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때, 주변은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발밑에 닿는 감촉은 딱딱하고 차가운 돌바닥. 공기는 무겁고 뜨거웠다. 릉상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살폈다. 저 멀리 붉은빛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이내 타오르는 불길이 강처럼 흐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 강 위에는 수많은 영혼들이 울부짖으며 허우적대고 있었다.
"여긴… 지옥이군."
릉상은 자신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것을 들으며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한구석에서 알 수 없는 설렘이 피어올랐다. 이 끝없는 고통의 땅에서, 그녀는 자신의 진정한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곧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은 거대한 성문이었다. 검은 철문 위에는 수천 개의 해골이 박혀 있었고, 그 눈구멍에서 푸른 불꽃이 흘러나왔다. 문이 열리자 수많은 하급 악마들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의 손톱은 날카롭고, 이빨은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릉상은 움찔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들어 허공에 원을 그렸다. 순간, 그녀의 손끝에서 푸른 빛이 터져 나와 악마들을 모두 밀쳐냈다.
"누구나?"
낮고 거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릉상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거대한 검은 날개를 가진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눈은 붉게 타오르고, 피부는 잿빛이었다. 그는 야명이었다. 이 지옥 제18층의 원래 통치자.
"나는 릉상이다. 인간 세계에서 왔다."
릉상은 당당히 대답했다. 야명은 그녀를 훑어보며 비웃음을 터뜨렸다.
"인간 따위가 감히 이곳에 발을 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곳은 영원한 고통의 장소다. 너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붉은 번개가 하늘에서 내리꽂혔다. 릉상은 재빨리 몸을 피했지만, 번개는 그녀의 발밑을 스치며 돌바닥을 깨뜨렸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야명을 응시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하나의 계획이 떠올랐다.
"네가 이곳의 지배자라고? 웃기지 마라. 진정한 지배자는 두려움을 심는 자가 아니라, 두려움을 초월하는 자다."
릉상은 두 팔을 벌렸다. 그 순간, 그녀의 몸에서 눈부신 백광이 뿜어져 나왔다. 야명은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그 빛은 지옥의 어둠을 찢어버릴 듯 강렬했다. 그녀는 현대에서 익힌 정신 집중법과 강인한 의지를 이용해 지옥의 에너지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 에너지는 그녀의 손끝에서 푸른 실처럼 엉켜, 마침내 거대한 사슬로 변했다.
"무엇을 하는 짓이냐!"
야명이 포효하며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릉상은 이미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사슬을 휘둘러 야명의 목을 감았다. 사슬은 그의 피부에 닿자마자 타오르는 듯 뜨거워졌고, 그는 비명을 질렀다. 그는 힘을 주어 사슬을 끊으려 했지만, 그 힘은 오히려 그의 몸을 더욱 옥죄어 왔다.
"이건… 대체 뭐냐?"
"지옥의 규칙이다. 너는 이 곳에서 오래 살아왔지만, 진정한 규칙을 몰랐던 것뿐이다. 이 사슬은 네가 스스로 만들어낸 고통의 굴레다. 너는 그 고통에 너무 익숙해져서, 이제는 그것이 너를 지배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릉상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가 야명 앞에 섰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분노와 굴욕이 섞여 있었지만, 그 깊은 곳에는 어쩌면… 기대 같은 것이 스며 있었다. 그는 하필 왜 이런 때에 이런 생각이 드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이제 누가 지배자인지 말해 봐라."
릉상이 야명의 얼굴 위로 발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신발 바닥은 차가웠다. 그녀는 천천히 그의 뺨을 밟았다. 그의 피부 위로 돌이킬 수 없는 모욕의 무게가 내려앉았다. 야명은 숨을 헐떡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 몸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쾌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눈을 감았다.
"너는… 무얼 원하는 거냐?"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복종이다. 완전한 복종."
릉상이 그의 얼굴에서 발을 떼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마치 이 끝없는 어둠의 깊이를 꿰뚫는 듯했다.
"오늘부터 너는 내 노예다. 야명. 너의 몸과 마음, 그리고 이 지옥의 전부가 내 것이다."
그녀의 선언은 차갑고도 단호했다. 야명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가에는 알 수 없는 미소가 스쳤다. 그것은 분노도, 굴욕도 아닌, 어떤 기묘한 안도감이었다. 마침내 자신을 진정으로 길들일 자가 나타났다는, 그런 깨달음의 미소였다.
릉상은 뒤돌아 검은 성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뒤로 야명이 쇠사슬에 묶인 채 따라왔다.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지옥 제18층의 긴 밤은 끝나지 않았지만, 그 어둠 속에 새로운 여왕이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