들어 관련 법률 조항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B국 문화통합부 규정 제127조에 따르면, 외국인 여성은 '법적으로 인정된 남성 의존자' 신분으로만 비즈니스 비자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존 관계는 단순 고용이나 계약 관계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아내나, 약혼녀나..."
"또는 성노예입니다, 총재님."
회의실 공기가 순간적으로 차가워졌다. 장채아는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성노예. 그 단어가 그녀의 혀끝에서 맴돌았다. 21세기, 첨단 기술 협상을 논하는 이 자리에서.
B국은 예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극단적인 가부장제 사회, 여성의 권리가 법적으로 제한된 국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시장은 너무나 컸다. 그리고 최근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며 외국 기업들에 전례 없는 특혜를 제공하고 있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진봉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조용히 말했다. "법무팀에서 검토했습니다만, 합법적인 대안은 없습니다. B국 대사관 측에 비공식적으로 문의한 결과, 위장 결혼도 적발 시 강제 추방과 영구 입국 금지 조치가 따른다고 합니다."
그는 한 박자 쉬었다가 덧붙였다. "다만 성노예 등록은 B국에서 가장 안정적인 외국인 여성 체류 형태로 간주됩니다. 주인의 보호 아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오히려 폭넓은 활동이 허용된다고 합니다."
장채아는 뜨겁게 식은 커피 잔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A국에서 수많은 유리천장을 깨부쉈다. 남성 중심 벤처 업계에서 자신만의 제국을 건설했고, 그 과정에서 성차별적 발언을 하는 수많은 남자들과 맞서 싸웠다. 그런 그녀가 지금 성노예 신분으로 위장해야만 사업을 계속할 수 있다니.
하지만 그녀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자존심보다 회사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선택의 무게가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눌렀다.
"비서는 저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진봉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미세한 빛이 반짝였다.
"총재님께서 결정하실 사항입니다."
"의견을 묻고 있어요."
"사업적으로 보자면..." 진봉이 말을 골랐다. "이번 협상의 규모와 향후 시장 가치를 고려하면, 일시적인 불편을 감수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시적인 불편. 장채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성노예 신분으로 입국해 협상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오는 것.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일까.
"그리고 동행할 남성은 누구로 하는 게 좋겠습니까?"
진봉은 대답하기 전에 약간의 정적을 두었다. 그가 침묵하는 동안 장채아는 그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3년째 그녀의 곁에서 일한 충실한 비서. 믿을 만한 조력자였다. 언제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으며, 업무적으로 완벽했다.
"제가 수행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 같습니다." 진봉이 마침내 말했다. 그의 목소리 톤은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총재님께서 저를 신뢰하시는 만큼, 외부인을 개입시키는 것보다 위험 부담이 적습니다."
장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진봉을 선택하는 순간, 이 관계는 단순한 보스와 비서의 관계를 넘어서게 된다. 아무리 위장이라고 해도.
"알겠습니다." 장채아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결론을 내렸다. "준비하세요. 법적 문서와 서약서를 검토해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고 싶어요."
"명심하겠습니다, 총재님."
진봉이 고개 숙인 얼굴 아래에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장채아. 유능하고 차갑고,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던 완벽한 여성. 그녀의 명령 아래 움직이며,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순간을 상상해 왔는지 그녀는 전혀 몰랐다.
이제 B국에 가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거기서 그녀는 더 이상 총재가 아니라 그의 성노예다. 위장이라고 하지만, B국의 시스템과 문화는 그런 애매모호한 경계를 용납하지 않는다.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관계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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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전, 장채아의 자택 서재는 임시 훈련장으로 변모해 있었다.
"B국 입국 심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건 복종 자세입니다."
진봉은 이제 더 이상 한 발 물러서 있지 않았다. 그는 소파에 편안히 앉아 있었고, 장채아는 그의 앞에 서 있었다. 편한 티셔츠와 슬랙스를 입은 그녀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일단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B국에서 성노예는 주인이 앉아 있을 때 절대 서서 주인을 내려다보면 안 됩니다. 반드시 바닥에 무릎을 꿇거나 적어도 주인보다 낮은 위치에 있어야 해요."
장채아의 턱이 굳어졌다. 진봉은 그녀의 반응을 주의 깊게 관찰하며 계속했다.
"그게 기본입니다. 주인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건 불경으로 간주돼요. 공식 석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무릎을 꿇으면 되는 거죠?"
"그리고 말투도 바꾸셔야 합니다. B국 성노예는 주인에게 '주인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모든 문장 끝에 공손함을 나타내는 어미를 붙여야 합니다."
장채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것은 역할극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예, 알겠습니다."
"지금 해보시겠습니까?"
장채아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단단한 마룻바닥이 그녀의 무릎뼈를 눌렀다. 진봉을 올려다보자 그의 얼굴이 낯설게 보였다. 평소에는 무표정하거나 공손했는데, 지금은 뭔가 다른 눈빛이었다.
그녀는 말을 뱉었다. "주인님... 준비되었습니다."
"다시 해보세요. 목소리에 저항이 느껴집니다."
장채아는 이를 악물었다가 다시 풀었다. "주인님, 준비되었습니다."
진봉은 소파에 몸을 기대며 생각에 잠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성난 눈빛, 굴욕으로 빨개진 뺨, 그래도 허리를 곧게 세우고 있는 그녀의 모습.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 굴욕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조금 나아졌습니다. 이제 시선 처리입니다. 성노예는 주인의 허락 없이 주인과 눈을 마주치면 안 됩니다. 기본적으로 시선은 바닥이나 주인의 발을 향해야 합니다."
장채아가 재킷을 입고 경영진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을 그는 수도 없이 보아왔다. 수십 명의 임원들 앞에서 단호하게 결정을 내리고, 냉철한 논리로 투자자들을 설득하는 그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앞에 무릎 꿇은 이 여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장채아는 진봉이 지시하는 대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녀는 이 굴욕적인 훈련을 3일 안에 마스터해야 한다.
"수고하셨습니다, 총재님." 진봉이 갑자기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며 일어났다. "첫날이니 여기까지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내일은 외출 시 엘리베이터 탑승 절차와 공공장소에서의 대기 자세를 연습하겠습니다."
장채아는 일어나며 무릎의 통증을 느꼈다. "좋아요. 오늘 훈련 내용 요약해서 보고서로 작성해 두세요."
"예, 총재님."
진봉이 서재 문을 향해 걸어가다 잠시 멈췄다. 등을 돌린 채 조용히 말했다.
"한 가지 조언을 드려도 될까요."
"말하세요."
"B국에서는 저를 '진 비서'라고 부르시면 안 됩니다. 실수로라도 그런 호칭이 나오면 모든 위장이 들통 날 수 있습니다."
장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진봉은 문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잠시 뜸을 들였다. "실제 B국에 도착하면 지금처럼 연습이 아닙니다. 그곳 사람들이 볼 때 저는 진짜로 총재님의 주인이에요. 그 사실을 잊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문이 닫혔다.
장채아는 서재 바닥에 잠시 멈춰 서 있었다. 그녀의 삶에서 가장 심각한 모욕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결정했다. 이 모든 것은 단지 수단일 뿐이다. 협상이 성사되고 계약서에 서명하는 순간, 그녀는 이 굴욕적인 기억을 지워버리고 다시 A국의 총재로 돌아올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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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깊어갈 무렵, 진봉은 자신의 작은 아파트에서 B국 문화통합부 사이트를 탐색하고 있었다. 성노예 등록 절차, 훈육 가이드라인, 주인의 권리와 의무. 그는 모든 페이지를 정독하며 메모를 했다.
특히 한 조항에 그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B국 법률 제389조: B국 영토 내에 체류하는 성노예는 해당 여성의 출신국 법률이나 개인적 합의와 관계없이 B국 법률의 전적인 보호와 규제를 받는다. 성노예 계약은 B국 영토 진입과 동시에 발효되며, 계약 해지는 오직 주인의 의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진봉은 컴퓨터 화면의 푸른 빛을 받으며 미소 지었다. 그녀가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B국은 단순한 역할극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거기서 '위장'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법적으로, 현실적으로 모든 것이 진짜가 되는 공간.
그는 서랍에서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입사 첫날, 긴장한 얼굴로 장채아의 사무실 앞에 서 있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는 그녀를 만난 첫날부터 알고 있었다. 이 여자는 언젠가 반드시 무너질 것이라고. 그의 앞에서 무릎 꿇을 것이라고.
이제 그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가볍게 춤췄다. B국 입국 신청서의 성노예 등록란에 필요한 정보를 하나하나 입력하기 시작했다. 장채아의 신체 사이즈, 건강 상태, 주인과의 관계 증명 자료. 모든 칸을 채우면서 그의 가슴속에는 오랜 기다림이 응축된 흥분이 차올랐다.
"이제 며칠 안 남았군요, 총재님." 그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니, 이제 곧... 그냥 채아라고 불러야겠네요."
컴퓨터 화면 한쪽 구석에 B국 비자 발급 예상 일정이 떠올랐다. 3일 후. 그때부터 모든 것이 진짜가 된다. 그의 기다림이, 그리고 그녀의 굴욕이.
장채아의 서재에서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녀는 B국 협상 자료를 다시 검토하며 마음을 다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문서 위의 숫자들 사이로 낮에 맛본 무릎의 통증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진봉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훈련 계획에서 공공장소 시뮬레이션 비중을 더 늘려주세요. 실전 감각을 빨리 익혀야겠어요."
곧바로 답장이 왔다.
"알겠습니다, 총재님. 좋은 밤 되세요."
장채아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그 짧은 메시지 안에, 그녀가 감지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숨어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창밖 도시의 불빛이 서서히 꺼져가는 동안, 그와 그녀는 각자의 방식으로 앞으로의 여정을 준비했다. 한쪽은 저항의 결심으로, 다른 한쪽은 소유의 기대로.
그리고 B국이라는 낯선 땅은 그 모든 굴욕과 타락, 그리고 지배의 드라마가 현실로 펼쳐질 무대를 예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