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대전의 불길이 사그라진 지도 어언 오백 년. 신들은 선계로 돌아갔고, 인간이 사는 땅과 신성한 영역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 잔혹했던 전쟁 속에서 많은 것이 사라졌다. 신의 위엄, 신의 권능, 그리고 그들이 한때 지키던 것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도 있었다.
마을 가장자리의 작은 서당. 대나무 숲이 우거진 곳에 위치한 이 서당은 동네 아이들로 늘 북적였다. 서당의 훈장은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키가 크고, 자줏빛 머리칼은 마치 폭포수처럼 허리까지 흘러내렸으며, 온화하면서도 신비로운 기운을 풍겼다. 그녀의 이름은 봉와였다.
"오늘은 효(孝)에 대해 배워보자."
봉와가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아이들을 조용히 시켰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었고, 눈빛은 깊은 연못처럼 맑았다. 아이들은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신이었지만, 지금은 인간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평범한 훈장일 뿐이었다.
그녀의 옆자리에는 언제나 빈 자리가 하나 있었다. 용와. 그녀의 오빠이자, 연인. 그는 마을의 경비를 맡아 정기적으로 대지를 순찰했다. 건장한 체구와 준수한 얼굴,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존경을 동시에 받았다.
"너희 훈장님, 정말 대단하시지? 예전에 대전에서..."
"닥쳐. 그런 얘기 하지 마."
용와는 술집 구석에서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고도 일부러 무시했다. 그는 신력을 버리고 인간 속에 녹아들기로 했다. 그들의 임무는 단절된 세계에서 인간을 지키고, 신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봉와에 대한 감정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오랜 세월. 오백 년은 인간에게는 영겁이지만, 신에게는 찰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찰나의 시간이 두 사람의 심성을 점차 인간에 가깝게 만들었다. 봉와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의 장난기 가득한 소녀는 어느새 성숙한 미녀로 자라났고, 자신도 모르게 용와에게 은근한 정을 품게 되었다.
"오빠, 오늘 순찰은 어땠어?"
봉와가 저녁 식탁에서 물었다. 그녀의 손은 나무 그릇을 살며시 쥐고 있었고, 눈빛은 평온했다.
"별일 없었어. 다만 북쪽 숲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어."
용와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그는 순찰 중에 어렴풋이 검은 기운을 감지했지만, 정확히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마치 무언가가 땅속에서 깨어나려는 듯한 느낌이었다.
"조심해, 오빠."
봉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용와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미소 지었다.
"걱정 마. 내가 너를 지킬 테니까."
그날 밤, 마을 근처의 땅속에서 투명한 운석 하나가 떨어졌다. 그것은 검은 기운이 감도는 신비로운 돌로, 땅에 닿자마자 남은 어둠의 힘이 주변 땅과 융합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수많은 보라색 촉수가 땅속에서 솟아올라 주위를 휘감았고, 그곳은 기괴한 마굴(魔窟)로 변해갔다.
봉와는 잠들기 전, 창문 너머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본래 신이었기에, 그것이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님을 직감했다.
"이건..."
그녀는 용와가 순찰을 나간 것을 알았다. 지금은 밤이고, 그는 마을의 경비를 위해 떠나 있었다. 혼자서라도 가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용와 오빠가 위험할 수도 있어."
봉와는 결심했다.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검은 망토를 걸쳤다. 그리고 작은 등불 하나만을 들고 마굴이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자줏빛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고, 눈빛은 결의에 차 있었다.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이 탐사가 그녀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의 사랑하는 용와와의 관계도 영원히 변해버릴 것이라는 것을.
발걸음 소리만이 고요한 밤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봉와는 조심스럽게 마굴 입구에 도착했다. 보라색 촉수가 벌겋게 빛나며 꿈틀거렸고, 그곳에서는 음산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기다려. 곧 갈게."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마굴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그녀의 귀에 무언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마치 오래전에 잊혀진 저주의 언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