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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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우리 1장. 양면 사장 서울의 중심, 강남대로에 우뚝 솟은 유리창 건물. 그 48층 전체를 차지한 '세진 테크놀로지'의 회의실은 오전 열 시, 이미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설아는 긴 회의 테이블의 가장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노트북 키보드 위를 가볍게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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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면 사장

어두운 우리

1장. 양면 사장

서울의 중심, 강남대로에 우뚝 솟은 유리창 건물. 그 48층 전체를 차지한 '세진 테크놀로지'의 회의실은 오전 열 시, 이미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설아는 긴 회의 테이블의 가장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노트북 키보드 위를 가볍게 스쳤다. 빔 프로젝터에 펼쳐진 분기별 실적 보고서가 형광빛을 반사했다.

"4분기 영업이익률이 3% 하락했습니다. 이유를 설명해 보세요."

차갑고도 맑은 목소리였다. 마치 겨울바람처럼 모든 잡음을 잘라내는 음색이었다. 영업 본부장 박 상무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서둘러 목을 가다듬었다.

"그, 그게... 원자재 가격 상승과..."

"원자재 가격 상승? 당신은 그걸 변명이라고 생각하나?"

소설아가 고개를 들어 박 상무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검고 깊었다.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그 시선 앞에서 박 상무는 말문이 막혔다.

"이미 세 달 전에 원자재 가격 변동 폭이 예상된다는 보고가 있었어요. 그럼 그에 대한 대비를 했어야지, 왜 지금 와서 변명을 늘어놓습니까?"

회의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소설아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세 번의 똑똑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3일 안에 개선안을 내놓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말을 끝맺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 속에 담긴 의미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작년에 같은 실수를 한 마케팅 팀장은 지금 어디에도 없었다.

회의가 끝나자 임원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얼굴에는 안도감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소설아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누구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게 그녀가 만든 회사의 분위기였다.

그녀가 회의실을 나서자 비서가 다가왔다.

"대표님, 오후 세 시에 베트남 법인 화상 회의가 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여섯 시에는..."

"여섯 시 이후의 일정은 모두 취소해."

소설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비서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저녁 자리가..."

"취소하라고 했어요."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거기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비서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소설아는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48층 창밖으로는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잠시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네 시. 시간이 충분했다.

집무실 뒤편에 있는 비밀 문을 열자 좁은 복도가 나타났다. 그 복도를 따라 걸으면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일반 직원들은 모르는, 오직 그녀만 사용할 수 있는 통로였다. 엘리베이터는 지하 3층으로 내려갔다. 거기에는 그녀의 또 다른 사무실이 있었다.

지하 사무실은 지상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화려한 가구 대신 실용적인 금고와 서류들이 가득했다. 그녀가 도착하자마자 노인이 다가왔다. 임숙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무표정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오늘 장부가 도착했습니다."

"보여줘."

소설아가 금고 앞 의자에 앉았다. 임숙이 두꺼운 장부 한 권을 그녀 앞에 펼쳤다. 장부에는 각종 부호와 숫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일반인이 보면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암호같은 기록이었다.

"이번 달 베트남 지선에서 총 47명이 들어왔습니다. 그중 12명은 특별 관리 대상이고요."

"품질은?"

"대부분 중상급입니다. 한 명은 특급으로 분류됩니다."

소설아의 손가락이 장부 위를 빠르게 훑었다. 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여기 3페이지, 이 숫자들은 뭐지?"

임숙이 잠시 장부를 살펴보았다.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확인을 소홀히 했습니다. 거래처의 배당금이 누락되었습니다."

"임숙."

소설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불렀다.

"네."

"당신은 내가 가장 믿는 사람이야. 하지만 그 믿음이 실수로 이어져서는 안 돼. 알겠니?"

"명심하겠습니다."

임숙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소설아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장부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손은 숫자들을 마치 계산기처럼 처리했다. 머릿속에서 모든 거래가 정리되었다.

"이번 달 순이익은 작년 동기 대비 8% 상승했군. 좋아. 하지만 베트남 지선의 관리비가 너무 높아. 본사에서 직접 감독관을 보내겠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소설아가 장부를 닫았다. 그 순간 그녀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소설아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임숙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 교외 장원에서 거래회가 열린다. 이번에는 규모가 크다고 하더군."

"네. 저도 소식을 들었습니다. 중국 본토에서도 몇몇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다고 합니다."

"직접 가보겠다."

임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께서 몸소 나서실 필요까지는..."

"이번 거래는 달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어."

소설아의 말은 단호했다. 임숙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고개를 숙여 순종을 표시했다.

소설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기 전에 작은 거울을 꺼냈다. 거울 속의 자신은 여전히 냉철하고 우아한 기술 회사의 CEO였다. 그 모습에 만족하며 그녀는 거울을 집어넣었다.

집무실로 돌아오자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표님, 방금 전달받은 긴급 문서입니다."

"됐어. 나는 오늘 일찍 퇴근할 거야. 남은 일은 내일 처리하겠다."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갔다. 소설아는 집무실 문을 닫고 혼자 남았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지상의 그녀는 빛나는 CEO였다. 하지만 지하의 그녀는 어둠을 다스리는 존재였다.

저녁 일곱 시, 소설아는 검은색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운전석에는 임숙이 앉아 있었다. 차는 조용히 교외로 향했다. 도시의 불빛이 점점 멀어지고, 어둠이 짙어졌다.

"아가씨, 도착까지 약 40분 남았습니다."

"알았어."

소설아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 놓인 핸드백의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그 안에는 소형 권총 한 자루와 몇 장의 신분증이 들어 있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차가 점점 외진 길로 접어들었다. 산길을 따라 10분쯤 달리자 거대한 대문이 나타났다. 대문 앞에는 무장한 경비원들이 서 있었다. 임숙이 차창을 내리고 특별한 수신호를 보냈다. 경비원이 확인하고 고개를 숙였다. 대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웅장한 장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유럽식 저택이 어둠 속에서 불빛을 발하고 있었다. 주차장에는 이미 수십 대의 고급 승용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소설아가 차에서 내리자 정장을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대표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그녀를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화려한 로비를 지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넓은 홀이 펼쳐졌다. 거기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소설아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는 아무런 동요 없이 걸어갔다. 그녀의 발걸음은 경쾌했지만, 그 속에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녀가 홀 중앙에 있는 의자에 앉자 임숙이 그 뒤에 섰다.

거래회가 시작되었다.

거래회 급변

임숙이 준비한 운전기사용 제복을 입고 검은 선글라스를 낀 소설아는 장원 뒷문으로 들어섰다. 가로등 불빛이 간간이 비추는 어둠 속에서 그녀는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에 다니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보안 요원이 무전기를 든 채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아무도 그녀가 수사 받을 때의 초췌한 모습과 지금의 늠름한 모습을 동일 인물로 의심하지 않았다.

저택의 지하 거래장은 이미 인적으로 북적였다. 소설아는 구석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천장에 매달린 철제 새장을 바라보았다. 철장 안에는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 사람들이 웅크리고 있었고, 그들의 눈에는 공포와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조호는 단상 위를 배회하며 수시로 채찍을 휘둘러 공기를 갈랐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다들 이번 물건을 잘 보게! 모두 손질 잘된 상품들이야!”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소설아는 선글라스 너머로 단상을 응시했다. 철장 안의 한 어린 소녀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소녀의 눈에는 기적처럼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다. 소설아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문이 부서지며 터져 나오는 굉음이 장내를 가득 메웠다. 섬광과 함께 연막탄이 굴러 들어와 모든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다.

“경찰이다! 모두 엎드려라!”

총성이 사방에서 요란하게 울렸다. 소설아는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굴러 기둥 뒤편으로 피했다. 탕! 총알이 그녀가 방금 서 있던 자리 옆 벽면을 스쳤고, 돌가루가 튀었다. 조호는 무대 위에서 고함을 지르며 사람들에게 저항을 명령했지만, 이미 아수라장이 된 현장은 통제 불능이었다.

소설아는 몸을 낮춰 엉금엉금 기어가며 철장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누군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돌아보니 피투성이가 된 거래상이 이를 악물고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주저함 없이 그 손을 걷어차고 일어나 뒷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장원의 정원은 이미 전장으로 변해 있었다. 소설아는 정원의 돌길을 따라 숲이 우거진 방향으로 달렸다. 울창한 덤불이 그녀의 뺨을 할퀴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뒤에서 쫓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거기 서라!”

목소리는 바로 코앞에서 들려왔다. 소설아는 고개 숙여 왼쪽으로 몸을 틀며 키 큰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손목에서는 예전 수사 때 묶였던 밧줄 자국이 쑤셨다.

숲은 점점 깊어졌고, 달빛은 나뭇잎 사이로 간신히 새어 들어왔다. 소설아는 몸을 숨기고 기어가며 지형을 이용해 추적자들의 시선을 피했다. 뒤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총성이 울려 퍼졌지만 점점 멀어져 갔다.

한참을 달려 그녀는 마침내 작은 개울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몸을 굽혀 찬물을 움켜쥐었다. 손이 덜덜 떨렸지만, 눈빛은 여전히 단호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저택 쪽으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아직 멀었어… 이건 시작일 뿐이야.”

스스로 함정에 빠지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폐부를 찢는 듯한 통증이 온몸을 휘감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소설아는 축축한 이끼에 미끄러진 발을 간신히 디디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밀림의 공기는 끈적거리고 무거웠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희미한 빛조차 그녀를 압박했다. 시계는 이미 사흘째 꺼져 있었고, 방향 감각은 완전히 마비된 지 오래였다.

“젠장…”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고급스러운 정장은 이미 너덜너덜했다. 구두는 어디선가 벗겨져 맨발이 흙탕물을 밟고 있었다.

몇 번을 넘어졌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손바닥은 돌과 가시에 찢겨 피가 흐르고, 무릎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괴로운 것은 머릿속을 맴도는 무수한 생각들이었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아버지의 유산, 가문의 비밀, 그리고 그 굴레. 모든 것을 버리고 달아났지만 결국 이 정글에서 썩어 문드러질 운명이었다.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기계음. 그리고 발소리.

소설아의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낮추고 두꺼운 덤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고막을 때릴 듯이 요동쳤다.

(누구야… 누가 여기에…)

희미한 인기척이 점점 가까워졌다. 여러 명이었다. 군화 바닥이 젖은 낙엽을 밟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소설아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사방을 샅샅이 뒤져라. 도망친 노예가 이 근처에 숨어 있을 거야.”

낯선 목소리였다. 차갑고 무정한 어조. 소설아는 직감했다. 이것들은 일반 수색대가 아니었다. 그녀의 가문, 어두운 그룹이 운영하는 노예 포획대였다.

덤불 사이로 그들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네 명의 사내. 모두 검은색 전투복에 얼굴은 마스크로 가려져 있었다. 선두에 선 자는 다른 이들보다 더 큰 덩치에, 어깨에 전자 채찍을 메고 있었다.

“대장, 흔적은 여기까지입니다. 더 이상은 없어요.”

한 부하가 보고했다.

대장이라 불린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돌려 정확히 소설아가 숨은 덤불 쪽을 응시했다.

“나와라. 숨어 봤자 소용없다.”

소설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웅크렸지만, 이미 늦었다. 대장이 손짓하자 두 부하가 재빨리 덤불을 헤치고 그녀를 끌어냈다.

“놔! 당신들 누구야!”

소설아는 발버둥 쳤지만 힘에 부쳤다. 사내의 손아귀는 쇠사슬처럼 단단했다. 그때, 선두에 선 대장이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건… 설마?”

대장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의도적으로 표정을 굳혔다. 그는 소설아를 알아본 것이다. 이 그룹의 전 CEO, 수쉐얼을 말이다. 그러나 그는 모르는 척하며 고개를 저었다.

“평범한 도망자군. 다른 녀석들과 함께 묶어.”

“네, 대장!”

소설아는 그의 말에 분노가 치밀었다.

“당신! 내가 누군지 알면서!”

그러나 대장, 조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돌아서서 명령을 내렸다.

“목걸이와 족쇄를 채워라. 기본은 똑같이 처리한다.”

찬란한 금속 소리와 함께 무거운 족쇄가 그녀의 발목과 손목을 감쌌다. 목에는 전자 충격 목걸이가 채워졌다. 그 무게가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소설아는 알 수 있었다. 이 순간, 그녀는 자유를 잃었다. 수년간 타인을 지배하던 자리에서, 이제는 지배당하는 자가 되었다. 조호는 그녀를 철저히 무시하며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기지로 데려간다. 도망자 신분으로 처리할 거다.”

밀림을 빠져나오는 동안, 소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모든 가능성을 계산했다. 집사 임숙이 아직 남아 있을까. 그녀가 이곳에 남겨둔 비밀 네트워크는 여전히 작동할까.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희망에 불과했다. 지금 당장은 순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군용 트럭이 흔들리며 어둠 속을 달렸다. 소설아는 다른 포로들과 함께 짐칸에 실려 있었다. 그들 모두는 같은 복장, 같은 족쇄를 차고 있었다. 어떤 이는 울고, 어떤 이는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소설아는 이를 악물었다.

(기다려라. 언젠가는…)

트럭이 멈추고 굉음과 함께 철문이 열렸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었다. 어두운 그룹이 비밀리에 유지하는 훈련소이자 노예 관리 기지였다.

조호가 그녀 앞에 서서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가 네 새 보금자리다. 규칙에 따라 행동해라.”

소설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운명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 눈빛 속에는 한 줄기 불길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었다.

훈육 시작

조호가 다가오는 발소리에 소설아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콘크리트 바닥이 차갑게 엉덩이를 파고들었다.

"일어나."

한 마디에 모든 게 시작되었다. 소설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릎이 시렸다. 조호는 그녀 앞에 서서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다. 그의 눈빛은 물건을 평가하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여기서는 네가 누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지금 무엇이냐는 거야."

소설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하려고 하자 조호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규칙 하나. 허락 없이 말하지 마라. 규칙 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마라. 규칙 셋. 모든 명령에 즉시 복종하라."

그가 천천히 그녀 주위를 돌았다. 소설아의 시선은 그의 발끝에 고정되었다. 이 자세가 얼마나 굴욕적인지, 전에는 상상도 못 했다.

"내 이름을 말해 봐."

소설아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조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규칙 하나를 어겼다. 네가 할 말을 내가 물어봤는데, 대답을 못 하다니."

그가 주먹을 쥐었다. 소설아의 뺨이 얼얼했다. 그녀는 쓰러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바닥을 짚었다. 피가 입안에 퍼졌다.

"조... 조호."

"처음이니까 세게 때리지 않았다. 다음에는 다르다."

그는 다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소설아의 눈에 눈물이 맺혔지만, 그녀는 억지로 참았다. 울면 안 된다. 약해 보이면 끝이다.

"네 신분을 말해 봐."

소설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노... 노예다."

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런데 네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조호가 그녀의 턱을 집어 올렸다. 그의 손길은 거칠었다.

"아직도 네가 누군지 깨닫지 못한 것 같다. CEO였던 시절의 버릇이 남아 있어."

소설아는 말을 참았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를 슬쩍 암시해 보려 했지만, 조호는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그는 오히려 더 심한 말과 행동으로 그녀를 짓밟았다.

"네 입에선 '하겠습니다'와 '네'만 나올 수 있다. 그 외 말은 필요 없어."

훈육은 몇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조호는 그녀에게 무릎 꿇고, 엎드리고, 손을 들고, 머리를 숙이는 법을 가르쳤다. 하나라도 잘못하면 곧바로 채찍이 내려왔다. 소설아의 등은 벌겋게 부어올랐다.

저녁이 될 무렵, 그녀는 겨우 방에 돌아왔다. 온몸이 아팠다. 그녀는 벽에 기대어 앉아 숨을 헐떡였다.

문이 열리고 임숙이 들어왔다. 그는 조용히 상처 약과 빵을 내밀었다.

"아가씨..."

"괜찮아요."

소설아는 약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알았다. 살아남으려면 지금은 숨어야 한다. 신분을 드러내는 즉시 죽음이다. 그녀는 약을 발라 상처를 감쌌다. 배가 고팠지만, 빵은 천천히 씹었다.

내일도 또 같은 날이 반복될 것이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반드시 이곳에서 나갈 것이다. 그때까지는 참아야 한다.

그녀는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내일은 더 잘해야 한다. 복종하는 척이라도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

평가 불합격

평가장은 축사처럼 넓었다.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이 시멘트 바닥을 새하얗게 비췄고, 그 위로 수십 명의 노예들이 무릎을 꿇고 줄지어 있었다. 소설아도 그중 하나였다. 무릎이 닿은 바닥은 차갑고 단단했다. 가느다란 자갈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눈앞에서 조호가 채찍을 들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네놈들은 이제 개야. 주인님의 밥그릇에 코를 박고 살아야 할 존재라고.”

조호의 목소리는 나팔처럼 울려 퍼졌다. 그는 노예들의 뒤통수를 하나하나 짚으며 지나갔다. 어떤 노예는 어깨를 움츠렸고, 어떤 노예는 눈물을 질질 흘렸다. 소설아는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죽였다. 가슴속에서 자존심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났다.

“엎드려.”

명령이 떨어졌다. 노예들은 재빨리 바닥에 배를 깔았다. 소설아도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아직도 말려들지 않았다.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3년 전, 회의실에서 수십억 계약서에 도장을 찍던 손이었다. 그 손이 지금은 더러운 시멘트 바닥을 긁고 있었다.

조호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소설아.”

이름이 불렸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호는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가를 비틀었다.

“가만히 있어도 아는 척이네. 네놈, 아직도 네가 누군지 착각하고 있어.”

“아닙니다.”

소설아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떨리지 않았다. 조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채찍 손잡이로 그녀의 턱을 받쳐 올렸다. 차가운 금속이 살에 닿았다.

“아니라면 왜 눈빛이 살아 있냐? 죽은 개는 눈을 감아. 눈을 뜨고 있는 개는 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야.”

그는 손을 놓았다. 소설아의 턱이 툭 떨어졌다.

“기본 복종 테스트 시작한다. 내가 ‘굴복’이라고 외치면, 너희는 정수리가 바닥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리고 ‘예, 주인님’이라고 대답해. 지체하거나 소리가 작으면 불합격.”

첫 번째 명령이 떨어졌다. 대부분의 노예들은 즉시 반응했다. 이마가 바닥을 쿵쿵 찧었다. 소설아도 몸을 숙였다. 하지만 그 순간, 뇌리가 찢어지는 듯한 기억이 스쳤다. 몇 달 전, 그녀가 이 자리에서 조호에게 굴복했을 때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피 맛. 부러진 손톱. 배신당한 몸.

그 찰나의 망설임.

“소설아, 지체!”

조호의 채찍이 그녀의 등짝을 후려쳤다. 옷이 찢어졌다. 피부 위로 불이 붙는 듯한 통증이 번졌다. 그녀는 비명을 삼켰다. 이빨을 악물었다. 입안에서 철분 맛이 번졌다.

“다시. ‘굴복!’”

그녀는 정수리가 바닥에 닿도록 숙였다. “예, 주인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조호의 귀에는 그것이 충분하지 않았다.

“통과 못 시켜. 일어나 봐. 벌 서야지.”

소설아의 무릎이 떨렸다. 그녀는 간신히 일어섰다. 조호가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평가장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는 지름 한 뼘쯤 되는 철제 받침대가 바닥에 볼트로 고정되어 있었다.

“네놈은 오늘 10분 동안 이 받침대 위에 서 있어. 팔은 뒤로, 무릎은 펴고. 한 번이라도 흔들리거나 떨어지면 처음부터 다시.”

소설아는 받침대 위에 올라섰다. 발바닥이 철판의 차가움을 느꼈다. 팔을 등 뒤로 묶자 균형이 더욱 불안정해졌다. 조호는 시계를 꺼내 들고 옆에 서서 지켜봤다.

시간이 모래알처럼 느리게 흘렀다. 허벅지가 떨리기 시작했다. 종아리가 경련을 일으켰다. 땀이 이마에서 흘러내려 눈을 찔렀다. 5분이 지나자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그녀의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조호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떨어진다!”

그녀는 받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무릎이 시멘트 바닥에 부딪혀 피가 났다.

“처음부터 다시.”

소설아는 이를 악물고 다시 받침대 위에 올라섰다. 반복. 또 반복. 세 번째 시도에서 그녀는 다섯 분도 버티지 못했다. 다리가 풀려 앞으로 고꾸라졌다. 입술이 터져 피가 났다.

조호는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의 얼굴에는 짜증이 섞인 연민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평가 불합격이다. 소설아, 네놈은 오늘부로 하수인으로 강등된다. 변소 청소.”

소설아의 귀에서 피가 멎는 소리가 났다. 하수인. 그룹 내에서 가장 낮은 계급.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존재. 그중에서도 변소 청소는 최악이었다.

“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다른 선택은 없었다. 조호가 두 명의 관리인을 불렀다. 그들은 소설아를 끌고 평가장 밖으로 나갔다.

숙소에서 가장 후미진 곳에 위치한 하수인 구역은 악취가 진동했다. 좁은 복도 양옆으로 화장실 칸이 늘어서 있었다. 바닥은 오물이 굳어 때가 껴 있었다. 변기마다 쌓인 게 눈에 띄었다. 몇 번 청소하지 않은 지 오래된 것 같았다.

“네 구역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다. 오늘 안으로 다 닦아.”

관리인이 손가락으로 대충 가리키고는 돌아섰다. 소설아는 바닥에 놓인 솔과 양동이를 바라봤다. 양동이 안에는 탁한 물이 반쯤 차 있었다. 그녀는 솔을 집어 들었다. 손잡이는 미끄러웠다. CEO 시절, 그녀는 한 번도 이런 도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첫 번째 변기. 그녀는 솔을 물에 적셔 변기 안쪽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구토가 치밀어 올랐지만 억지로 삼켰다. 토하면 그 자리에서 다시 청소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몰랐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의 손은 굳은살이 배기 시작했고, 무릎은 시멘트 바닥에 닳아 피부가 벗겨졌다. 옷은 오물로 범벅이 되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의 눈은 멈추지 않았다.

구역을 청소하면서 그녀는 기지의 구조를 하나하나 외웠다. 왼쪽 끝에 있는 창고. 문고리가 부러져 있어서 자물쇠가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다. 오른쪽 복도 끝에는 비상구가 있었지만 그 앞에는 항상 경비병 두 명이 서 있었다. 위쪽 벽에는 환기구가 있었지만 너무 높아 손이 닿지 않았다.

그녀는 관리인들이 교대하는 시간을 외웠다. 오전 6시, 오후 6시. 교대 직후 3분 동안은 경계가 느슨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 3분 동안 경비병들은 담배를 피우거나 잡담을 나누며 문 앞을 비웠다.

며칠이 지났다. 그녀는 변소 청소에 익숙해져 갔다. 냄새도 더 이상 못 느꼈다. 하지만 몸은 점점 망가져 갔다.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 어지러움이 심해졌고, 잠을 충분히 못 자서 눈 밑이 새까맣게 패였다.

하루는 청소를 마치고 좁은 하수인 숙소로 돌아와 바닥에 주저앉았다.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임숙의 얼굴이 떠올랐다. 회색 머리를 반듯하게 넘기고, 항상 깔끔한 양복을 입고 서 있던 늙은 집사. 그녀는 아직 살아 있다. 임숙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신호를 보내기만 하면, 그녀가 올 것이다.

소설아는 눈을 떴다. 희미한 형광등 불빛이 천장에 어른거렸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붙은 선반에서 작은 돌멩이 하나를 꺼냈다. 며칠 전 청소를 하다가 복도 구석에서 주워서 숨겨둔 것이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물건이었지만, 그녀에게는 희망의 증표였다.

그녀는 숙소 벽에 작게 표시를 했다. 오늘은 이곳에. 내일은 저곳에. 천천히, 조금씩 기지의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아직은 몸도 마음도 무너질 것 같았지만, 눈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조금만 더. 임숙이 올 때까지 버티자. 그때까지 이곳의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녀는 다시 바닥에 누웠다. 차가운 시멘트가 등을 식혀 주었다. 눈을 감자 숨소리만이 방 안을 맴돌았다. 그녀는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변소 구석에서 솔을 들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 솔로 자신의 자유를 쓸어낼 것이다. 그날을 위해, 그녀는 오늘도 악취와 싸우며 눈을 뜨고 있었다.

절망 속에서 살아남기

수쉐얼은 발을 질질 끌며 복도를 걸었다. 발목에 채워진 무거운 쇠사슬이 돌바닥에 끌리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다른 노예들이 그녀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의미심장한 눈빛을 던지거나, 아예 대놓고 비웃음을 터뜨렸다.

“저거 봐, 전에 CEO였다던 그 여자야.”

“CEO는 무슨, 지금은 우리랑 똑같은 하수인일 뿐이지.”

“그래도 얼굴은 반반하네? 아마 조호 대장이 특별 관리하겠지.”

수쉐얼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바닥은 청소용 걸레를 잡느라 거칠게 닳아 있었다. 손끝이 갈라져 피가 묻어 나왔지만, 그녀는 더 이상 고통을 신경 쓰지 않았다. 고통은 이제 그녀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야! 거기!”

등 뒤에서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그녀는 몸을 움찔했다. 경비원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와 주먹을 휘둘렀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바닥에 넘어졌다.

“눈이 똑바로 안 박혔어? 닦아야 할 구역이 거기라고 생각해?”

수쉐얼은 말없이 일어나 걸레를 움켜쥐었다. 그녀의 눈에는 이미 눈물조차 마르고 없었다. 그저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일 뿐이었다. 그녀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경비원은 비웃으며 돌아섰다.

그날 저녁, 수쉐얼은 노예 숙소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벽에는 낙서가 가득했고, 냄새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웠다. 다른 노예들은 저마다 조금씩 빵을 씹으며 졸고 있었다. 그때, 복도 건너편에서 경비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무심코 귀를 기울였다.

“들었어? 본사에 문제 생겼대.”

“뭐? 무슨 일인데?”

“소설아가 사라지면서 그룹 내부가 개판이 됐어. 노 대표가 실종됐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그럼 우리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조용히 있어. 위에서 아직 정리가 안 됐다고 하더라. 노예들은 괜히 휘말리지 말아야 해.”

수쉐얼의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실종이 그룹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완전히 포기된 상태가 아니었다. 희미한 빛이 그녀의 눈에 다시 스며들기 시작했다.

다음 날, 그녀는 화장실 청소를 명령받았다. 좁고 더러운 변소는 악취가 진동했지만, 수쉐얼에게는 인내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녀는 걸레를 물에 적셔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녀의 발끝에 무언가 걸렸다. 구부려 보니 낡은 금속 쇠붙이 하나가 쓰레기 사이에 끼어 있었다. 끝이 뾰족하고 손잡이 부분은 거칠게 부러져 있었다. 살을 찌를 수 있을 만한 날카로움이었다.

그녀는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그녀를 지켜보지 않았다. 그녀는 재빨리 금속 조각을 빨래 더미 속에 감췄다. 손이 떨렸지만, 동시에 가슴 한구석에서 차가운 결심이 피어올랐다.

“이게 내 마지막 수단이야.”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걸레를 움켜쥐며 닦기 시작했다. 바닥에 묻은 핏자국이 점점 번져 갔다. 누군가의 핏자국인지, 자신의 핏자국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다시는 스러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절망 속에서도 살아남을 것이다. 어떻게든, 반드시.

후수 기동

임숙은 지하 벙커의 어두컴컴한 방에서 휴대용 단말기를 들여다보았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움직이며 그룹 내부 네트워크의 비밀 채널을 타고 흘러드는 정보들을 하나씩 추적했다. 그의 눈에는 냉철함과 절제된 분노가 교차했다.

“소설아 씨가 격리 구역 7에 갇혀 있습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그는 화면에 떠오른 건물 내부 도면을 확대했다. 3중 전기 충격장벽, 순찰 로봇 4기, 교대 근무하는 경비 네 명. 평범한 방식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임숙은 이미 수십 년 동안 그룹의 시장 네트워크를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정식 권한 밖의 비공식 루트, 돈과 정보가 거래되는 깊은 어둠 속의 통로. 바로 그곳을 통해 그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며칠 후, 조호의 통신 단말기에 낯선 암호화 메시지가 도착했다.

“구매자 신분: ‘나그네’. 특수 노예 1구. 최고가 지불 의사 있음.”

조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메시지를 여러 번 읽었다. ‘나그네’라는 코드는 그룹에서 오래전 폐기된 전직 고위 간부의 호출 부호였다. 더군다나 이 채널은 현재 시장 거래에서 사용되지 않는 구형 프로토콜이었다. 누군가가 일부러 오래된 연결선을 통해 접촉해온 것이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잠시 망설이다가 답신을 보냈다.

“가격 조건. 노래번 들어.”

메시지는 곧바로 답장이 왔다.

“가격은 상관없다. 물건 상태와 출신만 명확하면 된다. 특히 최근 1년 이내에 새로 들어온 여성 노예를 원한다. 교육이 덜 된 게 좋다.”

조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정체를 숨기려는 구매자치고는 너무 구체적인 요구였다. 하지만 높은 금액을 제시한다는 말에 그의 관심은 이미 상당히 끌려 있었다. 그는 소설아의 기록을 불러들이며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특수 노예, 교육이 덜 된, 여성. 소설아가 딱 맞아떨어졌다.

며칠 후, 조호는 소설아를 부르는 방식부터 바꾸었다. 전에는 거칠게 끌고 다니며 명령조로 일을 시켰지만, 이제는 비교적 온화한 어조로 작업장 구석에 있는 물품 정리를 지시했다.

“오늘부터 여기서 일해.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시간이 되면 쉬어도 좋다.”

소설아는 머뤄쥔 손에서 비친 그의 단호한 표정과 달리 목소리가 전보다 누그러진 것을 느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조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무언가 다른 의도가 숨어 있었다. 오히려 그 평온함이 더 불길했다.

“왜요? 갑자기 다정해지셨네요.”

조호는 대답하지 않고 뒤돌아 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가던 그림자가 문턱을 넘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너에게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나쁜 게 아니니 그냥 따르기만 해.”

소설아는 그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곱씹었다. 그녀는 이미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겪었다. 감시가 느슨해지고 대우가 좋아지면, 그건 곧 새로운 거래가 임박했음을 의미했다. 누군가 자신을 사려고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임숙… 당신이 하는 거 맞죠?”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리며 소설아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가슴 한구석에서 냉랭한 확신이 솟아올랐다.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그녀를 다시 자유로 이끌지, 아니면 다른 감옥으로 던질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깊이 들이쉬며 일어났다. 아직 끝이 아니다. 그녀는 아직 싸울 힘이 남아 있었다.

경매와 거래

어둠이 짙게 깔린 기지의 경매장은 희미한 불빛 아래서 기이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림숙은 검은색 두건을 깊이 눌러쓰고, 낮은 자세로 관중석 한쪽에 자리 잡았다. 손에는 번호표가 들려 있었고, 표정은 무표정했다. 주변의 구매자들은 대부분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이 지하 세계의 규칙을 잘 아는 자들이었다.

경매장의 무대 위에는 쇠창살로 둘러싸인 우리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여러 명의 젊은 노예들이 초조하게 서 있었다. 조호가 단상 위에 올라와 마이크를 잡고, 목소리는 거칠고 힘이 있었다.

"오늘 손님 여러분을 위해 특별한 상품을 준비했습니다. 모두 엄격한 평가를 거친 우수한 노예들입니다."

관중석에서 웅성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림숙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손가락이 살짝 경매 번호표를 비비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무대 뒤쪽 어둠 속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에 곧 소설이가 나타날 것이다.

경매는 순서대로 진행됐다. 한 명 한 명의 노예가 부름을 받고, 가격이 부르면 낙찰자가 정해졌다. 림숙은 입찰하지 않았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순서가 되자, 조호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제 마지막 상품입니다. 여러분, 주목해 주십시오."

어둠 속에서 한 여성이 끌려나왔다. 그녀는 깨끗한 회색 옷을 입고 있었지만, 얼굴은 창백했다. 바로 소설아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걸음걸이는 여전히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관중석에서 낮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조호가 그녀를 우리 앞으로 밀치며 소리쳤다. "이 노예는 지난번 평가에서 최고 등급을 받았습니다. 지능과 외모 모두 뛰어납니다. 시작가는 오백만 원입니다."

림숙은 번호표를 들어 올렸다. "오백만 원."

주변의 몇몇 구매자들도 입찰했다. "오백오십만 원." "육백만 원."

조호가 일부러 가격을 올리기 시작했다. "칠백만 원. 이 노예는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림숙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팔백만 원."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속에 담긴 단호함은 분명했다. 주변 구매자들이 점점 손을 내렸다. 조호는 여전히 가격을 올리려 했지만, 림숙의 표정을 보고 잠시 멈췄다.

"천만 원." 림숙이 다시 말했다.

경매장에 침묵이 흘렀다. 조호는 몸을 돌려 림숙을 잠시 응시한 후,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천만 원, 낙찰입니다."

망치가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소설아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눈가에 희미한 빛이 스쳤다.

경매가 끝난 후, 림숙은 비서를 통해 거래를 완료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녀는 경매장 뒤쪽의 좁은 방으로 안내되었고, 그곳에서 조호가 이미 소설아를 데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거래는 기지 내에서 완료되어야 합니다." 조호가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 "여기서 서명하시고, 노예를 받아가십시오."

림숙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에 사인했다. 그녀는 조호를 향해 조금 다가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 대장님, 이 노예는 좀 특별하니 조심히 다루셔야 합니다."

조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알겠습니다. 림 사장님."

그 순간, 조호가 소설아의 팔을 잡아 끌며 소설아를 바닥에 무릎 꿇렸다. 소설아는 얼굴색이 변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게 마지막 절차입니다." 조호가 차갑게 말했다. "새 주인에게 인사해."

소설아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분노와 굴욕이 뒤섞여 있었다. 림숙은 그녀를 바라보며, 얼굴에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일어나." 림숙이 조용히 말했다. "이제 내 것이다."

조호는 마지못해 손을 놓았다. 소설아는 천천히 일어나, 고개를 숙인 채 림숙 뒤로 걸어갔다.

림숙은 조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소설아는 그녀의 뒤를 따라, 어두운 복도를 지나 기지 밖으로 걸어나갔다.

밖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림숙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소설아를 바라봤다. "고생 많았어."

소설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억지로 참으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림숙 씨."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림숙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자."

두 사람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뒤에서는 조호가 문가에 서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