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린은 아침 일찍 연구실에 도착했다. 어젯밤 늦게까지 배양기를 지켜보느라 거의 잠을 자지 못한 탓에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커피 한 잔을 벌컥 들이켜고 배양기 앞에 앉았다.
“어젯밤에도 상태는 괜찮았는데...”
배양기 문을 열자 특유의 냄새가 났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본 순간, 장린의 손이 멈췄다.
“이게... 뭐지?”
배양 접시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어젯밤만 해도 분명히 살아 움직이던 모충이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바닥에 투명한 액체가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장린은 눈을 비비며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이상한데... 온도 조절도 잘 돼 있었고, 보관 상태도 문제없었는데.”
그는 손가락으로 접시 가장자리를 톡톡 건드렸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혹시 누군가 실수로 건드린 건가? 하지만 어젯밤에 마지막으로 확인한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장린은 한숨을 쉬며 접시를 들어 올렸다. 투명한 액체가 흔들리며 미광을 반사했다.
“보관이 잘못돼서 썩었나 보지. 하여간 이런 희귀한 표본은 항상 문제야.”
그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접시를 싱크대에 넣었다. 어차피 죽은 것에 미련을 둬봤자 소용없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그는 외투를 집어 들고 연구실을 나섰다.
한편, 장미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휴일이라 집에 있기로 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장린과의 결혼 기념일이 오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기억할지 의문이었다. 작년에도 까먹었고, 재작년에도 일 때문에 늦었다. 그래도 올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특별한 저녁을 준비하기로 했다.
“소걸아! 학교 갈 시간이야!”
그녀는 2층을 향해 소리쳤다. 곧이어 소걸이 계단을 내려왔다. 얼굴에는 잠이 덜 깬 표정이었지만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엄마, 나 어제 아빠 연구실에서 진짜 신기한 거 봤어!”
“뭘 봤는데?”
“작은 벌레 같은 거? 아빠가 현미경으로 보고 있었거든. 근데 아빠가 보여주려고 했는데 전화 받으러 나가서... 나 혼자 봤어. 그런데 그게 얼음 속에서 꿈틀거렸어!”
장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얼음? 아마 배양기의 온도가 낮아서 그렇게 보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가방을 챙겨주었다.
“얼른 아침 먹고 나가. 지각하면 혼난다.”
“알았어요. 근데 진짜 신기했어요. 소진이한테도 말해 줘야지!”
소걸은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고 빵을 입에 문 채로 집을 나섰다. 장미는 그 모습을 보며 살짝 웃었다. 창밖으로 햇살이 부드럽게 들어왔다. 오늘만큼은 행복하고 평화로운 하루가 되길 바랐다.
학교에 도착한 소걸은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소진을 붙잡았다.
“야! 소진아! 어제 진짜 짱 신기한 거 봤어.”
“뭔데? 또 뭘 봤어?”
“아빤 연구하는 과학자잖아. 근데 아빠 연구실에 이상한 벌레가 있었어. 얼음 속에 갇혀 있었는데도 움직였어!”
소진은 눈을 크게 떴다. “뭐? 얼음 속에서 움직이는 벌레? 거짓말!”
“진짜야! 내가 내 눈으로 직접 봤어. 길쭉하고 투명했어. 근데 꼬리를 흔들었어!”
소진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는 손가락을 턱에 대고 생각했다.
“그럼... 오늘 나도 보러 가도 돼?”
“응! 우리 집에 오면 돼. 엄마가 오늘 집에 계시니까 괜찮을 거야.”
“좋아! 그럼 방과 후에 바로 가자.”
두 아이는 신나서 수업 시간 내내 속삭였다. 선생님이 몇 번 주의를 줬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미 연구실의 신비한 생물에게 쏠려 있었다.
오후 3시, 장미는 학교 앞에서 소걸과 소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뛰어나오자 그녀는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소진이도 우리 집에 갈 거지?”
“네! 아줌마, 소걸이가 신기한 거 보여준다고 했어요.”
“그래? 뭔데?”
장미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의 표정이 너무 밝아서 물어봤다. 소걸이 신나서 대답했다.
“아빠 연구실에 있는 이상한 벌레!”
“아, 그거... 근데 그건 아빠 허락 없이 보면 안 돼. 아빠가 중요한 연구한다고 하셨잖아.”
“에이, 엄마. 그냥 잠깐만 보면 안 돼요? 소진이도 보고 싶대요.”
장미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아이들의 기대에 찬 눈빛을 보니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장린이 오늘 결혼 기념일을 기억할지도 의문이었다. 그에게도 화가 나 있었다.
“그래, 잠깐만 보고 나오는 거야. 그리고 절대 만지면 안 된다.”
“와! 신난다!”
아이들은 집으로 달려갔다. 장미는 뒤에서 천천히 걸으며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소걸이 아버지를 닮아 호기심이 많은 게 걱정되기도 했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집에 도착하자 소걸은 연구실 문을 열려고 했다. 잠겨 있었다.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 문이 잠겼어. 아빠가 열쇠를 가지고 갔나 봐.”
장미는 한숨을 쉬며 부엌으로 갔다. “됐다, 안 보면 되지. 나랑 같이 저녁 준비나 하자.”
소진도 실망한 표정이었지만, 장미가 내민 과자를 받아들며 금세 기분이 풀렸다. 그들은 거실에서 장난을 치며 놀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장미의 마음은 초조해졌다. 장린에게서 아직 연락이 없었다. 그녀는 전화기를 확인했다. 메시지도 없고 부재중도 없었다.
6시가 되자 장미는 결국 직접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린 후에야 장린이 받았다.
“여보, 오늘 몇 시에 올 거야? 저녁 준비 다 했는데.”
전화기 너머로 장린의 지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오늘 야근해야 해. 중요한 실험이 있어서.”
장미의 손이 떨렸다. 그녀는 억지로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무슨 날? 설마... 결혼 기념일?”
“그래, 맞아. 근데 너 또 까먹었지?”
장린은 잠시 침묵했다. 이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진짜 미안해. 오늘은 정말 중요한 실험 때문에... 내일로 미루면 안 될까?”
“오늘 아니면 의미가 없잖아.”
장미는 전화를 끊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아이들 앞에서 울 수는 없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거실로 돌아갔다.
“소걸아, 아빠 오늘 야근하신대. 우리끼리 저녁 먹자.”
“에이, 또야?”
소걸도 실망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이답게 곧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소진에게 속삭였다.
“야, 아빠 없으니까 연구실 문 열 수 있을지도 몰라. 엄마가 열쇠 숨겨 놓은 데 알지?”
소진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장미가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사이에 살금살금 2층으로 올라갔다.
소걸은 복도 끝에 있는 작은 찬장 뒤에 손을 넣었다. 거기에 비상용 열쇠가 숨겨져 있었다.
“찾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연구실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어둡고 쌀쌀했다. 아이들은 발끝으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현미경과 각종 실험 기구들이 놓여 있었다.
“어디 있지? 그 벌레?”
소걸은 아버지가 어젯밤에 보던 곳을 기억했다. 배양기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배양기 안은 비어 있었다.
“어? 없네?”
“뭐, 거짓말한 거 아니야?”
“아니야! 분명히 여기 있었어. 근데 왜 없지?”
소진은 실망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나가자. 별로 재미없어.”
그러나 그 순간, 소진의 발이 무언가에 걸렸다. 그는 균형을 잃고 넘어지면서 배양기 옆에 있는 작은 캐비닛을 열어젖혔다. 캐비닛 안에는 여러 개의 유리병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아이코!”
소진이 당황해서 유리병을 집으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병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안에서 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야! 뭐 하는 거야!”
소걸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 순간, 깨진 유리 조각 사이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두 아이는 숨을 죽였다. 투명한 액체 속에서 길쭉한 벌레 같은 것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저거... 살아 있어?”
소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모충은 액체를 뚫고 기어 나와 바닥을 향해 움직였다. 소걸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말한 게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왜 배양기가 아닌 캐비닛에 있었을까?
“소걸아, 이거 어떻게 해?”
“일단... 잡아야 해.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
소걸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모충은 재빨리 움직여 선반 아래로 숨었다. 두 아이는 서로 마주 보았다. 공포와 호기심이 섞인 표정이었다.
그때, 아래층에서 장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걸아! 소진아! 어디 있니? 저녁 준비 다 됐어!”
아이들은 깜짝 놀라 서둘러 깨진 유리를 대충 치우고 연구실 문을 닫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모충은 어디로 갔을까? 하지만 지금은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저녁 식사 내내 장미는 별 말이 없었다. 가끔 아이들에게 음식을 권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아이들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용히 밥만 먹었다.
밤이 깊어졌다. 장미는 아이들을 재우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장린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었다. 그녀는 천장을 바라보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지?"
자조적인 미소가 입가에 스쳤다. 그때, 등 뒤에서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뭔가가 피부를 스치는 듯한 느낌. 그녀는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피곤해서 환각이 보이나..."
그녀는 몸을 일으켜 침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녀의 등 뒤, 소파 밑에서 조그만 그림자가 살짝 움직였다. 모충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기어 나와 장미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