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청요는 신황전의 가장 높은 층계에 서 있었다. 발아래로 펼쳐진 만계의 산하가 어렴풋이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두 팔을 벽에 기대고 이마를 차가운 옥석에 밀착시킨 채 오랜 시간 동안 그 자세를 유지했다. 시녀들은 감히 다가오지 못하고 멀찍이서 엎드려 숨소리조차 죽였다.
“물러나라.”
그녀의 목소리는 깊은 우물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처럼 텅 비어 있었다. 시녀들이 쥐 죽은 듯 사라지자, 홀에는 그녀 혼자 남았다.
천 년. 정확히 말하면 천삼백 년이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진정한 상대와 맞서 싸운 지.
그때는 아직 젊고 혈기 왕성했으며, 칼자루를 쥔 손이 떨릴 정도로 흥분했었다. 상대의 피가 얼굴에 튀었고, 그 따뜻함과 짠내가 그녀를 살아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손은 더 이상 칼을 들지 않았다. 단 한 번의 눈빛, 한 번의 손짓으로도 천하가 진동했다. 적들은 그녀의 그림자조차 보기도 전에 무릎을 꿇었다.
재미없어.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대전 중앙의 용좌를 바라보았다. 황금빛 보좌는 찬란하게 빛나지만 그녀의 눈에는 무덤처럼 싸늘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걸어가 앉았다. 등받이에 기대자 온몸의 뼈마디가 나른해지는 듯했다. 이 자리는 그녀가 가장 오래 머문 곳이지만, 동시에 가장 갇혀 있다고 느끼는 곳이기도 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주먹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게 무적이라는 거야?”
그녀는 낮고 쓴웃음을 지었다. 무적은 두려움이 아닌, 두려움이 사라진 공허함이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고,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는 상태. 그녀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그 모든 것이 그녀를 질리게 만들었다.
그날 밤, 그녀는 시녀도 호위도 데리지 않고 홀로 신황전을 나섰다. 공중을 날아 수천 리를 넘어 동영의 국경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신분을 숨기고 평범한 무사 차림을 했다. 오래된 검은색 두루마기에 얼굴을 반쯤 가린 삿갓을 썼다.
동영의 수도는 밤에도 여전히 번화했다. 붉은 등불과 푸른 술집이 늘어서 있고, 곳곳에서 술 취한 객들의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봉청요는 인파 속을 걸으며 어깨를 스치는 행인들을 느꼈다. 그녀와 부딪힌 사람들은 그녀의 기척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치 그녀가 유령인 것처럼.
그녀는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점점 어두워지고 인적도 드물어졌다. 발밑의 돌길에는 이끼가 끼어 있고, 벽에는 켜지지 않은 등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저만치를 바라보았다.
골목 끝에 간판 하나가 걸려 있었다.
간판은 낡고 삐뚤어져 있었으며, 그 위에는 가느다란 실크처럼 보이는 무언가와 함께 쇠사슬이 뒤엉킨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 아래에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패자의 관.’
봉청요의 눈동자가 살짝 움직였다.
패자. 이 두 글자는 그녀에게 너무나 생소했다. 그녀는 태어나서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왜 이 간판 앞에 서 있는 걸까? 그녀는 자신에게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그저 가슴 한복판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마치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짐승이 막 깨어나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문을 밀었다.
문은 삐걱거리며 열렸고, 안에서는 희미한 등불과 함께 달콤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그 향기는 마치 어떤 꽃과도 같았고, 또 어떤 약초와도 같았다. 그녀가 발을 들여놓자, 뒤에서 문이 저절로 닫혔다.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바깥 세상의 소리가 완전히 차단된 듯했다.
“어서 오십시오.”
여자의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부드럽고 느릿느릿하며, 마치 비단이 살갗을 스치는 듯했다. 봉청요는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한 여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는 짙은 자주색 장포를 입고 있었고, 맨발이었으며, 발목에는 가느다란 은사슬이 감겨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등불 아래서 우아하고 온화해 보였지만, 눈빛은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 깊었다.
“처음 오셨군요.”
여인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미소는 봉청요에게 어딘가 불편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자신이 이미 포위된 사냥감이 된 것처럼.
“이곳은 무엇을 하는 곳이오?”
봉청요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담했다.
“이곳은… 패자들이 오는 곳입니다.”
여인이 대답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옆에 있는 나무 선반을 가리켰다. 선반에는 여러 가지 물건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실크, 쇠사슬, 가죽 채찍, 그리고 봉청요가 본 적 없는 온갖 기이한 도구들.
“스스로 패자가 되고 싶은 분, 혹은… 패배의 맛을 보고 싶은 분.”
여인의 말에 봉청요의 심장이 갑자기 세게 뛰었다. 그건 두려움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대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를 살짝 올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흥, 재미있군.”
그녀가 낮게 말했다. 여인은 그녀의 반응을 보며 더욱 깊이 미소 지었다.
“이름은 어떻게 부르시나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그렇군요. 그럼… 편하게 부르실 이름을 하나 드리죠.”
여인이 다가와 봉청요의 귀에 속삭였다. 그녀의 입김이 귓가를 스치자, 봉청요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경계심이 아니라, 오랜만에 느끼는 낯선 감각이었다.
“오늘부터 당신은 ‘무명’이에요.”
여인이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뒤로 물러서서 손을 들어 안쪽의 휘장을 가리켰다.
“안으로 들어가시겠어요?”
봉청요는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등을 돌리고, 신황전으로 돌아가 다시 무적의 여제로 군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발은 이미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휘장을 지나자 더 좁은 방이 나타났다. 방 안에는 커다란 나무틀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흰색의 얇은 천이 펼쳐져 있었다. 천은 매끄럽고 광택이 났으며, 마치 어떤 신비로운 힘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이건…?”
“발실크예요.”
여인이 대답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 천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가장 섬세한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명주실로 만든 거죠. 여기에 발을 대면, 어떤 감각이 느껴질지 궁금하지 않나요?”
봉청요는 그 천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어떤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자신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이 천을 밟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