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규의 속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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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었다. 운규산 정상의 달빛은 차갑게 빛나고, 산 아래 수많은 집들은 이미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의현은 자신의 침실에 홀로 서서, 창밖의 달그림자를 바라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녀는 천천히 옷장을 열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자수 옷가지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지만,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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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규산의 비밀

밤이 깊었다. 운규산 정상의 달빛은 차갑게 빛나고, 산 아래 수많은 집들은 이미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의현은 자신의 침실에 홀로 서서, 창밖의 달그림자를 바라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녀는 천천히 옷장을 열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자수 옷가지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지만, 손을 뻗어 한쪽 구석의 나무 판자를 살짝 누르자, 옷장 안쪽 벽이 조용히 열리며 좁고 어두운 통로가 드러났다.

의현은 숨을 고르며 그 통로로 들어갔다. 통로는 비좁고 구불구불했으며, 양쪽 벽은 차가운 석재로 되어 있어 발소리만이 좁은 공간에서 메아리쳤다. 몇 걸음 걷자 앞이 갑자기 탁 트였다. 후산(后山)의 밀실은 그녀가 몇 년 전에 몰래 조성한 곳으로, 두꺼운 벽과 문이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어떤 소리도 새어 나가지 못하게 했다.

방 안은 어둡고 적막했다. 의현은 촛불을 켜고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천천히 벽장으로 다가갔다. 벽장 문을 열자, 반들반들한 라텍스 옷들이 매끄러운 표면에 불빛을 반사하며 줄지어 걸려 있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그중 한 벌을 집어 들었다. 온몸을 감싸는 전신 타이즈로, 가느다란 검은색 라텍스가 촛불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의현은 옷을 벗고 그 라텍스 타이즈를 입기 시작했다. 먼저 발부터, 천천히 종아리, 허벅지로 올라가며, 매끄러운 재질이 피부에 닿으면 차가운 감촉이 전해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자국을 펴고, 라텍스가 몸에 완벽히 밀착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머리 부분을 뒤집어썼다. 얼굴을 감싸는 순간, 숨 쉬는 공기가 갑자기 얇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코와 입은 라텍스에 단단히 감싸여 콧구멍 두 개만이 겨우 숨 쉴 수 있는 통로였다.

그녀는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자신은 온몸이 검은색 라텍스로 감싸여 있었고, 몸매의 곡선이 뚜렷이 드러나 있었다. 얼굴은 라텍스에 감싸여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눈동자는 비정상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의현은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매끄러운 라텍스 감촉이 손끝에서 타고 올라와 전율 같은 쾌감을 전했다.

그녀는 벽장 구석으로 걸어가 쇠사슬을 꺼냈다. 두툼한 사슬은 차갑게 반짝였고, 끝에는 쇠고리가 달려 있었다. 의현은 먼저 한쪽 끝을 벽에 박힌 쇠고리에 연결한 다음, 다른 쪽 끝을 자신의 손목과 발목에 감았다. 가죽 끈으로 조이고, 무거운 사슬이 팔다리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져 벽에 고정된 쇠고리까지 연결되도록 했다.

숨이 가쁘다. 라텍스가 코와 입을 압박했고, 매 호흡마다 저항과 씨름해야 했다. 의현은 눈을 감고 온몸의 감각에 집중했다, 라텍스가 피부를 조이는 압박감, 사슬이 손목을 짓누르는 무게, 숨 쉴 때마다 가슴이 들썩이는 제한감. 이런 통제된 느낌이 그녀를 점점 더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몸을 비틀며 사슬이 쇠고리에 부딪혀 쇳소리를 내게 했다.

바로 그때, 뒤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문주께서… 이게 무슨 놀이를 하시는 겁니까?"

의현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라텍스와 사슬이 움직임을 제한해 겨우 목만 돌릴 수 있었다. 문가에 소근이 서 있었다. 시녀는 손에 등잔을 들고 있었고, 희미한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 표정은 놀라움과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나가." 의현의 목소리는 라텍스에 갇혀 약간 탁하고 답답하게 들렸다.

소근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와, 등잔을 옆 탁자 위에 놓았다. 불빛이 더 가까이 다가오자, 의현이 쇠사슬에 묶인 모습이 더욱 선명해졌다. 라텍스가 몸을 감싸고, 사슬이 팔다리를 얽어매며 거칠고 금기시되는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문주께서 저보고 나가라 하시는데, 지금 이 꼴을 하고 계시면서요?" 소근은 의현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내밀어 라텍스로 감싸인 그녀의 뺨을 살짝 만졌다. "이게 뭐 하는 짓이십니까? 한밤중에 혼자 이 구석에 와서, 몸을 이렇게 묶고…"

의현은 소근의 손길에 온몸이 떨렸다. 그녀는 부정하고 싶었지만, 몸은 정직하게 반응했다. 매끄러운 라텍스 아래에서 피부가 간지러운 듯 타올랐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의현은 최대한 냉랭하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상관없다고요?" 소근은 낮고 부드럽게 웃었다. 그 손은 의현의 뺨에서 목덜미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문주께서 저를 이렇게 대하시는데, 제가 상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의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소근의 손길은 마치 불길처럼 라텍스 표면을 타고 흘러, 닿는 곳마다 뜨거운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몸은 이미 이 지배에 굴복하고 있었다.

"문주께서 원하시는 게 이런 것입니까?" 소근이 의현의 귀에 바짝 다가서며 속삭였다. 그녀의 손은 이미 의현의 손목을 묶은 사슬 끝까지 내려가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묶여 지배당하는 것 말입니다."

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있었지만, 몸은 반역하듯 떨림을 멈추지 않았다. 소근은 손가락으로 사슬을 살며시 만지며, 무거운 쇠사슬이 손가락 사이에서 덜그럭거리게 했다.

"말씀해 주십시오, 문주. 당신이 원하는 게 이런 것입니까?" 소근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속에는 명령과도 같은 강제력이 숨어 있었다.

의현은 마지막 방어선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목소리를 낮춰 거의 들리지 않게 말했다. "…그래."

소근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갑자기 손에 힘을 주어 사슬을 팽팽하게 당겼다. 의현은 그 충격에 몸을 곧게 펴고,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좋아요." 소근이 일어서서 위에서 아래로 의현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오늘 밤부터, 제가 문주께 진정한 복종이 무엇인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방 구석에 있는 채찍을 집어 들었다. 가느다란 가죽 채찍이 촛불 아래에서 광택을 냈다. 소근이 천천히 돌아서며 손에 든 채찍을 가볍게 흔들자,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났다.

"문주, 무릎을 펴고 똑바로 서 계세요."

의현은 몸을 떨며 천천히 무릎을 펴고 벽을 등지고 섰다. 라텍스가 온몸을 감싸고,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져 그녀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소근은 그녀 앞에 서서 채찍으로 의현의 턱을 살짝 받쳐 올렸다.

"눈을 뜨세요. 나를 똑바로 보세요."

의현은 순종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소근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채찍을 휘둘렀다. 가죽이 라텍스에 닿으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의현은 숨을 삼키고 온몸이 긴장했다.

소근은 계속해서 채찍질했다. 한 번, 또 한 번, 가죽이 라텍스에 닿을 때마다 경쾌한 소리가 울렸고, 그 뒤에는 선명한 붉은 자국이 남았다. 의현은 아픔과 쾌락이 뒤섞인 감각에 몸을 떨었지만, 입에서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문주, 참으세요." 소근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의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자신이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갈망하던 것이었다. 지배당하고, 통제당하고, 굴욕감을 느끼는 것. 소근의 손에서, 그녀는 마침내 마음속 깊은 곳의 욕망을 찾아낸 듯했다.

밤은 점점 깊어갔고, 밀실 안에서는 채찍 소리와 숨소리만이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의현은 이미 완전히 굴복했고, 소근은 그녀의 지배자로서 점차 그녀의 신체와 영혼을 장악해 나갔다. 이 밤, 운규산 후산의 이 밀실 안에서, 두 여자 사이의 관계는 영원히 바뀌었다.

첫 번째 지배

의현은 방 안을 서성이며 시간을 끌었다. 창밖으로는 운규산의 달빛이 흐릿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결심한 듯 손을 들어 소근을 불렀다.

“소근아, 이리 와.”

소근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문주님, 무슨 분부이십니까?”

의현은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허리에 있는 띠를 풀게 했다. 옷자락이 흘러내리자, 매끈한 어깨가 드러났다. 소근의 손이 떨렸다.

“문주님… 이건…”

“해. 네가 할 수 있어.”

의현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명령이 담겨 있었다. 소근은 벽에 걸린 채찍을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그것을 집었지만, 손가락이 채찍을 감싸는 순간 망설임이 스쳤다.

“두려워하지 마.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의현이 침대에 엎드렸다. 등줄기가 고요한 호수처럼 드러나고, 소근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채찍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피부에 닿았다. 첫 번째 채찍은 가볍게 스쳤다.

“더 세게.”

의현의 명령에 소근이 이를 악물었다. 두 번째, 세 번째… 채찍이 내리칠 때마다 의현의 몸이 떨렸다. 고통은 날카로웠지만, 그 너머에서 어떤 감각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얼굴이 붉어지고, 숨결이 거칠어졌다. 채찍이 닿을 때마다 등에 붉은 줄이 생기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삼켰다.

“더… 더…”

소근의 팔이 힘을 얻었다. 채찍이 더 정확하게, 더 규칙적으로 떨어졌다. 의현의 몸은 점점 뜨거워졌고, 고통과 쾌락이 뒤섞여 온몸을 휘감았다. 마침내 그녀가 경련하며 절정에 이르렀다. 소근이 채찍을 떨어뜨렸다.

의현은 숨을 헐떡이며 몇 분을 그대로 있었다. 그녀가 일어나 옷을 정리하며, 표정은 다시 권위로 가득 찼다.

“소근아.”

“네, 문주님.”

의현이 소근의 어깨를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이것은 우리만의 비밀이다.”

소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앞으로 매주 수요일, 이 시간을 ‘게임의 날’로 정한다. 그날이 오면, 너는 나에게 명령한다. 기억해라.”

소근의 눈빛에 무언가가 스쳤다. 두려움보다는 결의였다. “알겠습니다, 문주님.”

의현이 살짝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우아하면서도 음험했다.

암소의 초대장

묵연이 운규산을 찾아온 것은 한낮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강동의 비단 상인이라 소개했다. 운규산에 정기적으로 납품하던 상인들이 최근 화재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며, 그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왔다고 했다. 의현은 접객청에서 그를 맞았다.

묵연은 중년의 신사처럼 보였다. 단정한 갈색 도포에 손은 깨끗했고, 손톱 밑에 때 하나 없었다. 그의 눈빛은 온화했지만, 가끔 스치듯 의현을 훑는 시선에는 날카로움이 숨어 있었다.

“문주께서 직접 나오실 줄 몰랐습니다. 영광입니다.”

묵연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목소리는 부드럽고 낮았다. 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했다.

“운규산의 물품은 모두 제가 직접 확인합니다. 번거로우시더라도 시료를 보여주십시오.”

묵연이 내미는 비단 조각들을 받아 살폈다. 촉감은 섬세했고, 색감은 깊었다. 의현은 고개를 들어 그를 다시 보았다.

“품질이 좋군요. 앞으로도 이 정도를 유지하실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저희 가문의 비단은 대대로...”

묵연의 설명이 계속되는 동안 의현은 무심히 그의 손목을 응시했다. 소매 끝으로 살짝 드러난 피부에 오래된 흉터가 보였다. 칼자국 같았다. 그것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의현은 재빨리 눈을 돌렸다.

그러나 묵연은 이미 눈치챈 듯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소매를 내렸다.

“문주께서는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아, 아닙니다. 그냥, 문주께서 많은 것을 보시는 분 같아서요.”

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짚을 수 없었다. 소근이 차를 따라 올리며 말을 거들었다.

“저희 문주님은 모든 것을 꼼꼼히 살피십니다. 상인이라면 당연히 아셔야 할 점이지요.”

묵연이 소근을 보았다. 그의 눈에 잠시 비웃음이 스쳤다. 소근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 시선을 받아냈다.

의현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묵연의 존재가 왠지 불편했다. 그는 너무 평범했고, 동시에 너무 평범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기다려지는 듯한 그 분위기.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계약에 필요한 서류는 다음에 다시 가져오겠습니다.”

묵연이 일어섰다. 의현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묵연이 돌아서는 순간, 그의 소매에서 작은 종이가 떨어졌다.

그것은 편지였다.

의현은 소근이 주우려는 손길을 막고, 직접 몸을 굽혀 집어 들었다. 편지 봉투에는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열자, 안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의현은 심장이 멈추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그녀는 주위를 살폈다. 소근이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문주님, 무슨 편지입니까?”

“...별거 아니다.”

의현은 편지를 소매 속에 감추고, 묵연이 사라진 문간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의현은 방에 혼자 앉아 편지를 꺼내들었다. 글자는 가늘고 균일했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어떤 정교한 손끝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뒷면에는 다른 문장이 또 적혀 있었다.

“자정, 서문 밖 느릅나무 아래. ‘암소’가 당신을 기다린다. 혼자 오라.”

의현은 편지를 움켜쥐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암소...’

그 이름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하지만 그 말 속에 담긴 어감은, 마치 무언가 깊고 어두운 곳으로 통하는 문을 여는 열쇠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그것을 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의현은 일어나 서랍 속에 감춰둔 작은 열쇠를 꺼냈다. 그것은 자신이 비밀리에 간직해 온 물건이었다. 누구도 모르는, 오직 자신만의 비밀.

그녀는 열쇠를 손에 쥐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소근아.”

“네, 문주님.”

문 밖에서 소근의 대답이 들렸다.

“내일은 좀 늦게 일어날 것이다. 아침 일찍 깨우지 마라.”

“...네?”

“시키는 대로 하라.”

소근은 잠시 침묵했다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문주님.”

의현은 다시 편지를 보았다. 그 짧은 문장들이 그녀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과연 그럴까.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 낯선 상인이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았다. 이미 그가 모든 것을 꿰뚫어 보았다는 것을.

그날 밤, 의현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자정이 가까워지자, 의현은 은밀히 방을 빠져나와 서문으로 향했다. 달빛이 흐릿한 길, 느릅나무 아래에 검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

그것은 묵연이었다.

“오셨군요, 문주님.”

그의 목소리는 밤공기처럼 차갑고 매끄러웠다.

“편지를 이해하셨습니까?”

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묵연에게 다가갔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묵연이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온화했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가 발걸음을 돌리자, 의현은 주저하지 않고 뒤를 따랐다. 그녀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가슴은 두근거렸다.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 순간, 그녀는 알았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암소에 첫발을 내딛다

밤이 깊어지자 서울 외곽의 좁은 골목길은 더욱 어둡고 음산해졌다. 의현은 소근이 알려준 주소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겉으로는 평범한 폐가처럼 보이는 건물 앞에 서서,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속에서는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여 요동쳤다.

문을 열자 안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화려한 조명과 고풍스러운 가구가 배치된 응접실이 나타났다. 그런데 순간, 의현의 몸이 굳어졌다.

"어서 오십시오, 운규산의 문주님."

묵연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울려 퍼졌다. 의현은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팔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기이한 감각이 그녀를 휘감았다. 주위의 모든 것이 정지된 세계 속에서, 의현의 의식만이 또렷하게 깨어 있었다.

"무... 무엇을 한 거야?"

의현의 목소리는 떨렸다. 하지만 묵연은 천천히 그녀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손가락이 의현의 뺨을 스치자, 그녀의 몸이 전율했다.

"걱정 마세요. 곧 풀어드리죠. 하지만 그전에... 제가 자랑하고 싶은 것들이 있어서요."

묵연이 손가락을 튕기자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듯 변화했다. 응접실이 사라지고, 넓은 지하 공간이 드러났다. 의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기에는 수십 명의 여자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는 하얀 얇은 옷을 입고 있었고, 눈동자는 텅 빈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각자의 손에는 동일한 도구들이 들려 있었고, 몸짓 하나하나가 정확하게 일치했다.

"이들은 모두 제가 정성껏 길들인 아이들이에요."

묵연이 한 여자의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마치 살아있는 인형처럼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주인님, 명령을 기다립니다."

의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솟아오르는 어떤 것이 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묵연의 눈은 이미 그것을 읽어낸 듯했다.

"재미있지 않나요? 완벽한 복종... 그것이 주는 자유를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묵연이 의현의 귀에 속삭였다. 그 목소리에 의현의 무릎이 풀렸다. 시간 정지가 풀리자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이건 미친 짓이야..."

의현의 목소리는 바싹 말라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떠날 줄 몰랐다. 여자들의 움직임, 그들의 텅 빈 시선, 그리고 그 안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평화. 모든 것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묵연이 다시 손을 내밀자, 의현은 자신도 모르게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일어서면서, 두려움과 동시에 기대감이 그녀를 가득 채웠다.

"자, 이제 진짜 시작이에요."

묵연의 웃음이 지하실에 메아리쳤다. 의현의 눈에는 그 웃음이 마치 저주처럼, 그리고 동시에 구원처럼 비쳤다. 그녀는 자신의 자존심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무너짐 속에서 오히려 전에 없던 자유를 맛보는 듯했다.

첫 번째 밤

의현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자신이 낯설었다.

짧은 치마, 하얀 블라우스, 빨간 나비 넥타이. JK 교복이라는 것이었다. 검은 스타킹이 허벅지를 조여왔고, 발에는 어울리지 않는 하이힐이 신겨져 있었다. 목에는 검은 가죽 목걸이가 채워져 있었고, 거기엔 작은 은색 종이 달려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가냘픈 소리가 났다.

“어때요?” 소근이 뒤에서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가웠지만, 희미한 즐거움이 섞여 있었다.

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속옷조차 입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욱 치욕스러웠다. 소근이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손님들은 운규산의 주인을 만나고 싶어 해요. 하지만 물론, 주인님께서 손님을 어떻게 접대하실지는 모르죠.”

“소근……” 의현의 목소리는 떨렸다. “제발……”

“조용히 해요.” 소근이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주인님께서 스스로 약속하신 거예요. 잊으셨나요? 당신은 순종하겠다고, 어떤屈辱도 견디겠다고 하셨잖아요.”

의현이 눈을 감았다. 맞다, 그녀가 한 말이었다. 묵연 앞에서 스스로 서약한 것이었다.

묵연은 방 안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오자, 묵연의 시선이 그녀의 몸을 스쳤다. 마치 물건을 평가하는 듯했다.

“꽤 괜찮군요.” 묵연이 가볍게 말했다. “하지만 표정이 좀 굳었어요. 좀 더 편안하게, 웃어 보세요.”

의현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더 자연스럽게.” 묵연이 차탁을 내려놓았다. “아니면 손님들이 불쾌해할 거예요.”

의현은 심호흡을 하고, 웃음을 더 정성스럽게 만들려고 애썼다. 목의 종이 가볍게 울렸다.

시간이 흘렀다. 아니, 멈춘 것 같았다.

첫 번째 손님이 도착했다. 중년의 남자였다. 눈에는 경멸과 욕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의현을 둘러보고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운규산의 주인이라더니, 생각보다 젊군요.”

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님이 자신의 치마를 걷어 올리는 것을 느꼈다. 손가락이 허벅지에 닿았다. 차가웠다.

“얼굴이 좀 창백한데요?” 손님이 웃었다. “떨고 있나? 겁먹은 거야?”

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을 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손님. 세 번째 손님. 그들은 돌아가며 그녀를 만졌다. 누군가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고, 누군가는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 의현은 웃음을 유지하려 했지만, 입가가 점점 굳어졌다.

“더 가까이.” 누군가가 명령했다. 의현은 그에게 다가갔다.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다른 손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숨을 참았다.

“말해 봐. 네가 뭔지.”

“……창녀요.” 의현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더 크게.”

“창녀요!” 그녀는 소리쳤다. 목이 터질 듯 아팠다.

누군가가 웃었다. 또 다른 누군가가 그녀의 뒤에서 그녀의 엉덩이를 때렸다. 그녀는 앞으로 비틀거렸다.

소근이 구석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듯.

네 번째 손님은 그녀의 발목을 잡고 침대 위로 끌어올렸다. 그녀가 누워 있는 동안, 여러 손이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검은 스타킹이 찢어졌고, 블라우스 단추가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울지 마.” 누군가가 말했다. “아직 안 끝났어.”

의현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억지로 참았다. 하지만 배가 아팠다. 무언가가 그녀의 하복부를 압박했다.

“일어나.” 손님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그때였다.

갑자기 하복부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따뜻한 액체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즉시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깨달았다.

방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모든 손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놀라움과 조롱이 섞여 있었다.

“아, 실례했네요.” 의현이 작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찮아요.” 묵연이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 감정도 없었다. “처음 있는 일이니까요.”

그녀가 손수건을 건넸다. 의현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그녀의 치마는 이미 젖어 있었다.

“다음에는 더 잘해 봐요.” 묵연이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손님들이 웃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박수까지 쳤다. 의현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녀의 귀에 웃음소리만이 메아리쳤다. 그리고 소근의 차가운 시선이 그녀의 뒤통수에 박혔다.

이중 정체성

의현은 새벽 닭이 울기도 전에 일어났다. 거울 앞에 앉아 단정하게 상투를 틀고, 옥관을 꽂았다. 소근이 물을 받아들고 들어왔다.

“문주님, 오늘 아침 일찍 각당의 제자들이 인사 드리러 올 예정입니다.”

“알겠다.”

의현은 소근이 건넨 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았다. 거울 속의 얼굴은 단아하고 고귀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바로 어젯밤, 그 얼굴이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발아래 구르며 자비를 구걸했으리라고는.

소근은 의현의 옷깃을 정리하며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깃 안쪽으로 붉은 자국이 살짝 비쳤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낮 동안 의현은 산문의 각종 사무를 처리했다. 제자들의 청원을 듣고, 장로들과 문파의 대소사를 논의했다. 그 웃음과 대화는 모두 우아하고 적절했다. 구름과 물이 흐르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앉아 있는 자세가 유난히 곧았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구부리면, 엉덩이에 난 상처가 옷감에 스치며 아픔을 전했기 때문이다. 그 고통은 달콤했다.

해가 서산에 기울자, 의현은 피곤하다며 일찍 쉬겠다고 했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조심스럽게 겉옷을 벗었다. 속옷이 살갗에 붙어, 떼어낼 때마다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따랐다. 그는 참지 못하고 가벼운 신음을 흘렸다.

“문주님.”

소근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렸다. 그녀는 은쟁반에 약과 붕대를 올려 들고 서 있었다.

“들어와라.”

소근이 들어와 약과 붕대를 탁자 위에 놓았다. 그녀는 직접 의현의 옷을 벗겼다. 그녀의 손길은 능숙했지만, 눈에는 걱정이 스쳤다.

“누가 이렇게 한 겁니까?”

의현은 잠시 침묵했다. 소근은 어릴 때부터 그를 따라온 사람이다.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다. 아니, 차라리 말하자. 말하지 않아도 그녀는 알고 있다.

“내가 스스로 한 것이다.”

소근의 손이 멈췄다.

“밤이 되면 나는 ‘노구’가 된다. 암소地下 매음굴에서 손님을 받는다. 오늘 이 상처는… 어떤 손님이 특히 심하게 다뤄서 생긴 것이다.”

소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솜에 약을 찍어, 조심스럽게 상처에 발랐다. 의현은 아파서 움찔했다.

“문주님, 왜 이러십니까?”

“모르겠다. 나도 어쩔 수 없다. 아마 깊은 곳에 다른 내가 있는 것 같다. 그녀는 떨쳐낼 수 없다. 그녀는… 복종당하고, 모욕당하는 것을 갈망한다.”

의현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이상하게도 눈에는 비정상적인 흥분이 반짝이고 있었다.

소근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는 약을 바르는 것을 멈추고, 의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문주님, 혼자 가게 놔둘 수 없습니다. 저를 데리고 가십시오.”

“너는… 알겠느냐? 그곳은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암울하다.”

“상관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문주님을 따르기로 다짐했습니다. 문주님께서 지옥에 가신다면, 저는 그곳을 주관합니다.”

소근의 눈빛은 단호했다. 의현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좋다, 오늘 밤 데리고 간다.”

어둠이 깃들자, 의현은 옷을 갈아입었다. 소박한 베옷 차림에 얼굴을 천으로 가렸다. 그는 소근의 손을 잡고 산문 뒤쪽의 비밀 통로로 향했다. 지하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길고 좁은 통로였다. 양쪽 벽에는 희미한 등불만이 걸려 있었다.

통로 끝에 철문이 있었다. 의현이 특별한 리듬으로 세 번 두드리자, 문이 열렸다. 어둠 속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구, 오늘은 늦었구나.”

“묵연 주인님, 오늘은 새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우리 집 시녀입니다, 믿을 수 있습니다.”

묵연이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왔다. 검은 옷을 입고 얼굴이 반쯤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한 쌍의 눈은 밤올빼미처럼 날카로웠다. 그는 소곤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음, 눈에는 냉기가 있군. 좋다, 잘 배워라.”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의현은 소곤의 손을 잡고 좁은 복도를 지나갔다. 주변에서는 음란한 신음소리와 채찍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공기에는 피와 향이 섞인 냄새가 배어 있었다. 소곤은 얼굴색이 변하지 않았다. 도리어 호기심이 반짝였다.

방에 도착하자 의현은 옷을 벗었다. 지난밤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지만, 그는 무릎을 꿇고 기다렸다. 소곤이 옆에 서서 지켜보았다. 눈에는 측은함이 없었다. 오히려 이상한 흥분이 스쳤다.

곧 손님이 들어왔다. 거구의 사내였다. 의현을 보자 눈에 욕망이 스쳤다. 그는 앞으로 다가와 의현의 턱을 잡아 올렸다.

“오늘 이놈은 나한테 찍혔군.”

“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의현의 목소리는 낮고 겸손했다. 사내가 만족스러워하며 웃었다. 곧이어 방 안에는 매질 소리와 비명이 가득 찼다. 소곤은 여전히 곁에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 눈빛은 점점 깊어져 갔다.

밤이 깊어질 무렵, 손님이 떠날 때쯤 의현은 바닥에 쓰러져 거의 움직일 수 없었다. 소곤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를 일으켰다.

“문주님, 괜찮으십니까?”

의현은 숨을 헐떡이며 약한 미소를 지었다.

“심장이 뛰고 있다… 아주 선명하게.”

소곤은 그를 부축하며 통로를 나왔다. 되돌아오는 길에 침묵이 흘렀다. 문득 소곤이 말을 꺼냈다.

“문주님, 저도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의현은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곤의 눈에는 평소의 공손함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알 수 없는 어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무엇을 하고 싶은데?”

“주인 노릇을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의현은 몸을 떨었다. 떨림 속에는 공포와 기대가 섞여 있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가르쳐 주마.”

새벽녘, 운규산의 종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의현은 여전히 단정하게 차려입고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덜미에는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소근이 다가와 분침으로 그 자국을 살짝 가렸다. 거울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떤 은밀한 계약을 나누는 듯했다.

낮의 문주와 밤의 노구. 이중 신분은 여전히 평행하게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최면 노예화

묵연의 손가락이 의현의 관자놀이에 닿았다.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이 피부를 스치자 의현의 몸이 움찔 떨렸다.

“눈을 감아라.”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 음색에는 이상한 힘이 실려 있어, 의현은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주변의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암소(暗巢)의 은은한 등불, 소근의 숨소리, 벽 너머에서 새어 나오는 울음 섞인 신음—모든 것이 빠르게 사라져 갔다. 오직 묵연의 목소리만이 남았다. 마치 깊은 우물 속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메아리.

“네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을 느껴라. 손가락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모든 긴장이 풀린다. 마치 물속에 떠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라. 오직 내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

의현은 그 말대로 몸이 공중에 뜨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의식은 여전히 깨어 있었지만, 마치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는 듯했다. 왜 내가 이러는 거지? 왜 저항하지 않는 거지? 그러나 그 의문조차도 흐릿해져 갔다. 묵연의 목소리가 더 강력하게 파고들었다.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의현아. 네가 평생 갈망해 온 것은 무엇인가?”

입술이 저절로 열렸다. “복종… 모욕…”

“좋다. 이제부터 네가 쾌락을 느끼는 방법을 가르쳐 주마.”

묵연의 손가락이 의현의 이마를 스치더니, 천천히 뺨을 타고 내려와 턱을 감쌌다.

“복종은 고통이 아니다. 복종은 해방이다. 네가 무릎을 꿇을 때, 네가 머리를 숙일 때, 네가 남의 발아래 굴욕을 당할 때—그것이야말로 네가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순간이다.”

말이 끝날 무렵, 묵연의 손이 의현의 어깨를 밀었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부드러운 융단이 피부에 와닿았지만, 의현은 차가움을 느꼈다. 아니, 오히려 그 차가움이 그녀를 더욱 또렷이 깨우게 했다.

“눈을 떠라.”

명령이 떨어지자 의현이 눈을 떴다. 바로 앞에는 묵연의 장화가 있었다. 정교하게 수놓은 검은 가죽 장화, 발목 부분에는 은빛 실로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장화는 매끄럽게 광을 내며 등불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핥아라.”

의현의 몸이 멈췄다. 머릿속에서는 분명 경보가 울렸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나는 운규산의 문주다! 이런 추잡한 행동을 하다니—하지만 몸은 그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다. 혀가 입술을 적셨다. 그녀는 자신의 목을 숙여, 천천히 장화 끝에 혀끝을 대는 것을 지켜보았다.

가죽의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혀끝을 통해 뇌리로 전해졌다. 이어서 미약한 금속과 흙 냄새가 뒤섞인 맛이 입안에 퍼졌다. 의현의 위장이 수축했지만,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알 수 없는 흥분이 치밀어 올랐다.

아니야, 그만둬야 해—

그러나 혀는 저절로 움직였다. 장화의 앞코를 천천히 핥고, 발등을 따라 올라가며 가죽이 침으로 반짝이게 했다.

“좋다. 아주 잘하고 있다.”

묵연의 칭찬이 귓가에 울렸다. 그 목소리에는 만족감과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의현은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치욕감과 함께 이상한 쾌감이 배꼽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네 의지는 점점 약해지고 있다. 복종이 너의 본능이다. 저항할수록 더 괴롭고, 순종할수록 더 즐거워진다. 기억해라—네가 낮아질수록, 너는 더 자유로워진다.”

의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입은 계속 장화를 핥고 있었다. 의식은 분명 깨어 있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짓이 얼마나 추한지 알고 있었지만, 몸은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그녀의 몸이 쾌락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제 멈춰라.”

의현이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입술과 턱이 모두 침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묵연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연민도, 경멸도 없었다. 오직 자신을 실험하는 듯한 냉정한 호기심만이 담겨 있었다.

“네 몸이 이미 내게 복종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네 마음도 그럴 것이다.”

묵연이 말을 마치자, 몸을 돌려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굽이 바닥을 울리며, 단단하고 리듬감 있게 울렸다. 문고리가 열리기 직전, 그녀가 고개를 돌려 한마디 던졌다.

“소근. 데려가라. 오늘 훈련은 성공적이었다.”

그 말과 함께 묵연은 방 밖으로 사라졌다.

의현은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신이 떨리고, 호흡이 거칠게 일렁였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바닥에 닿은 얼굴은 불덩어리처럼 뜨거웠다.

“문주님.”

소근이 다가와 허리를 숙여 의현의 팔을 감쌌다.

“일어나세요.”

의현은 힘없이 소근에게 몸을 기대어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풀려 중심을 잡기 어려웠다. 소근이 그녀를 부축해 방 밖으로 나왔다. 복도의 어둠 속에서, 의현은 문득 자신의 입술에 묵연의 장화 가죽 향이 아직도 감돌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두렵게도—그리 달갑지 않았다.

수인(獸耳娘) 개조

묵연이 손을 내밀어 의현의 턱을 살며시 쳐들었다. 방 안에는 희미한 연기 향기가 감돌고 있었고, 의현의 눈에는 경계와 기대가 섞여 있었다.

"문주께서 정말 결정하셨습니까?" 묵연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웠다. "이게 한 번 지나면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의현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자신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알고 있었다. 운규산 위에서의 권위, 존경, 선망은 이미 그녀를 숨 막히게 만들었다.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벗겨내고, 자신이 지닌 이 신성한 허물을 찢어버리길 원했다.

"나는... 알고 있어요."

소근이 옆에서 조용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에는 희미한 빛이 스치고 있었다. 그녀는 문주가 손수 이 선택을 하기를 기다렸다.

묵연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책상 위의 비단 보자기를 열었다. 그 안에는 부드러운 털로 덮인 고양이 귀 한 쌍과 가느다란 고양이 꼬리가 놓여 있었다. 털은 검은색과 흰색이 섞여 있어 살아있는 것처럼 빛났다.

"이건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영혼과 연결된 것입니다. 한번 붙이면, 당신은 더 이상 예전의 당신이 아닙니다."

의현의 심장이 마치 북소리처럼 요란하게 뛰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그 귀를 살며시 만졌다. 촉감이 부드러웠고 약간 따뜻하기까지 했다.

"해 주세요."

묵연이 그녀를 안마대에 눕혔다. 차가운 옥석이 등에 닿아 의현이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묵연의 손가락이 그녀의 관자놀이를 스치자, 공간이 일순간 정지한 듯했다. 시간 흐름이 느려지고,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의현은 정수리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을 느꼈다.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머리 위로 스며들었고, 뼈와 살이 조금씩 재구성되는 고통이 엄습했다. 그녀는 꽉 깨물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낮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참아요." 묵연의 목소리는 마치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곧 끝나요."

고통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 의현의 귀 위로 부드러운 털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생생하고 예민한 촉감이었다. 방 안 공기의 움직임이 그녀의 귀 끝을 간질이며 한 줄기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그다음은 꼬리였다. 묵연의 손가락이 그녀의 척추를 따라 미끄러져 내려갔고, 요추 부위에서 멈췄다. 그곳에서 찌르는 듯한 고통이 퍼져 의현이 온몸을 움츠렸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자, 길고 가느다란 꼬리가 뼈 사이에서 자라나 살며시 흔들렸다.

"다 됐어요." 묵연이 물러서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의현은 천천히 일어나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 속의 그녀는 여전히 그 우아한 얼굴에 단정한 관모를 쓰고 있었지만, 정수리 위로 삐죽 올라온 두 개의 고양이 귀는 이상하리만치 어울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귀도 따라 움직였다. 꼬리는 더욱 통제 불가능해서, 긴장된 마음이 꼬리 끝까지 전해져 살며시 떨렸다.

"이건..." 의현이 손을 내밀어 꼬리를 만지려 했지만, 손끝이 닿자 그 자극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전신에 소름을 돋게 했다.

"예민하지?" 묵연이 다가와서 꼬리 뿌리를 살짝 만졌다. 의현이 "아" 하고 소리를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이제 이 꼬리가 네 약점이야. 누군가 만지면 너는 참지 못하고 몸을 드러내게 돼."

소근이 걸어와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문주, 닦으세요."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공손했지만, 눈빛에는 다른 빛이 스쳤다. 의현은 그걸 알아챘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튿날은 운규산에서 열리는 월례 회의였다. 의현은 평소처럼 장의(掌衣)를 입고 단정히 앉아 각 봉우리 장로들의 보고를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모든 것이 달랐다. 옷자락 아래에 숨긴 꼬리는 쉴 새 없이 꼬이고 있었고, 관모 아래의 고양이 귀는 방 안의 온갖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하고 있었다.

"문주께서 보시기에, 영약 재배에 관한 이 건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대장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의현은 정신을 가다듬고 무심한 척 대답했다: "각 봉우리에서 먼저 조사 보고서를 제출하고 논의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그녀가 말을 하는 동안, 창밖으로 갑자기 참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의현의 고양이 귀가 즉시 반응하여 살짝 떨리며 참새의 움직임을 쫓았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려 관모를 바로잡는 척했지만, 이미 가까이 앉아 있던 장로가 그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문주께서는 몸이 불편하십니까?" 장로가 의아하게 물었다.

"괜찮습니다, 그저 어젯밤 잠을 좀 설쳤을 뿐입니다." 의현이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긴장으로 인해 꼬리가 더욱 세게 흔들렸다. 옷자락이 가볍게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낀 그녀는 허벅지를 꽉 조여 꼬리가 움직이지 않도록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회의는 계속되었지만, 의현은 더 이상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의 고양이 귀는 방 안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장로들의 중얼거림, 촛불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심지어 자신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까지. 이 예민한 청력은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간신히 회의가 끝났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떠난 후에야 의현은 몸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녀는 소쿠리에 기대어 가쁘게 숨을 쉬었고, 꼬리는 엉덩이 뒤에서 풀려나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소근이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문주님, 긴장 푸세요. 아무도 못 봤어요."

의현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아까 그 장로의 이상한 시선을 분명히 보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그녀는 묵연에게 이미 몸을 맡겼고, 이 고양이 귀와 꼬리는 영원히 그녀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날 밤, 의현은 홀로 방에 앉아 조용히 꼬리를 쓰다듬었다. 예민한 촉감이 그녀를 자극할 때마다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그것이 굴욕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동시에 참을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그녀는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그리고 돌아갈 길이 없음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