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설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형광등의 하얀 빛이었다. 눈을 깜빡이자 천장이 흔들렸다. 아니다, 흔들린 건 자신의 시야였다.
“괜찮습니다. 지금은 안전합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사 같았다. 임설은 고개를 돌리려다 목덜미에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손을 들어보니 팔뚝 전체가 붕대로 감겨 있었다.
“임순경, 구조됐습니다. 지하 감옥에서 구출됐어요.”
구조. 그 말이 뇌리에 박혔다. 그래. 구조됐다. 석 달 만에 다시 본 하늘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슴 한편이 허전했다. 벽에 묶여 있던 손목이, 발목이, 더 이상 조여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낯설었다.
병실을 나올 때, 복도를 걸으며 처음으로 거울 속 자신을 봤다. 볼은 움푹 패였고, 눈 밑은 검게 멍들었다. 목에는 손자국이 선명했다. 그 손자국을 보자 갑자기 몸이 떨렸다. 두려움이 아니라, 기억이었다. 그 손이 목을 조를 때, 숨이 막히면서도 어딘가에서 기쁨이 올라오던 그 순간.
임설은 손가락으로 목을 감쌌다. 아직도 통증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통증이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집에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현관문을 열자 어두운 복관이 펼쳐졌다. 익숙한 냄새, 익숙한 공간. 하지만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는데, 소파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소걸이 고개를 들었다.
“엄마?”
소걸의 목소리가 떨렸다. 임설은 아들의 얼굴을 보자 가슴 한편이 저렸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감정이 스쳤다. 이 아이는 내 아들이다. 내가 키운 아이. 내가 보호해야 할 존재. 하지만 왜, 지금 이 순간, 아들의 눈동자 속에서 나를 묶었던 그 남자들의 눈빛이 떠오르는 걸까.
“걸아, 엄마 왔어.”
임설은 소걸에게 다가가려다 발을 멈췄다.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손으로 아들을 안아도 될까. 아니, 안아서는 안 된다. 이 손은 더러워졌다.
소걸이 먼저 다가왔다. 그가 임설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의 팔이 임설의 등을 감쌌다. 그 순간, 임설의 몸이 굳어졌다. 아들의 체온이 전해져 오는데, 그 온도가 오히려 자신의 몸속 깊은 곳에 숨겨진 무언가를 자극했다.
“엄마, 많이 아팠어?”
소걸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임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팠다. 하지만 그 아픔이 나를 깨웠다.
“괜찮아, 걸아. 엄마는 괜찮아.”
임설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스쳤다. 그 순간, 갑자기 손목이 조여오는 기억이 스쳤다. 밧줄이 피부를 파고들던 그 느낌. 임설은 깜짝 놀라 손을 뗐다.
“엄마?”
“아니야, 괜찮아. 엄마가 좀 쉴게.”
임설은 부엌으로 향했다. 물을 마시려고 컵을 들었는데, 손이 너무 떨려서 물을 따를 수가 없었다. 컵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싱크대 가장자리를 잡았다. 거기서 다시 떠오른 것은 그날의 기억이었다. 그 남자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던 순간. 무릎을 꿇리고, 목에 밧줄을 감던 순간. 그때 느꼈던 공포와 함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쾌락이 피어올랐다.
임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야, 그건 잘못된 거야. 나는 피해자야. 하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통증이 오히려 자신을 살아 있게 만든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완전히 굴복하는 순간의 안도감을.
밤이 깊었다. 소걸은 잠들었다. 임설은 혼자 욕실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옷을 벗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어깨와 가슴, 허벅지, 온몸에 멍과 상처가 남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그 상처들을 더듬었다. 아직도 아렸다. 하지만 그 아림이 가져오는 감각이 있었다.
임설은 손으로 가슴을 만졌다. 유방에는 치아 자국이 선명했다. 그 자국을 따라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러자 갑자기 몸이 뜨거워졌다. 무릎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찬 타일이 무릎을 식혀 줬지만, 오히려 그 차가움이 몸속 열기를 더 부추겼다.
“아….”
임설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욕실 타일 바닥에 엎드린 채, 그녀는 눈을 감았다. 지하 감옥의 어둠이 떠올랐다. 밧줄에 묶여 꼼짝할 수 없었던 순간. 그 남자들이 그녀를 밟고, 때리고, 무시했던 순간. 참을 수 없는 굴욕감. 하지만 그 굴욕감이 가져다준 것이 있었다. 바로 자신이 완전히 무력해질 때 느꼈던 자유였다.
임설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허벅지 안쪽에 난 상처를 더듬었다. 그 상처는 칼로 그어진 자국이었다. 그날, 그 남자가 칼을 들고 “네가 내 물건이라는 걸 잊지 마”라고 말했던 순간. 그 말에 임설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느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두려움? 아니었다. 그것은 안도였다. 자신이 누군가의 소유가 된다는 것에 대한 이상한 평화.
“나는… 너의 물건이야.”
임설이 속삭였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 몸이 더 뜨거워졌다.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스스로를 만지면서, 그녀는 기억 속에서 그날의 장면을 재현했다. 묶인 채로 당했던 모든 순간. 아픔과 쾌락이 하나가 되었던 그 순간. 정신은 거부했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더… 더 해줘…”
혼잣말이 욕실 벽에 울렸다. 그 소리를 듣자 임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나는 피해자야. 나는 이 기억을 두려워해야 해. 하지만 몸은 달랐다. 몸은 그 기억을 갈망하고 있었다.
임설은 욕실 바닥에 엎드려 숨을 헐떡였다.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그 눈물조차도 뜨거웠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신이 두려웠다. 이 은밀한 욕망이. 이 타락한 쾌락이. 하지만 더 두려운 것은, 이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임설은 일어나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이 상처를 때렸다. 아팠다. 하지만 그 아픔이 오히려 몸을 깨웠다. 임설은 샤워기 물줄기 아래 서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소걸. 내 아들.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 하지만 내가 그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나는 이미 더러워졌다. 나는 이미 병들었다. 하지만 그 병이 나를 살게 한다.
욕실 문을 열고 나오자, 복관 건너편에서 소걸의 방 불이 켜져 있었다. 임설은 맨발로 복관을 걸어 아들의 방 문 앞에 섰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이 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려다 멈췄다.
아니야. 아직은 안 돼. 아직은 기다려야 해.
임설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며, 그녀는 어둠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슬픔과 희열이 섞인 것이었다. 그녀는 손으로 목을 감쌌다. 거기에는 아직도 남아 있는 멍 자국이 있었다. 그 멍을 누르자, 통증과 함께 기억이 밀려왔다.
“더… 더 아프게 해줘.”
어둠 속에서 그녀의 속삭임이 작게 울렸다. 잠시 후, 임설은 눈을 감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시작될 모든 것을. 그리고 그 시작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