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었다. 대학 시절 자취방의 그 천장.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손을 들어 내 얼굴을 만져보니 주름살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거울을 보기 위해 벌떡 일어나 방 안을 살폈다. 거기엔 스무 살 초반의 내가 있었다.
전생의 기억이 선명했다. 검은 심연 속으로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하지만 이제 나는 다시 시작점에 서 있었다. 2020년, 가을. 모든 것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주식 시장, 가상화폐, IT 업계의 흐름. 모든 게 내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전생에 내가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첫 번째 움직임은 대학 내 창업 동아리였다. 나는 전생의 기술 트렌드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아직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분야를 정확히 짚어냈다. 인공지능 기반의 언어 처리 기술. 대기업들은 아직 이 분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지 않았고, 나는 그 틈새를 파고들었다.
한 달 만에 프로토타입을 완성했다. 투자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내 나이를 의심했지만, 내 비전과 데이터 분석 능력에 놀라워했다. 첫 번째 시드 투자는 천만 원이었다. 두 번째는 오천만. 그리고 세 번째 미팅에서 나는 일억 원을 유치했다.
회사 이름은 '블루오션 테크'였다. 전생에 내가 그 이름으로 실패했던 기억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 나는 대학 캠퍼스를 걷고 있었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나무들 사이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린샤오샤오. 그녀는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전생에 그녀를 처음 만난 그 자리.
심장이 아려왔다. 그녀의 웃음, 그 눈빛, 그리고 마지막에 내가 본 그 절망에 찬 얼굴.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번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샤오샤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때 그 눈동자. 아직 상처받지 않은, 청춘의 빛이 반짝이는 눈.
"아, 호 선배?"
그녀의 목소리도 아직 밝았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야. 바빴어?"
"네, 시험 준비 때문에... 그런데 선배, 소문 들었어요. 창업해서 대박 났다면서요?"
"아직 시작일 뿐이야."
나는 그녀 옆에 앉았다.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저녁 같이 할래? 예전에 가고 싶어 했던 그 레스토랑, 기억나?"
그녀의 눈이 커졌다.
"아, 그 이탈리안 레스토랑? 그런데 거기 예약이 엄청 힘들다고..."
"걱정 마. 내가 다 준비했어."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를 보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그녀를 지킬 거야.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저녁 식사는 완벽했다. 그녀는 내가 준비한 모든 것에 감탄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샤오샤오, 나랑 다시 시작할래?"
그녀가 내 얼굴을 올려다봤다. 달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쳤다.
"선배... 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 순간을."
우리는 그렇게 다시 시작했다.
시간이 흘렀다. 블루오션 테크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나는 전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장 흐름을 정확히 예측했고, 경쟁사들을 하나둘 제압해 나갔다. 1년 만에 회사 가치는 100억을 돌파했다. 기자들이 나를 '천재 사업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샤오샤오와의 관계도 순조로웠다. 그녀는 내가 회사 일로 바쁠 때도 항상 내 편이 되어 주었다. 우리는 주말마다 데이트를 했고, 그녀의 생일에는 깜짝 파티를 열어 주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내 삶의 활력소였다.
하지만 어둠은 항상 가장 밝은 순간에 다가오는 법이었다. 어느 날 저녁, 회사에서 늦게 퇴근한 나는 샤오샤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받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해 다시 걸었지만, 이번에는 연결이 끊겼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집으로 달려갔다. 문은 잠겨 있었고,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이웃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그녀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전생의 기억이 악몽처럼 나를 괴롭혔다. 샤오샤오, 수완얼, 샤위신. 그들이 하나둘 내 곁을 떠나던 그 순간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번에는 다를 거야.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샤오샤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어제 친구들이랑 놀다가 늦었어. 미안해."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나는 안도하면서도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블루오션 테크는 계속 성장했다. 2년 차에 우리는 글로벌 시장에 진출했고, 나는 '대한민국 최연소 억만장자'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하지만 그 성공은 새로운 위험을 불러왔다.
어느 비즈니스 미팅 자리에서 나는 한 미국인 사업가를 만났다. 잭 윌리엄스. 그의 눈빛은 뱀처럼 차가웠다. 그는 아시아 여성들을 고용해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들을 인간 이하로 대우하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자리에서 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윌리엄스 씨, 이런 방식으로 사업을 운영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호 씨, 당신은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군요."
그날 이후, 나는 그를 완전히 의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내게 어떤 일을 저지를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몇 주 후, 샤오샤오가 행방불명되었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 그녀를 찾으려 했지만, 그녀는 마치 공기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한 달 후, 나는 그녀를 다시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내가 알던 샤오샤오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에는 생기가 사라졌고, 몸에는 누군가가 새긴 듯한 문신이 있었다. 그녀는 내 곁에 와서 속삭였다.
"호, 나 이제 달라졌어. 잭이... 내가 진짜 누군지 알게 해줬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비꼬는 듯한 어조가 섞여 있었다. 나는 충격에 말을 잃었다.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는 나를 가둬 놓으려고만 했어. 하지만 잭은 내게 자유를 줬어. 이제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 거야."
그녀가 돌아서서 걸어갔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쫓아가려 했지만, 내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이 내 전생의 악몽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번에는 전보다 더 큰 규모로, 더 잔혹하게.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내 비서가 급히 다가왔다.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저희 시스템이 해킹당한 것 같습니다."
모니터를 확인하자, 모든 데이터가 암호화되어 있었다. 화면에는 한 줄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아시아의 개야,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주마. - J.W."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잭 윌리엄스. 나는 반드시 그를 끝장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이미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생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했었다. 그때는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이미 한 번 죽었고, 다시 살아났다. 그 경험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준비해. 우리는 싸울 거야."
내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는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진짜 어둠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날 밤, 나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컴퓨터 앞에 앉았다. 전생의 데이터를 분석하며, 잭의 움직임을 예측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교묘해졌다. 그는 이미 전 세계에 네트워크를 구축해 놓았고, 그 중심에는 아시아 여성들의 비참한 운명이 있었다.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한 파일을 열었다. 그 안에는 수완얼과 샤위신의 사진이 있었다. 그들은 아직 내 곁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잭이 이미 그들도 노리고 있다는 것을.
핸드폰이 울렸다. 수완얼이었다.
"호, 너 요즘 왜 이렇게 바빠? 나랑 데이트도 안 해주고."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너머에 숨겨진 위험을 느꼈다.
"미안, 회사 일이 좀 바빠서. 다음 주에 시간 될까?"
"다음 주? 너 항상 그렇게 말해 놓고선..."
"이번엔 진짜야. 약속할게."
전화를 끊고 나는 다시 컴퓨터에 집중했다. 내 삶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샤오샤오를 구해야 했다. 수완얼과 샤위신도 지켜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잭 윌리엄스를 반드시 멈춰야 했다.
밤이 깊어갈수록 내 결의는 더 단단해졌다.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반짝였다. 그 모든 빛이 꺼져도, 나는 꺼지지 않을 것이다.
전생의 악몽은 다시 시작되었지만, 이번에는 내가 주인공이다. 나는 반드시 이 게임에서 이길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잭 윌리엄스와의 전쟁을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