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약계는 사장실 유리창 너머로 흐릿해지는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책상 위에는 분기별 보고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숫자들은 모두 냉혹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매출은 세 분기 연속 하락했고, 직원 이직률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보고서의 모서리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되겠어.”
그녀는 내선 전화를 눌렀다.
“진자 과장님, 저 잠깐 좀 뵐까요?”
몇 분 후, 진자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임약계는 그녀에게 다가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았어요. 전 직원이 참여하는 해상 워크숍을 열려고 해요. 장소는 제가 알아볼 테니, 인사팀에서 일정과 프로그램을 준비해 주세요.”
진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런데 갑자기 워크숍이라면...”
“사람들이 좀 쉬면서 마음을 열고 소통할 기회가 필요해요. 바다에 나가면 다들 긴장을 풀겠죠.”
임약계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또 다른 계획이 떠오르고 있었다.
한편, 1층 영업부 사무실은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임진은 구석진 자리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데이터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야, 인턴! 이 서류 좀 복사해 줘.”
조강이 두꺼운 서류 묶음을 그의 책상 위에 툭 던졌다. 임진은 이를 악물고 일어나 복사기를 향해 걸어갔다. 조강이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요즘 인턴들은 다 이렇게 얌전한가? 참 재미없네.”
임진은 복사기 앞에서 서류를 정리하며 속으로 다짐했다. 곧,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내 실력을 보여 주겠다. 그때, 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어머니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였다.
“다음 주 워크숍, 나랑 같이 가.”
임진은 문자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또 그녀가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 걸까.
워크숍 당일, 회사 앞에 도착한 버스들을 바라보며 직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그런데 모두의 시선이 갑자기 한 방향으로 쏠렸다. 임약계가 연회색 정장 대신 진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짧은 가발을 쓰고, 등에 작은 배낭을 메고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평소보다 열 살은 어려 보였고, 마치 막 대학에 입학한 여학생처럼 보였다.
임진이 그녀를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거예요?”
“쉿.”
임약계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짱을 꼈다.
“오늘은 네 여동생이야. 이름은... 음... 임나래라고 해.”
배에 탑승하는 등록대 앞에서 직원들이 줄을 서서 명찰을 받고 있었다. 임진이 다가가 명찰을 받자, 직원이 그의 뒤에 선 임약계를 보며 물었다.
“이 아이는 누구죠?”
임진이 머뭇거리자, 임약계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저는 오빠 친구예요. 구경 왔어요.”
직원이 그녀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싱글벙글 웃으며 어린이용 손목밴드를 내밀었다.
“그럼 이거 착용하세요. 갑판에서는 안전 수칙 꼭 지키고요.”
임약계가 손목밴드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배 안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조용한 구석에 서서 휴대폰으로 사내 메일을 보냈다.
“긴급한 일이 생겨 워크숍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진자 과장님이 진행을 맡아 주시기 바랍니다. 모두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한편,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나 푸른 바다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갑판 위에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고, 임약계는 그들 사이에 끼어 웃고 떠들며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을 만끽했다.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우리 사장님 요즘 일이 너무 많은가? 워크숍도 갑자기 취소하고.”
조강의 목소리였다. 그는 몇몇 동료들과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며 불평을 쏟아내고 있었다.
“맞아, 그 나이에 그렇게 일만 하면 뭐 해? 아직도 시집도 안 갔잖아. 성격은 왜 그렇게 독한지...”
다른 직원이 끼어들었다.
“그러게 말이야. 저런 여자가 사장이라니, 우리 밑에 있는 사람들만 죽어나지.”
임약계의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아이들과 함께 블록을 쌓으며 놀고 있었지만, 귀는 그들의 말에 쫑긋 세워졌다.
그때, 진자가 갑판 반대편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임약계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 목덜미의 곡선, 어깨를 움직이는 방식, 그리고 걷는 걸음걸이... 모든 것이 사장님을 떠올리게 했다.
진자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의 눈에 띄지 않게 말이다. 만약 저 사람이 정말 사장님이라면, 이건 정말 흥미진진한 드라마가 될 거야. 그녀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바다 위로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배 전체가 이 층층이 쌓인 안개 속에서 점점 더 신비롭고 불가사의해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