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의 햇살이 교실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하지만 임호의 마음속은 한겨울보다 더 차가웠다.
그의 손가락이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 화면을 스치듯 만졌다. 카카오톡 알림이 떠 있었다. '사촌누나'라는 이름 석 자가 심장을 조여왔다. 고개를 들자 앞자리에서 여학생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평범한 일상. 하지만 그에게 평범함은 언제나 깨지기 마련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여름 방학, 할머니 댁에서 보낸 그날. 소청 누나는 중학생이었다. 나이 차이가 아홉 살. 그땐 그저 잘 놀아주는 착한 누나라고 생각했다.
“호야, 이리 와 봐.”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끌려 따라간 창고. 문이 잠기고, 누나의 얼굴에 스민 낯선 미소. “누나랑 재미있는 놀이 하자.”
그날 이후로 반년 동안, 방문할 때마다 반복된 '놀이'. 누나는 항상 웃고 있었다. 하지만 임호의 기억 속에 남은 것은 그 웃음이 아니라, 벽에 비친 자신의 흐릿한 눈물이었다.
“임호야, 너 왜 자꾸 멍하니 있어?”
갑자기 옆구리를 찌르는 손가락. 깜짝 놀라 돌아보니 짝꿍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너 요즘 부쩍 말수가 줄었어.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진짜 아무것도 아냐.”
임호는 고개를 숙이고 책을 펼쳤다. 하지만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은 토요일. 누나가 온다. 그 말을 어제 엄마에게서 들었다. '네 사촌 누나가 경찰이 됐는데, 우리 집 근처로 발령 났단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야.'
자주. 그 단어가 뇌리를 맴돌았다.
종이 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무거웠다. 아파트 현관문 앞에 섰을 때, 벌써 누나의 하이힐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찰칵, 찰칵. 그 소리는 언제나 공포의 전주곡이었다.
문을 열자 거실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호야 왔구나!”
엄마의 목소리였다. 거실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는 두 사람. 엄마와 누나. 소청 누나는 검은색 경찰 제복을 입고 있었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입가에 번지는 익숙한 미소.
“오랜만이야, 호야.”
임호의 몸이 굳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어, 네. 누나.”
간신히 꺼낸 대답. 소청은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키가 훌쩍 커서 이제는 임호의 정수리까지 내려오는 시선. 그녀는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많이 컸네. 이제 중학생이라며. 누나가 경찰이 됐어. 못된 짓 하면 가만 안 둘 거야.”
농담 섞인 말투였지만, 임호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이고, 소청이가 동생 챙기려고 그러는 거야. 호야, 누나한테 인사 잘 해.”
엄마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임호는 고개만 끄덕였다.
저녁 식사 내내 소청은 유쾌하게 이야기했다. 경찰 생활, 새로 산 하이힐, 그리고 앞으로 자주 얼굴 보게 될 거라는 말. 엄마는 그 말이 반가운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임호는 젓가락만 멍하니 움직였다.
“호야, 누나 방에서 자고 갈게. 네 방에 인사하러 갈게.”
식사 후, 소청이 그의 방문 앞에 섰다. 임호는 침대에 앉아 떨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왔다. 방 안에 그녀의 향수가 퍼졌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구나. 폰 같은 것도 있고.”
소청이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임호는 숨을 삼켰다. 그녀가 핸드폰을 살짝 흔들며 웃었다.
“요즘 애들은 다 이렇게 폰을 끼고 사나? 누나도 하나 사야겠다. 카톡이나 할 수 있는 것도 좋고.”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그의 옆에 앉았다. 무릎이 스쳤다. 임호는 몸을 움츠렸다.
“왜 그래? 누나 무서워?”
“아, 아니에요.”
“그럼 왜 자꾸 피해? 나쁜 일 한 거 아니지?”
그녀의 손이 그의 뺨을 스쳤다. 따뜻한 손길. 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 차가웠다.
“저, 저는 괜찮아요. 누나, 좀 피곤해서……”
“그래? 그럼 일찍 자. 누나도 방에 갈게.”
소청이 일어났다. 문 앞에서 그녀가 돌아보았다.
“내일 아침에 보자. 이모랑 같이 시장 갈 거야. 너도 올래?”
“……네.”
“좋아. 그럼 잘 자, 호야.”
문이 닫혔다. 임호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손이 떨렸다. 그는 침대에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과거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누나는 항상 ‘놀이’를 ‘비밀’이라고 불렀다.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 큰일 난다고. 어린 임호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부모님에게 말할 용기도 없었다. 두려움과 수치심이 그를 삼켰다.
몇 년이 지나, 누나가 고등학교에 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동안 임호는 어떻게든 잊으려 애썼다. 하지만 몸은 그 기억을 잊지 않았다. 사춘기가 오면서, 그는 자신의 몸에 이상한 변화를 느꼈다.
누나를 생각할 때면, 공포와 함께 묘한 감각이 일었다. 어느 날 밤, 잠자리에서 자신의 몸을 만지작거리다가 깜짝 놀랐다. 다른 애들보다 훨씬 컸다. 그것은 자랑스러움이 아니라 수치심을 안겨주었다.
그날 밤, 임호는 자위를 했다. 처음이었다. 누나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러면서도 동시에 죄책감에 몸부림쳤다.
다음 날 아침, 소청은 일찍 일어나 화장을 하고 있었다. 거울 앞에서 립스틱을 바르는 그녀의 모습이 부엌에서 보였다. 임호는 아침을 먹다가 그만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조심해, 호야.”
엄마가 타박했다. 소청이 돌아보며 웃었다.
“요즘 애들은 폰이 없으면 못 사나 봐.”
“맞아. 그런데 소청아, 너도 하나 사. 연락하기 편하게.”
“네, 이모. 곧 알아볼게요. 아, 그런데 호야. 누나한테 좋은 앱 하나 알려줄까? 사람들이 익명으로 이야기하는 거야. 재밌더라.”
소청이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보여주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임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왜? 누나가 가르쳐 주는데.”
“진짜 괜찮아요.”
“에이, 고집쟁이.”
소청이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 후, 임호는 방에서 혼자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익명 채팅 앱'이라는 광고를 봤다. 소청 누나가 말한 그 앱이었다. 호기심에 검색해 보았다. '소울'이라는 이름의 앱이 나왔다.
그냥 한 번 해볼까.
설치하고 가입했다. 프로필 사진을 설정하지 않고 닉네임만 '고독한 방랑자'라고 적었다. 곧바로 사람들이 채팅을 걸어왔다. 대부분 무료한 일상 대화. 몇 분 만에 지루해졌다.
그때, 알림이 떴다.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을 찾았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1:1 채팅방이 열렸다. 상대방의 닉네임은 '푸른 달'.
안녕하세요.
임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안녕, 호야.'
그 순간, 임호의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지? 놀라서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떨리는 손으로 다시 집어 들었다.
'어떻게 제 이름을……?'
'비밀. 하지만 나는 너를 잘 알고 있어.'
'누구세요?'
'궁금해? 그럼 우리 게임을 하자. 이 약을 한 번 먹어 봐. 그러면 내가 누군지 알게 될 거야.'
약? 임호는 경악했다. 이건 위험한 거래였다. 하지만 상대방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공포보다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무슨 약인데요?'
'걱정 마. 독은 아니야. 최면 효과가 있는 허브 제품이야. 인터넷에서 주문할 수 있어. 내가 링크를 보내줄게. 한 번 시도해 봐, 재미있을 거야.'
링크가 전송됐다. 임호는 손가락으로 링크를 눌렀다. 쇼핑몰 화면에 '수면 유도 허브 캔디'라는 이름의 제품이 떴다. 가격도 저렴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소청 누나였다.
“여보세요, 호야? 누나야. 오늘 시간 있어? 같이 밥 먹자. 네가 좋아하는 돈까스 집이 새로 생겼더라.”
임호는 멍하니 대답했다.
“네, 누나.”
“그럼 6시에 역 앞에서 보자. 약속 안 늦고.”
전화가 끊겼다. 임호는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푸른 달'의 메시지가 아직 떠 있었다.
'한 번 해 봐. 넌 충분히 강해질 수 있어.'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움직였다. 강해진다. 누나에게 당하지 않을 만큼. 그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임호는 링크를 눌러 제품을 주문했다. 배송은 3일 후. 그날, 소청 누나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옷을 갈아입고 현관문을 나섰다. 엄마가 “누나한테 잘해라”라고 말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역 앞에 도착하자 소청이 이미 와 있었다. 그녀는 검은색 블레이저에 하이힐을 신고 서 있었다. 눈에 띄게 화려한 모습. 주변 사람들이 흘낏 쳐다봤다.
“호야, 왔구나. 가자.”
돈까스 집은 조용한 골목 안에 있었다. 그녀가 주문을 마치고 물었다.
“요즘 재미있는 거 있어? 학교는 잘 다니고?”
“네, 그냥 그래요.”
“폰으로 뭐 하니? 애들끼리 재미있는 앱 같은 거 쓰고 그래?”
임호는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소울' 앱, 그리고 '푸른 달'.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별로요.”
“에이, 나한테는 말해도 돼. 누난 경찰이니까 네가 위험한 짓 하는지 감시해야 하거든.”
그녀가 농담처럼 말했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임호는 고개를 숙였다.
식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청이 말했다.
“호야, 누나한테 혹시 비밀이 있어?”
“……없어요.”
“그래? 누나는 있으면 다 말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 가족 사이에 비밀은 없어야 하니까.”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럽지만, 확실한 압박. 임호는 숨을 삼켰다.
그날 밤, 방에 돌아와 임호는 '소울' 앱을 열었다. '푸른 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약 주문했어요. 도착하면 먹어볼게요.'
답장이 바로 왔다.
'잘했어, 호야. 그럼 내가 조금씩 알려줄게. 너는 곧 진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야.'
임호는 핸드폰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진짜 자신? 그것이 무엇일까. 공포로 가득 찬 자신? 아니면 그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자신?
소청 누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푸른 달'의 낯선 익명. 두 사람이 겹쳐 보였다.
……설마?
하지만 그런 생각을 떨쳐 버렸다. 누나가 그런 장난을 할 리 없었다.
며칠 후, 택배가 도착했다. 작은 상자 안에는 사탕처럼 보이는 알약이 들었다. '수면 유도 허브 캔디'라고 적혀 있었다. 임호는 한 알을 집어 들었다.
정말 먹어도 되는 걸까.
망설이다가 결국 입에 넣었다. 달콤한 맛이 혀에 퍼졌다. 몇 분 후, 몸이 나른해지고 눈이 감겼다. 의식이 흐려지기 직전, 핸드폰 화면에 '푸른 달'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자, 이제 시작이야.'
임호는 잠에 빠져들었다. 깨어났을 때, 무언가가 달라져 있었다. 방이 조용했다. 핸드폰을 보니 새벽 3시. 그리고 '푸른 달'에게서 온 메시지가 여러 개 있었다.
'잘 잤니? 이제 나를 만날 준비가 됐어. 다음 지시를 따라.'
그 지시는 간단했다. 내일 밤, 혼자 집을 나와 근처 공원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임호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가면 누구를 만나나요?'
'나를. 하지만 얼굴은 보여주지 않을 거야. 대신 마스크를 쓰고 갈게. 너도 마스크를 쓰.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만나는 거야.'
스릴과 공포가 교차했다. 하지만 임호는 '네'라고 답장을 보냈다.
다음 날 밤, 임호는 검은 마스크를 쓰고 공원으로 향했다. 달빛이 흐릿하게 비치는 벤치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키 큰 사람. 검은 옷에 마스크를 썼다.
“왔구나.”
낮은 목소리.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됐다.
“네, 왔어요.”
“잘 따라왔어. 자, 이제 첫 번째 규칙을 알려줄게. 넌 앞으로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러.”
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좋아. 그럼 이제 집에 가서 잘 자. 다음 주에 다시 만나자. 그때까지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해. 알겠지?”
“네.”
임호는 돌아섰다.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이 누나와 관련이 있을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점점 '선생님'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날 밤, 꿈에서 소청 누나가 나타났다.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호야, 이제 누나가 너를 가르쳐 줄게.”
임호는 잠에서 깨었다. 식은땀에 젖은 시트. 하지만 이상하게도 무섭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기대감이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