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전장은 이미 고요를 되찾았다. 검은 피로 물든 대지 위로 흰 꽃잎이 흩날리며 내려앉았다. 신들과 마물, 그리고 타락한 자들의 시체는 모두 재가 되어 바람에 흩어졌다. 그 참혹했던 선과 악의 대전이 끝나고, 신들은 잠에 빠져들었다. 남은 것은 쓸쓸한 폐허와 무거운 침묵뿐이었다.
용아는 언덕 위에 서서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날개는 이미 거두어졌고, 이마에 빛나던 신성한 문양도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공기에는 더 이상 신력의 떨림이 없었고, 오직 흙 냄새와 풀 냄새만이 감돌았다. 인간의 세계는 이렇게 생생했다. 그리고 생생하기 때문에 너무도 쉽게 무너져 내렸다.
“결심했어?”
봉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여전히 순백색 장포를 입고 있었지만, 더 이상 그 옷에서는 신성한 빛이 흐르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보따리가 들려 있었고, 그 안에는 인간들이 사용하는 몇 가지 일용품이 들어 있었다.
용아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 함께 싸워온 동료였다. 그들의 눈에는 같은 결의가 담겨 있었다.
“신들은 잠들었어. 우리도 그들의 꿈속에 남을 필요는 없지.”
봉아는 살짝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예전처럼 자애롭기보다는 무언가 가벼운 것이 섞여 있었다.
“그럼 가자.”
그들은 함께 언덕을 내려갔다. 발밑에 깔린 돌부리가 그들을 반기듯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신력을 버리기로 한 순간부터 그들의 몸은 인간처럼 무거워지고 약해졌다. 하지만 그 무거움이 오히려 그를 기쁘게 했다. 그는 인간이 되어 세상의 무게를 느끼고 싶었다.
며칠을 걸어 동쪽의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은 폐허에 가까웠다. 전쟁의 여파로 많은 집이 무너졌고,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다시 일어서려 애쓰고 있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어른들의 한숨이 뒤섞인 곳이었다.
용아와 봉아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마을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처음 며칠은 힘들었다. 인간들은 그들을 낯선 이방인으로 여겼고, 특히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기운을 경계했다. 하지만 봉아가 무너진 학교를 다시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녀는 부드럽고 자상했으며, 어떤 아이든 차별하지 않고 글을 가르쳤다. 그리고 용아는 마을 수비대에 자원했다. 그의 검술은 신력을 쓰지 않아도 뛰어났고, 위험한 짐승이나 도적을 막아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봉아는 학교에서 돌아와 마을 우물가에서 손을 씻었다. 찬물이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우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쟁이 끝난 지 3년이 지났고, 그녀의 얼굴은 인간의 청년으로 성장했다. 이마의 주름, 눈가의 미세한 선, 그리고 입가에 스며드는 미소까지. 모든 것이 인간 그 자체였다.
“봉아 선생님!”
뒤에서 아이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그녀의 치마자락을 붙잡고 오늘 배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봉아는 고개를 숙여 그들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 웃음은 진심이었다.
“벌써 집에 갈 시간이야. 내일 또 만나자.”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흩어져 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봉아는 생각했다. 이것이 인간의 삶인가. 이렇게 작고, 덧없고, 그래서 소중한 것.
그 무렵, 용아는 마을 성벽 위에서 저녁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어깨는 더욱 넓어졌고, 얼굴은 각이 졌다. 예전의 신아였을 때의 그 온화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대신 인간 남성 특유의 강인함이 자리 잡았다. 그는 순찰을 마치고 성벽에서 내려와 마을로 걸어 들어갔다.
가는 길에 학교 앞을 지나쳤다. 학교 문은 열려 있었고, 안에서는 아직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봉아가 교실 문턱에 서서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긴 머리를 뒤로 묶고, 얼굴에는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용아의 가슴 한구석이 이상하게 울렸다.
그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았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그 자리를 떴다. 그는 신아였다. 아니, 예전에는 신아였다. 비록 지금 인간의 몸을 입고 있지만, 그의 본질은 여전히 신이었다. 그리고 신은 인간의 감정에 쉽게 물들어서는 안 된다.
저녁, 그들은 마을 변두리에 있는 작은 오두막에서 만났다. 그들은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같은 마을에 살면서 자주 만나 식사를 함께했다.
봉아가 밥상을 차렸다. 간단한 죽과 몇 가지 나물이 전부였다. 하지만 용아는 그 음식이 언제나 특별하게 느껴졌다.
“오늘 순찰은 어땠어?”
봉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별일 없었어. 다만 서쪽 숲에서 짐승 발자국이 보였어. 아마 멧돼지인 것 같아.”
“조심해야겠네. 사람들이 숲에 나무하러 가는데.”
“내일 낮에 한 번 더 살펴볼게.”
그들은 이렇게 평범한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용아는 봉아의 시선이 종종 자신에게 머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시선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것을 무시하려 했다.
“봉아.”
“응?”
“혹시, 후회되지는 않아? 신력을 버린 것.”
봉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후회? 아니. 오히려 이게 더 나아. 인간으로 살면서 가르치는 일이 더 의미 있게 느껴져. 예전처럼 그냥 지식을 내려주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깨닫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
그녀는 고개를 들고 용아를 바라보았다.
“너는?”
용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죽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따뜻한 죽이 목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나는 이 길을 선택하겠다.
그날 밤, 달이 높이 떠올랐다. 봉아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창가에 서서 달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신들이 잠들기 전, 그녀는 자애로운 지식의 전달자였다. 그때는 모든 것이 명확했다. 선은 선이고, 악은 악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된 후, 그녀는 알게 되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용아를 생각했다. 그가 성벽 위에 서서 노을을 바라보는 뒷모습. 그가 검을 휘두를 때 어깨 근육의 움직임. 그가 그녀를 부를 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그녀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손을 들어 가슴을 누르며 작게 중얼거렸다.
“신은 인간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데...”
하지만 그녀는 이미 인간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신의 규칙보다 훨씬 복잡했다.
다음 날 아침, 용아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서쪽 숲으로 향했다. 그는 멧돼지 발자국을 따라가던 중, 길가에서 이상한 꽃 한 송이를 발견했다. 그 꽃은 붉은 빛을 띠며, 신비로운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꽃을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릿속에 예전 신아 시절의 기억이 스쳤다. 신들은 경고했다. 인간의 감정에 빠지지 말라고, 특히 서로에게 집착하지 말라고.
그는 손을 거두고 꽃을 그대로 두었다.
그날 오후, 봉아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꽃을 보았다. 그녀는 꽃을 한참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꺾어 들었다.
“예쁘다.”
그녀는 꽃을 가슴에 품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그들은 다시 만났다. 용아는 봉아의 가슴에 있는 붉은 꽃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봉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용아, 나 오늘 꿈을 꿨어. 예전에 신아였을 때 꿈이었어. 하늘 높이 날아다니면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그 꿈. 그런데 왠지 그게 너무 멀게만 느껴졌어. 마치 다른 사람의 꿈인 것처럼.”
“그건 지난 일이야.”
“응, 알아. 그런데 가끔은 혼란스러워. 내가 지금 인간인지, 아니면 잠시 인간의 모습을 빌린 신인지.”
“너는 이제 인간이야. 나도 마찬가지고.”
용아의 말은 단호했다. 하지만 봉아는 그의 눈빛 속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읽었다. 그것은 확신이라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다짐에 가까웠다.
그날 밤, 그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잠시 후, 봉아는 다시 집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달빛 아래 서서 용아의 집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이 점점 인간의 감정에 물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감정의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았다.
그녀는 가슴에 품었던 붉은 꽃을 다시 꺼내어 보았다. 달빛에 꽃잎이 은은하게 빛났다. 그녀는 꽃잎을 살며시 만지며 중얼거렸다.
“나는 신이 아니야. 나는 인간이야. 그리고 인간은 사랑할 수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호했다.
그곳에서, 마을의 다른 구석에서 용아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벽에 기대어 앉아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귀에는 봉아의 목소리, 그녀의 웃음소리,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계속 맴돌았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나는 신아였어. 신아는 인간을 사랑할 수 없어.”
그가 되뇌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그 말을 믿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이미 인간이었고, 인간의 감정은 신의 명령보다 강했다.
세월은 계속 흘렀다. 그들은 여전히 마을에서 살면서 각자의 역할을 다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우정인지, 연민인지, 아니면 그 이상인지. 아직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봉아가 학교에서 가르치던 중 갑자기 아이 하나가 울기 시작했다.
“선생님, 엄마가 아파요. 선생님이 도와주세요.”
봉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의 집으로 함께 갔다. 아이의 어머니는 열이 났고, 상태가 좋지 않았다. 봉아는 당황했다. 그녀는 예전의 신력이라면 한순간에 고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결국 용아를 불렀다.
용아는 달려와서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는 약초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 있었고, 마을에 있는 약방에서 약을 지어 왔다. 그리고 며칠 동안 그 가족을 돌보았다. 그의 손길은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며칠 후, 아이의 어머니는 회복했다. 아이는 기뻐서 울었고, 봉아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녀는 용아가 약을 짓고 간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날 저녁, 그들은 마을 언덕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용아.”
“별것도 아닌데.”
“아니야. 너는 항상 그렇게 말하지만, 네가 해주는 모든 게 나에게는 소중해.”
봉아의 말에 용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봉아, 우리는 예전의 신아가 아니야. 우리는 인간이야.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쉬이 변하고, 고통도 크지. 그 점을 잊지 마.”
“알아. 하지만 나는 그 고통을 감당할 자신이 있어. 너라면 말이야.”
봉아의 말에 용아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그 속에는 용아만이 알 수 있는 깊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용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노을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붉게 물들었고, 그 색은 마치 그들 마음속에 흐르는 무언가를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나는 이미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랑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는 그 사실이 두려웠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너무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달이 떠오르고, 그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봉아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용아는 그녀의 손이 자신의 손에 닿을 듯 말 듯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의 손을 잡지 못했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너무 빠르다고, 아니면 그저 두려워서.
봉아는 그의 망설임을 느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옆에 계속 머물기로 결심했다. 언젠가 그가 마음을 열 때까지.
그날 밤, 그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용아는 잠들지 못하고 창밖의 달을 바라보았다. 봉아는 그날 꺾어 온 붉은 꽃을 베개 옆에 두고 잠이 들었다. 꽃잎은 이미 시들기 시작했지만, 그 색은 여전히 선명했다.
그리고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키워가면서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마음은 이미 너무도 커져서, 언젠가는 반드시 터져 나올 것이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그들은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의 운명은 예전의 신아와는 다른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