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공주의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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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성의 높은 첨탑을 비추며 유리창을 통해 황금빛으로 물든 긴 복도를 물들였다. 앨리시아는 대리석 기둥이 늘어선 대전의 중앙에 서 있었다. 그녀의 드레스는 은실로 수놓은 자수정 빛 비단으로, 움직일 때마다 반짝이며 무거운 운율을 그렸다. 목에는 어머니가 남긴 진주 목걸이가 감겨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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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공주

햇살이 성의 높은 첨탑을 비추며 유리창을 통해 황금빛으로 물든 긴 복도를 물들였다. 앨리시아는 대리석 기둥이 늘어선 대전의 중앙에 서 있었다. 그녀의 드레스는 은실로 수놓은 자수정 빛 비단으로, 움직일 때마다 반짝이며 무거운 운율을 그렸다. 목에는 어머니가 남긴 진주 목걸이가 감겨 있었고, 그 광택은 그녀의 순결하고 고귀한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신하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고 절했다. 그들의 머리는 숙여져 있었지만, 앨리시아는 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존경이었고, 혹은 경외였다. 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열었다.

"일어나십시오. 오늘도 변함없이 성을 위해 힘써 주십시오."

목소리는 맑고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공주로서의 위엄이 담겨 있었다. 신하들이 일어나 물러나자, 그녀의 시녀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공주님, 오늘 오후 일정은 비어 있습니다. 정원 yielded 산책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앨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긴 치마자락을 정리했다. 그녀는 발코니로 걸어 나가 성 아래의 광장을 바라보았다. 노점상들이 늘어선 거리, 사람들의 왁자한 웃음소리,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초라한 천막들. 그 광경은 그녀의 가슴을 저리게 했다.

"저 아래 무슨 일이 있지?"

시녀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오늘 노예 시장이 열리는 날입니다, 공주님. 길가에서 가난한 이들이 팔려 나가고 있습니다."

앨리시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준비해라. 내가 직접 가보겠다."

시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숙였다. 마차가 준비되고 호위병들이 뒤따랐다. 앨리시아는 마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공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그 의무가 무엇인지, 그녀는 종종 혼란스러웠다.

마차가 노예 시장에 도착하자, 공기의 냄새가 달라졌다. 흙과 땀, 그리고 절망이 섞인 냄새였다. 앨리시아는 시녀의 손을 잡고 내렸다.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길을 비켰다. 그들의 시선에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천막 사이를 걸으며 노예들을 살폈다. 대부분은 초췌한 얼굴로 바닥에 앉아 있었고, 어떤 이는 사슬에 묶여 있었다. 그때, 그녀의 눈에 한 여자가 들어왔다. 갈색 머리칼이 헝클어지고, 누런 천으로 된 옷을 입고 땅에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그 여자가 고개를 들었을 때, 앨리시아는 그 눈동자 속에서 이상한 빛을 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날카로운 빛.

"저 여자는 누구지?"

상인이 다가와 아첨하며 말했다.

"공주님, 이 아이는 리나라고 합니다. 원래는 귀족 집안에서 일했지만 주인이 죽은 후 노예로 팔렸습니다. 아직 젊고 힘도 좋습니다."

앨리시아는 리나에게 다가가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리나는 고개를 숙인 채 목소리를 낮추었다.

"리나라고 합니다, 공주님."

그 목소리에는 떨림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 평온했다. 앨리시아는 그 차가운 평온함에 끌렸다.

"네가 내 전속 하녀가 되겠느냐? 성에서 일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리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앨리시아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서 앨리시아는 무언가 스치는 것을 보았다. 증오일까, 아니면 계략의 단서? 그러나 그 순간 리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공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앨리시아는 상인에게 금화를 건네고 리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나는 그 손을 잡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성으로 돌아오는 길, 리나는 마차 구석에 조용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앨리시아는 그녀에게 몇 마디를 건넸지만, 리나는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성문이 열리고 마차가 안뜰로 들어서자, 리나는 성의 높은 벽과 정원을 바라보며 미세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 속에 복수심이 번뜩였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앨리시아조차도.

밤이 깊었다. 리나는 하녀들의 방에 배정받았다. 그녀는 창문을 열고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살짝 긁으며 중얼거렸다.

"공주님, 당신은 아직 모르겠지요. 내가 언젠가 이 손으로……."

그녀는 웃었다. 그 웃음은 조용했지만,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은밀한 거래

리나는 아침 일찍부터 공주의 침실에 들어와 조용히 움직였다. 그녀의 손길은 마치 깃털처럼 가벼워 앨리시아가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했다. 옷을 정리하고, 세숫물을 준비하고, 아침 식탁을 차리는 모든 동작이 완벽하게 순종적이었다. 앨리시아는 거울 속에 비친 리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때는 천한 노예일 뿐이었지만, 요즘 들어 그녀의 존재가 점점 편안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머리를 조금 더 높이 올려 주세요.”

앨리시아의 명령에 리나는 고개를 숙여 답했다. “네, 공주님.”

빗이 부드럽게 머리칼을 스치고, 손끝이 정성스럽게 엮어 올라갔다. 리나의 손은 상처투성이였지만, 그 움직임은 마치 비단을 다루듯 우아했다. 앨리시아는 눈을 감고 그 감촉에 몸을 맡겼다. 그러나 그녀가 알 리 없었다. 리나의 눈빛 속에 숨겨진 어두운 불꽃을.

며칠이 지나면서 리나는 점점 더 공주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말없이 봉사했고, 앨리시아가 시키지 않은 일까지도 눈치껏 챙겼다. 어느 날 저녁, 앨리시아가 피로에 지쳐 침대에 쓰러졌을 때, 리나는 조용히 그녀의 이마에 수건을 얹어 주었다.

“고맙다, 리나.”

앨리시아의 목소리는 약했다. 그 말에 리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그 미소는 다정함보다는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공주님의 건강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그날 밤, 성의 복도는 어둠에 잠겼다. 리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레인의 서재로 향했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안에서는 희미한 촛불만이 깜빡이고 있었다.

“들어와.”

레인의 차가운 목소리가 어둠 속을 울렸다. 리나는 안으로 들어서며 무릎을 꿇었다. 레인은 책상 너머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손에 든 고서적을 펼쳤다.

“네가 약속한 대로 움직였군.”

“예, 주인님. 공주는 이미 저를 완전히 믿고 있습니다.”

리나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레인은 고서적의 페이지를 넘기며 빙그레 웃었다.

“고대의 영혼 교환 의식. 아주 간단해. 네 영혼이 그녀의 몸을 차지하고, 그녀의 영혼은 네 육신에 갇히게 된다. 그녀는 네가 되고, 너는 공주가 되는 거야.”

리나는 숨을 삼켰다.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표정은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 의식을 진행할 수 있습니까?”

“물론이지.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레인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그 속에는 무언가 어둡게 빛나는 액체가 들어 있었다.

“네가 공주의 몸을 얻는 대신, 그 몸은 내 소유가 된다. 너는 내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그녀의 육신에 갇힌 앨리시아는… 내가 원하는 대로 다룰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리나는 손톱이 살에 파고드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깊이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은 결정되어 있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림 없이 또렷했다. 레인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일 밤, 의식을 거행한다. 그녀를 내게 데려와라.”

리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복도로 나와 발걸음을 옮기며, 그녀의 입가에는 점점 더 짙어지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공주님, 곧 당신은 제 발아래 무릎 꿇게 될 거예요.”

그녀의 귓가에는 이미 앨리시아의 비명이 울려 퍼지는 듯했다.

영혼의 교환

지하실은 차갑고 눅눅했다. 촛불 몇 개가 희미하게 타오르며 벽에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앨리시아는 묶인 손목이 아려오는 고통을 애써 무시하며 레인을 노려보았다. 한때 고귀한 공주였던 그녀이지만, 지금은 초라한 옷차림에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다.

“무엇을 하려는 거죠?”

앨리시아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가능한 위엄을 유지하려 애썼다. 레인은 대답 대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곧 알게 될 거야.”

그의 옆에는 리나가 서 있었다. 노예 리나는 고개를 숙인 채 순종적인 척했으나, 그 눈동자 속에는 형용할 수 없는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앨리시아는 그 시선에서 무언가 섬뜩한 것을 느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레인이 손을 휘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지고, 촛불이 일제히 흔들렸다. 앨리시아의 몸에서 열기가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이 엄습했다.

“무, 뭔 짓을...!”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울림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온몸이 마치 물거품처럼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지며 앨리시아는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앨리시아는 차가운 돌바닥의 감촉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몸이 무겁고, 관절이 쑤셨다. 손목을 묶고 있던 밧줄은 없어졌지만, 대신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이게... 무슨...”

앨리시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거칠고 상처투성이인 손이었다. 자신의 하얗고 매끈했던 손이 아니었다. 공포에 휩싸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울이 보였다. 낡고 금이 간 거울 속에는 낯익은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리나의 얼굴이었다.

“아아아아아!”

앨리시아의 비명이 지하실을 울렸다. 그 목소리조차 낯설었다. 허스키하고 거친, 리나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볼은 패이고, 피부는 거칠었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그때 지하실 문이 열리며 레인이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고개를 들어 당당하게 걷는 리나가 있었다. 아니, 리나의 모습을 한 앨리시아의 육체였다. 그 육체는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금발은 단정하게 빗어 넘겨져 있었다.

“레인 님! 이 미친 노예가 깨어났나 봐요.”

리나가 앨리시아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음성은 앨리시아 자신이 수년간 길들여 온 고귀한 억양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었다. 앨리시아는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이 괴물! 네가 내 몸을...!”

하지만 리나는 손쉽게 앨리시아를 밀쳐냈다. 약해진 육체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졌다.

“조용히 해, 더러운 계집애야.”

레인이 차갑게 말했다. 그는 앨리시아의 턱을 잡아 억지로 올려다보게 했다. “리나의 몸에 갇힌 공주님. 기분이 어때?”

“제발, 제 말을 믿어주세요! 그녀가 가짜예요! 저는 진짜 앨리시아 공주입니다!”

앨리시아는 울부짖었다. 하지만 레인은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공주? 하, 미친 노예가 헛소리를 하는군.”

리나는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정리하며 앨리시아를 내려다보았다. 그 입가에는 승리자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레인 님, 이 노예를 어떻게 할까요? 감금해야 할까요, 아니면 훈육을?”

레인이 씨익 웃었다. “훈육을 시키지. 하루빨리 그녀에게 제자리를 가르쳐야겠어.”

앨리시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아무도,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천한 노예의 몸에 갇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존재였다.

“제발... 제발 누군가 내 말을 들어줘...”

그녀의 중얼거림은 지하실의 차가운 공기 속으로 사라져 갔다. 레인은 하인을 불러 앨리시아를 끌고 가도록 명령했다. 리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삶을 시작하는군요, 공주님.”

그녀의 목소리에는 독이 섞여 있었다. 앨리시아는 발버둥 쳤지만, 육체는 힘없이 끌려나갈 뿐이었다. 지하실의 문이 닫히며 어둠이 그녀를 삼켰다. 그곳은 이제 그녀의 새로운 감옥이었다. 영혼은 바뀌었지만, 고통은 여전히 그녀의 것이었다.

신분의 역전

리나는 높다란 대리석 계단 위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천천히 허리에 닿았고,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전에는 단 한 번도 앉아본 적 없는 그 옥좌가 이제는 그녀의 것이었다. 시선 아래로 무릎 꿇은 신하들이 보였다. 그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얼마 전까지 공주였던 앨리시아였다.

“일어나라.”

리나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날카로운 기쁨이 스며 있었다. 앨리시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자존심이 남아 있었다. 그것이 리나를 더욱 즐겁게 했다.

“너는 더 이상 공주가 아니다. 오늘부터 너는 가장 낮은 여자 노예다. 내 명령이다.”

앨리시아의 입술이 떨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리나는 손가락 하나로 그녀를 막았다.

“침묵. 네 입은 주인의 허락 없이는 열 수 없다.”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레인이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그는 리나의 변신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앨리시아에게로 향했다.

“옷을 벗겨라. 그리고 저 삼베옷을 입혀라.”

리나의 명령이 떨어지자 두 명의 하녀가 앨리시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반항할 힘조차 없었다. 몸에서 비단이 벗겨지고, 거친 삼베가 피부를 스쳤다. 찢어진 부분이 군데군데 드러난 그 옷은 노예 중에서도 가장 낮은 자가 입는 것이었다.

“저리 끌고 가라. 하인 방에 넣어라. 돼지우리 옆에 있는 방이다.”

앨리시아가 끌려가며 마지막으로 본 것은 리나의 승리한 미소와 레인의 냉소적인 눈빛이었다.

하인 방은 좁고 어두웠다. 바닥에는 지푸라기가 깔려 있었고, 구석에서는 돼지와 개가 뒤엉켜 있었다. 앨리시아는 그들 사이에 던져졌다.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숨을 죽였다. 눈물이 흐르려 했지만, 참았다.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하지만 이내 문이 열렸다. 레인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가느다란 채찍이 들려 있었다.

“일어나.”

앨리시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레인이 그녀 앞에 서서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기어와.”

그 명령에 앨리시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고개를 저으려 하지만, 레인의 눈빛이 그녀의 의지를 꺾었다. 그녀는 무릎으로 바닥을 짚었다. 손바닥이 거친 돌에 닿았다.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기어 레인 앞에 도착했다.

“절해.”

앨리시아가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레인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말해 봐. 나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주인.”

앨리시아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말은 분명히 전해졌다. 레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채찍으로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좋아. 앞으로 네 삶은 그 한 마디로 시작된다. 잊지 마라.”

그는 뒤돌아 걸어 나갔다. 앨리시아는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지푸라기 냄새, 돼지의 꿀꿀거리는 소리, 개의 숨소리가 그녀를 감쌌다. 고귀했던 공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낮고 비천한 여자 노예뿐이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그것은 굴욕의 눈물이 아니라, 증오의 눈물이었다.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을 되갚을 것이라고, 그녀는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학교에서의 모욕

햇살이 유리창을 뚫고 교실 안으로 쏟아졌다. 리나는 교단 옆에 우아하게 서서 급우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그녀는 순백의 교복을 입고 있었고, 가슴에는 귀족 학원의 문장이 반짝이고 있었다. 모두가 그녀를 보며 숭배와 존경을 담은 눈빛을 보냈다.

“공주님, 오늘도 정말 아름다우세요.”

“어머, 그 노예는 또 왜 데리고 온 거야?”

리나가 입가를 살짝 올리며 고개를 돌려 교실 구석에 서 있는 앨리시아를 바라봤다. 앨리시아는 누더기 같은 하인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숙인 채 두 손을 앞에 포개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건 내 시종이야. 앞으로 우리 반에서 함께 공부할 거야.”

리나의 목소리는 달콤했지만 그 속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 있었다. 급우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앨리시아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한때 이곳의 최고 귀족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이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역사에 대해 설명했고, 리나는 공주로서의 지위를 이용해 자주 발언하며 모두의 찬사를 받았다. 반면 앨리시아는 책상 맨 끝에 앉아 아무도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한 학생이 그녀의 책을 밀쳐 바닥에 떨어뜨렸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앨리시아, 이리 와.”

리나가 손가락질하자 앨리시아는 어쩔 수 없이 걸어 나왔다. 그녀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교실 안의 시선은 모두 그녀를 향했다.

“네가 그렇게 더운 것 같아서 말이야. 옷을 벗어라.”

리나의 말은 마치 칼날처럼 찔렀다. 급우들은 술렁이며 속삭이기 시작했고, 어떤 이는 손을 입에 대고 킥킥 웃었다. 앨리시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리나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리나는 미소를 지으며 무시했다.

“빨리 해. 나는 네가 이렇게 느린 걸 좋아하지 않아.”

앨리시아의 손가락이 떨리며 교복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천천히. 천이 벗겨지면서 그녀의 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급우들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누군가는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와, 노예 주제에 몸은 꽤 예쁘네.”

“공주님, 이 노예 좀 빌려주세요.”

앨리시아의 눈물이 마침내 흘러내렸다. 그녀는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액체를 느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수치심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배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알 수 없는 뜨거움. 그녀는 자신의 몸이 반응하고 있음을 느꼈다. 젖어 가는 속옷, 떨리는 허벅지.

“아직 다 못 벗었잖아.”

리나가 다가와 앨리시아의 턱을 잡고 강제로 고개를 들게 했다. 그녀의 눈에는 앨리시아의 눈물과 부끄러움이 비쳤다. 리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게 바로 네가 있어야 할 자리야. 기억해.”

앨리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몸은 더 이상 그녀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무언가 무너지고 있었고, 그 속에서 이상한 쾌감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타락하고 있음을, 그러나 그 타락이 또 다른 어떤 욕망을 깨우고 있음을 느꼈다.

교실 안은 웃음과 조롱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앨리시아는 그 속에 서서, 눈물과 함께 최초의 굴복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육변기의 첫날밤

레인의 손가락이 앨리시아의 턱을 움켜쥐었다. 차가운 장갑 촉감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오늘부터 네가 있을 방이다."

레인이 무거운 철문을 열었다. 안쪽에서는 기름 냄새와 쇠 냄새가 섞인 역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앨리시아의 발이 저절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레인의 손이 그녀의 뒷목을 낚아채 밀어 넣었다.

밀실은 생각보다 널찍했다. 벽마다 쇠사슬과 가죽 끈이 걸려 있었고, 한가운데에는 사람의 몸을 고정시키는 철제 틀이 놓여 있었다. 틀 위에는 손목과 발목을 조이는 쇠고랑이 네 개 달려 있었다. 그 형태를 본 앨리시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이건... 설마..."

"똑똑하군. 네가 짐작하는 그대로다."

레인이 그녀의 드레스 어깨끈을 잡아 당겼다.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비단이 찢겨 나가면서 드러난 하얀 어깨가 차가운 공기에 떨렸다.

"싫어요! 제발... 전 공주예요! 당신들의 육변기가..."

"네가 전에 무엇이었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지금 네가 무엇인지만 기억해라."

레인의 손이 더 거칠게 움직였다. 드레스가 조각조각 찢겨 바닥에 흩어졌다. 속옷까지 벗겨지자 앨리시아는 본능적으로 팔로 가슴을 가렸다. 하지만 레인은 그 팔을 잡아 비틀었다.

"가리려 하지 마라. 이제 네 몸은 네 것이 아니다."

그녀를 철제 틀로 끌고 가는 동안 앨리시아는 발버둥을 쳤다. 발톱이 레인의 팔뚝을 할퀴었다. 하지만 레인은 아파하는 기색도 없이 그녀의 손목을 쇠고랑에 집어넣었다.

철컹.

차가운 쇠가 살을 파고들었다. 반대쪽 손목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이어서 발목까지 고정되자 앨리시아는 완전히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철제 틀에 사지를 펼친 채 매달린 꼴이었다.

"됐다. 이제 시작이다."

레인이 벽에 걸린 채찍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으로 채찍 끝을 스치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네가 할 일은 단순하다. 내가 원할 때 몸을 열고, 내가 명령할 때 소리를 내고, 내가 만족할 때까지 버티는 것이다."

앨리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에는 눈물이 맺혔지만 끝내 흘리지 않았다. 공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레인의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채찍 소리가 밀실에 울렸다. 앨리시아의 등에 붉은 자국이 생겼다. 그녀는 비명을 참으려 했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채찍이 연달아 떨어지자 결국 참지 못했다.

"아아악!"

"좋다. 그 소리다. 더 내봐라."

레인이 채찍을 내려놓고 그녀의 앞으로 왔다.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타고 내려가 목, 쇄골, 가슴을 스쳤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그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앨리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느껴지는 촉감만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었다. 따뜻한 살이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파고들었다.

"아니... 안 돼..."

하지만 그녀의 거절은 레인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몸이 밀착되었다.

처음에는 참으려고 했다. 하지만 육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통증이 전율로 바뀌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허리가 떨렸다.

"벌써 반응하느냐? 고귀한 공주님이라는 작자가."

레인의 조롱이 귀에 박혔다. 앨리시아는 자괴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하지만 그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입에서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정신은 거부했지만, 육체는 이미 항복하고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레인이 한 번 몸을 푼 뒤에도 새로운 남자들이 들어왔다. 누군가는 거칠게, 누군가는 느릿하게 그녀를 침범했다. 앨리시아는 더 이상 그들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철제 틀에 묶인 채 수없이 침범당했다. 저항하다 지쳐서 힘이 풀렸다. 그제야 쇠고랑이 피부를 파고들어 아팠다. 손목이 시뻘겋게 벗겨졌다.

"제발... 그만..."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아니, 듣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앨리시아는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고통이 너무 커서 정신이 마비되었다. 몸은 계속해서 반응했고, 그때마다 그녀는 스스로를 혐오했다.

"또 한 명이다. 잘 받아라."

레인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이번에는 누군지. 레인이 직접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인가. 앨리시아는 더 이상 분간할 수 없었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철제 틀이 덜컹거렸다. 그 소리가 밀실에 메아리쳤다. 누군가의 거친 숨결이 그녀의 귀에 닿았다.

"예쁘다. 타락한 표정이."

누군가가 말했다. 앨리시아는 그 말을 들으며 깨달았다.

그녀는 더 이상 공주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그저 물건이었다. 성적인 욕망을 해소하는 도구, 육변기였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눈물조차 누군가의 손가락으로 닦였다.

"울지 마라. 아직 더 많은 날이 남았다."

레인의 속삭임. 그리고 또다시 시작되는 움직임.

앨리시아의 정신이 조각조각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대신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모든 감각을 차단했다.

육체는 계속해서 침범당했지만, 정신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녀가 사랑하던 정원, 어머니의 미소, 시녀들의 속삭임. 그 모든 것이 멀어졌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고통과 굴욕뿐이었다. 그리고 그 굴욕 속에서도 피어나는 이상한 쾌감.

앨리시아는 그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은 이미 그 쾌감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음 침범을 기다리고 있었다.

타락의 시작이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목을 뒤로 젖혔다. 레인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하지만 내일도, 모레도, 계속된다. 명심해라. 너는 이제 나의 것이다."

앨리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대답할 힘도,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철제 틀에 매달린 채,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문신의 낙인

레인이 앨리시아의 팔목을 붙잡아 끌고 갔다. 성의 지하로 이어지는 좁은 돌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는 차가워지고 축축해졌다. 벽에 걸린 횃불이 희미하게 깜빡이며 그들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앨리시아가 발버둥 쳤지만 레인의 손아귀는 더욱 세어졌다.

“곧 알게 될 거야, 내 작은 공주님.”

리나가 뒤따라오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기대감이 스며 있었다.

고문실은 널찍했다. 천장에 매달린 쇠사슬들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고, 벽에는 갖가지 고문 도구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한쪽 벽에는 커다란 벽난로가 있어 장작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그 위에는 쇠막대가 놓여 달궈지고 있었다.

앨리시아의 눈이 공포로 커졌다. “안 돼... 제발...”

레인은 그녀의 몸부림을 무시하고 중앙에 있는 나무 틀 쪽으로 걸어갔다. 땅에 고정된 그 틀은 사람을 끈으로 묶어 고정시키는 인두대였다.

“리나, 도와라.”

리나가 다가와 앨리시아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차가운 손길이 앨리시아의 살갗에 닿자 소름이 돋았다.

“놔줘! 이건 미친 짓이야!”

앨리시아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리나와 레인은 그녀의 몸을 인두대에 밀어 넣었다. 레인이 가죽 끈을 당겨 그녀의 손목과 발목을 단단히 묶었다. 앨리시아는 나무 틀 위에 등을 대고 누운 채 팔다리가 펼쳐진 X자 모양이 되었다.

“제발...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줘...”

앨리시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레인은 그 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는 이제 내 것이다, 앨리시아. 그걸 증명할 시간이다.”

그는 벽난로 쪽으로 걸어가 달궈지는 쇠막대를 집었다. 쇠막대의 끝은 'S'자 모양으로 휘어져 있었다. 쇠막대가 붉게 달아올라 열기가 주변에 퍼져 나갔다.

“무슨 낙인을 찍을 생각이지?” 리나가 물었다.

“S. 노예(servant)의 첫 글자다. 그녀가 누구의 것인지 영원히 알게 하기 위함이다.”

레인이 쇠막대를 들어 올리며 앨리시아에게 다가갔다. 열기가 점점 가까워지자 앨리시아의 몸이 떨렸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아니, 눈을 떠라. 네가 겪는 고통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

레인의 차가운 명령에 앨리시아는 억지로 눈을 떴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달아오른 쇠막대의 붉은 빛이었다.

“제발... 제발... 내가 뭘 원하든 다 할게... 그만둬 줘...”

“지금은 너무 늦었어, 공주님.”

레인이 쇠막대를 그녀의 왼쪽 가슴 위에 갖다 댔다.

앨리시아의 비명이 고문실 전체를 울렸다. 뜨거운 쇠가 살을 지지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녀의 몸이 경련하듯 떨렸고, 가죽 끈이 살을 파고들었다. 타는 듯한 고통이 가슴에서 퍼져 나가 온몸을 감쌌다.

레인은 쇠막대를 몇 초간 그 자리에 눌렀다가 떼어 냈다. 'S'자 모양의 흉터가 앨리시아의 가슴에 선명하게 남았다. 가장자리는 검게 그을렸고 중앙은 붉게 부풀어 있었다.

“한 번 더 하면 완벽해지겠군.”

레인이 다시 벽난로로 걸어갔다. 앨리시아는 숨을 헐떡이며 눈물이 마르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 제발...”

“아직 끝나지 않았다.”

두 번째 쇠막대가 달궈졌다. 이번에는 더 오래 가열되었다. 레인이 다시 돌아와 그녀의 오른쪽 가슴에 쇠막대를 대었다.

앨리시아의 목청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그 고통조차 가슴의 불덩이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 그녀는 모든 저항을 포기했다. 몸이 힘없이 늘어지고 눈동자가 흐려졌다.

레인이 쇠막대를 거두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해. 이제 누가 너를 소유했는지 영원히 기억하겠지.”

그는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나는 차가운 눈빛으로 앨리시아를 응시했다.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공주가 이렇게 타락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녀에게는 무료한 일상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레인이 다가와 앨리시아의 턱을 잡아 올렸다.

“이제 너는 내 것이다. 몸에 새겨진 이 낙인이 증거다. 네가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흉터는 영원히 남아 너를 노예로 만든다.”

앨리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릴 뿐이었다. 가슴의 타는 듯한 고통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정신은 몽롱했다.

레인이 가죽 끈을 풀어 주었다. 앨리시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가슴을 움켜쥐고 몸을 떨었다. 상처가 옷에 닿을 때마다 날카로운 고통이 엄습했다.

리나가 다가와 앨리시아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강제로 고개를 들게 했다.

“일어나, 공주님.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앨리시아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리나의 손에 이끌려 간신히 일어섰다. 레인이 앞서 걸어가고, 리나가 그녀를 뒤따르게 했다.

고문실을 나와 다시 계단을 올라갈 때, 앨리시아는 발을 헛디뎌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리나가 그녀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조심해. 네 몸은 이제 너 혼자만의 것이 아니야.”

앨리시아는 괴로움이 섞인 신음을 흘렸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레인의 뒤를 따라 발을 옮길 뿐이었다.

그날 밤, 앨리시아는 작은 방에 갇혔다. 벽에는 거울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옷을 벗고 가슴에 새겨진 낙인을 바라보았다. 붉게 부어오른 'S'자가 그녀의 하얀 피부 위에 선명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마르지 않고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더 이상 고귀한 공주는 없었다. 거기에 있는 것은 낙인 찍힌 한 명의 노예일 뿐이었다.

앨리시아는 방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감싸 안았다. 그녀의 어깨가 떨렸고, 목에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이제... 나는... 무엇이지...”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창문 너머로 달빛만이 차갑게 내리비추고 있었다.

가슴 피어싱

차가운 석판 위에 앨리시아는 나체로 누워 있었다. 손목과 발목은 쇠사슬로 단단히 묶여 움직일 수 없었다. 레인의 손가락이 그녀의 젖가슴을 스치자 앨리시아는 몸을 움츠렸다. 그 손가락은 부드럽게 빙빙 돌다가 갑자기 젖꼭지를 집어 꼬집었다.

"아!"

앨리시아의 비명은 덧없었다. 레인은 옆에 놓인 은쟁반에서 길고 가느다란 바늘을 집어 들었다. 바늘 끝이 촛불에 비쳐 반짝였다.

"공주님, 이제 진정한 고귀함이 무엇인지 가르쳐 드리죠."

레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담긴 냉기가 앨리시아의 심장을 얼렸다. 바늘이 그녀의 젖꼭지에 닿았다. 차가운 금속이 피부를 파고드는 순간, 앨리시아는 온몸을 경직시켰다.

"제발... 제발 그만둬 주세요..."

간청도 소용없었다. 바늘이 살을 뚫고 들어왔다. 앨리시아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레인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두 번째 바늘을 집어 들었다. 반대편 젖꼭지도 같은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번째 바늘이 들어갈 때 앨리시아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늘이 캄캄해지고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지막으로 들린 것은 금속 고리가 살에 닿는 둔탁한 소리뿐이었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 앨리시아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두 젖꼭지에 금색 고리가 꽂혀 있었다. 고리는 상당히 무거워서 젖가슴이 축 처져 늘어질 듯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고리가 흔들리며 상처를 찢었다.

"아름답군요."

리나가 다가와 앨리시아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앨리시아가 움찔했다.

"이걸 빼 주세요. 제발..."

앨리시아의 목소리는 가냘프게 떨렸다. 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왜요? 아주아주 멋진데요. 공주님의 위엄이 느껴져요."

리나의 손이 앨리시아의 젖꼭지를 잡아당겼다. 금속 고리가 살을 잡아당기며 찢어질 듯한 고통을 안겼다. 앨리시아는 신음을 삼켰다.

"내일 연회가 있어요. 공주님께서 이 멋진 장식을 자랑하셔야죠. 손님들 모두 공주님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거예요."

앨리시아는 리나의 얼굴에서 순간 스치는 복수심을 보았다. 그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무슨... 무슨 말씀을..."

"제 말 들리시죠? 내일 연회에서 공주님은 이 예쁜 피어싱을 모두에게 보여 주셔야 해요. 옷은 당연히 이렇게..."

리나는 얇은 망사 천을 펼쳐 보였다. 속살이 다 비치는 그 천으로는 아무것도 가릴 수 없었다.

"안 돼요! 그렇게 할 순 없어요!"

앨리시아가 몸부림쳤다. 고리가 흔들리며 상처를 찢었다. 따뜻한 피가 가슴을 타고 흘러내렸다.

리나는 냉소를 지었다.

"공주님, 이제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아셔야죠. 당신은 오늘부터 이 성의 장식품입니다. 명령에 복종하세요."

레인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작은 채찍이 들려 있었다.

"공주님, 선택하세요. 연회에서 자랑스럽게 서실 건지, 아니면 제가 좀 더 가르쳐 드릴까요?"

앨리시아는 채찍을 보며 몸을 떨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알겠습니다...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레인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내일 모든 손님들이 공주님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기회를 가지겠네요."

리나는 다시 다가와 앨리시아의 젖꼭지를 손끝으로 비틀었다. 고리가 덜컹거렸다.

"내일이 기대되네요, 공주님. 모두가 당신의 음란한 모습에 넋을 잃을 거예요."

앨리시아는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려 했지만 쇠사슬이 그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저 눈을 질끈 감고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내일, 그녀는 모든 귀족들 앞에 서서 자신의 추한 수치를 드러내야 했다.

어둠이 내린 방 안에 앨리시아의 흐느낌만이 메아리쳤다. 그녀의 고귀함은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잔해 위에 리나와 레인의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