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운문의 후산 검련장은 아침 안개가 자욱했다. 대나무 숲 사이로 새벽 이슬이 맺힌 풀잎들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육설기는 푸른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검을 휘둘렀다. 칼끝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맑고 청량한 검명이 울려 퍼졌다.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부터 시작된 혼자만의 수련이었다. 그녀는 동문 제자들이 게으름을 피우는 사이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검을 쥐었다. 청운문에서 가장 촉망받는 제자인 만큼 스스로에게 가하는 엄격함 또한 남달랐다.
“실례합니다.”
낯선 목소리가 안개 너머에서 들려왔다. 육설기는 검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대나무 숲 가장자리에 한 젊은 수행자가 서 있었다. 산수 특유의 거친 무명 도포를 입고 있었지만, 자태는 의외로 단아했다.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번져 있었고 눈빛은 지적이었다.
“누구십니까?”
육설기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청운문은 외부인 출입이 자유롭지 않다. 그녀의 경계하는 시선에 수행자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저는 진명이라고 합니다. 삼청산에서 수행하던 중 청운문의 검술 명성이 자자하다 듣고, 잠시 머물며 배움을 청하고자 왔습니다. 문주님께 허락을 받았습니다.”
진명은 품에서 허가 증표를 꺼내 보였다. 그것은 분명 청운문 문주의 인장이 찍힌 문서였다. 육설기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주께서 허락하셨다면 더 물을 것도 없었다.
“무슨 일로 이곳에?”
“사모님께서 청운문 제일의 검수인 육 씨께서 아침마다 이곳에서 수련하신다고 알려주셨습니다. 만약 가능하시다면, 제 검법을 가르쳐 주실 수 없을까 하여 찾아뵈었습니다.”
진명의 말투는 지극히 정중했다. 하지만 육설기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간간이 청운문을 찾아와 검술을 배우려는 자들을 보아왔다. 대부분이 겉치레뿐이거나, 다른 속셈이 있는 자들이었다.
“저는 타인을 가르칠 만한 경지가 아닙니다. 다른 사형님께 부탁드리십시오.”
돌아서려는 그녀의 뒤로 진명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제가 지금까지 익힌 검법은 대부분 강경한 기운에 치우쳐 있습니다. 그런데 청운문의 검술은 유려하면서도 부드러움 속에 강함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마치 육 씨의 검과 같습니다. 잠시라도 좋으니, 그 흐름만이라도 보여주실 수 없을까요?”
육설기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진명의 말은 그녀의 검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청운문 검법의 진수는 바로 유연함에 있었다. 그걸 단번에 알아본 자는 흔치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검법을 어디서 배웠습니까?”
“여기저기 떠돌며 여러 문파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산수의 몸이라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습니다.”
진명의 눈빛에는 약간의 쓸쓸함이 스쳐 지나갔다. 육설기는 잠시 그를 관찰했다. 낯선 자에게 검을 보여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진지했고, 말투에는 허세가 없었다.
“한 번만 보여드리겠습니다. 잘 보십시오.”
육설기가 검을 다시 쥐었다. 그녀의 몸이 낮게 중심을 잡고 칼끝을 앞으로 겨누었다. 이내 그녀의 팔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검을 휘둘렀다. 칼끝이 그리는 궤적은 마치 물결처럼 유연했다. 대나무 잎이 바람에 흩날리며 그 움직임을 따라 춤추듯 흘러내렸다.
진명은 숨을 죽여 지켜보았다. 그의 눈에는 감탄과 경외가 섞여 있었다. 몇 합이 지나자 육설기는 검을 거두었다.
“이것이 청운문 검법의 기본 흐름입니다. 이를 익히려면 최소 수년의 수련이 필요합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진명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육설기에게 다가가 예를 갖추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혼자 되새겨 보겠습니다. 내일 다시 와도 괜찮겠습니까?”
육설기는 망설였다. 하지만 그의 눈에서 가벼움을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진정으로 검을 사랑하는 자처럼 보였다.
“내일 아침, 이 시간에 오십시오. 그때 다시 보여드리겠습니다.”
진명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 대나무 숲 너머로 사라졌다. 육설기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무언가 걸리는 느낌이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짚을 수 없었다. 그저 약간의 불편함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날 이후, 진명은 매일 아침 육설기를 찾아왔다. 그는 언제나 정중했고 배움에 대한 열의가 가득했다. 육설기가 검을 보여주면, 그는 한 동작 한 동작을 놓치지 않고 따라 했다. 부족한 점이 있으면 자신의 생각을 겸손히 묻기도 했다.
며칠이 지나자 육설기는 조금씩 그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진명은 검술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이치가 담겨 있었다. 때로는 그가 던진 질문이 육설기 자신조차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검술의 심오한 경지를 건드리기도 했다.
“어제 가르쳐 주신 '유수식'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그런데 칼끝의 기운을 돌리는 지점에서 자꾸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혹시 손목의 각도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어느 날 아침, 진명이 검을 거두며 진지하게 물었다. 육설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동작은 단순히 손목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허리의 회전과 호흡이 함께 맞아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보여드리죠.”
육설기가 검을 휘둘렀다. 칼끝이 공기를 가르며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렸다. 진명은 그 움직임을 눈에 새기듯 응시했다. 그러는 동안 육설기는 자신도 모르게 진명의 호흡과 시선이 자신의 움직임과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두 사람의 기운이 잠시 겹쳐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 순간, 육설기의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눈앞이 아른거렸고, 귀에서 낮은 웅웅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치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속삭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설기 씨?”
진명의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불러들였다. 육설기는 정신을 차리고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
진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육설기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근래 계속된 수련으로 조금 피곤한 모양입니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명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했다. 육설기는 어딘가 모르게 그 목소리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낯선 자의 목소리가 이렇게 마음을 가라앉힌 적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육설기는 검을 거두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의 뒤통수가 묵직하게 무거웠다. 단지 피로 때문일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진명은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대나무 숲에 서 있었다. 그의 입가에 스며드는 미소는 온화함을 넘어선, 어딘가 음험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그는 오른손 검지를 들어 허공에 작은 문자를 그렸다. 영력의 흔적이 대나무 잎 사이로 스며들어 순간 스러졌다.
“생각보다 재빠르군. 그래도…… 씨앗은 이미 심었어.”
진명은 낮고 음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에 어둡게 번지는 빛이 스산한 아침 안개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도포 자락을 정리하며 대나무 숲을 빠져나갔다. 첫 번째 최면의 암시는 성공적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시간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