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샤 공주는 성의 복도를 홀로 거닐며 발끝으로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밀었다. 햇살이 높은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와 먼지가 반짝였지만, 그 광채조차도 그녀의 권태를 깨우지 못했다. 궁정의 무도회, 신하들의 아첨, 매일 반복되는 다과회와 약혼 이야기—이 모든 것이 그녀의 영혼을 무디게 만들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수백 년 전 선조들이 싸운 전투 장면이었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그저 색 바랜 천 조각에 불과했다.
"또 이 지루한 하루가 시작됐군."
그녀의 중얼거림은 텅 빈 복도에 메아리쳤다. 아무도 듣지 않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발걸음은 성의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좁은 계단이 나타났고, 그녀는 호기심에 이끌려 아래로 내려갔다. 공기는 점점 차가워지고 습해졌으며, 벽에 걸린 횃불은 꺼져 가고 있었다. 지하실이었다.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앨리샤는 오히려 낯선 이 공간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곳에는 오래된 책상과 썩어가는 나무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눈에 띄게 낡은 양피지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앨리샤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표면에는 신비로운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아래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영혼 교환의 계약…… 서약자의 육체와 정체를 맞바꾼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무언가 오래된 마법 같은 이 계약서는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 그것이 진짜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장난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만약 이것이 진짜라면, 그녀는 이 지루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다른 누군가가 되어,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재미있는 것을 찾았군요, 공주님."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앨리샤는 놀라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마커스 백작이 우아하게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붉은 망토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고, 그의 입가에는 음흉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백작님, 여기서 무슨 일이십니까?"
앨리샤는 계약서를 등 뒤로 숨겼지만, 마커스는 이미 모든 것을 꿰뚫어 본 듯했다.
"저는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왔습니다. 공주님, 당신이 이 방에 발을 들일 때를."
그가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에는 똑같은 계약서가 한 장 더 있었다.
"게임을 제안합니다. 당신이 이 계약에 서명하면, 당신의 모든 것이 바뀔 것입니다. 지루함은 사라지고, 새로운 삶이 열릴 것입니다. 하지만…… 각오는 하고 계십니까?"
앨리샤는 그의 눈을 응시했다. 그 속에서 위험과 유혹이 춤추고 있었다. 그녀는 자존심 강한 공주였다. 호기심과 오만함이 그녀를 이끌었다.
"각오라고요? 저는 공주입니다. 어떤 게임이든 이길 수 있습니다."
그녀는 계약서를 펼쳤다. 마커스가 건네준 깃펜을 받아 들고, 주저함 없이 그녀의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앨리샤·모닝스타.
그 순간, 계약서는 눈부신 빛을 내뿜었다. 앨리샤의 몸이 떨렸다. 무언가 깊은 곳에서부터 빨려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소리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커스는 그저 지켜보며 미소 지었다.
"게임이 시작됐습니다, 공주님. 아니, 이제 더 이상 공주님이 아니시군요."
빛이 사라지고, 앨리샤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계약서는 사라져 있었고, 대신 손목에 이상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커스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이제 단순한 계약자입니다. 곧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앨리샤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더 이상 고귀한 공주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려움에 떨리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이 계약이 그녀의 타락의 시작임을. 그리고 그녀의 자존심은 이미 첫 발걸음에 무너지고 있었다.
지하실의 어둠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멀리서 마커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웃음은 성 전체를 감싸는 저주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