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숙 사장이 그날 사무실에서 보여준 계약서는 분명히 AV 출연에 관한 것이었다. 일본어로 빼곡히 적힌 조항들, 월월이 대충 훑어봤을 때 전형적인 배우 전속 계약처럼 보였다. 그녀는 아버지의 기업 변호사들 밑에서 몇 가지 계약서를 본 적이 있기에 이런 문서에는 익숙했다. 게다가 아제 감독이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건 그냥 형식일 뿐입니다. 일본 촬영팀이 요구하는 서류입니다. 한국에서 찍더라도 일본 쪽 규정을 따라야 하거든요.”라고 웃으며 덧붙였다.
월월은 아버지 회사의 VIP실처럼 꾸며진 이 방에서 아제가 내미는 펜을 받아들었다. 검은색 볼펜이었다. 손잡이 부분에 작게 ‘Eternity’라고 각인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 단어를 보며 잠시 망설였다. 뭔가 찜찜했다. 하지만 아제가 재촉했다.
“월월 씨, 촬영팀이 기다리고 있어요. 시간이 없어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월월은 계약서 맨 아래에 서명했다. 한글 이름과 한자 이름, 두 개를 모두 썼다. 아제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계약서가 그의 손에 들어가자, 그는 재빨리 서랍에 넣고 잠궜다.
“자, 이제 촬영장으로 가시죠.”
그가 말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월월은 일어서며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방 안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아까까지 화기애애했던 공기가 한순간에 차가워졌다. 문 밖에는 아까 없던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정장을 입고, 무표정했다. 그들이 월월을 보며 인사도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 이분들은?”
“보안요원입니다. 일본 본사에서 파견된 인력이에요. 월월 씨가 촬영장까지 안전하게 가실 수 있도록 도와줄 겁니다.”
월월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뭔가 잘못됐다. 이건 촬영장 가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감금 분위기였다. 그녀가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한 명의 보안요원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다른 보안요원이 그녀의 가방을 빼앗았다.
“무, 뭐 하시는 거예요?!”
월월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아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DSLR 카메라였다. 렌즈 캡을 벗기며 그가 말했다.
“월월 씨, 사실 오늘 촬영은 여기서 시작이에요. 방금 서명하신 계약, 다시 한 번 보여드리죠.”
그가 서랍에서 계약서를 꺼내 펼쳐 보였다. 아까는 일본어로 빼곡히 적혀 있던 문서였다. 그런데 이제는 맨 위에 ‘자발적 몸팔기 노예 계약서’라고 크게 적혀 있었다. 월월의 눈이 커졌다.
“이, 이건… 방금 전에 본 문서랑 달라요!”
“달라요? 똑같은 문서인데요. 월월 씨가 직접 서명하셨잖아요. 아니면 제가 강제로 서명시켰나요? 자발적으로 펜을 들어 서명하신 거 맞죠?”
아제가 웃으며 계약서를 카메라 앞에 들었다. 그리고 플래시를 터뜨리며 사진을 찍었다. 여러 장 찍었다. 월월이 서명한 부분을 클로즈업해서, 그녀의 얼굴과 함께, 계약서 전체를.
“이, 이거, 이거 사기예요! 신고할 거예요!”
“신고요? 무슨 죄로요? 자발적으로 서명한 계약인데. 게다가 여기 보세요, 17조. ‘계약자는 촬영 중 발생하는 모든 상황에 대해 사전 동의하며, 이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직접 보셨잖아요?”
월월은 말문이 막혔다. 분명 그녀는 일본어 계약서를 대충 봤다. 하지만 그 안에 이런 함정 조항이 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지금 아제가 보여주는 계약서는 아까 봤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서였다. 마치 잉크가 마법처럼 변한 것 같았다.
“자, 자, 이제 촬영 시작할게요. 월월 씨, 이 카메라를 똑바로 보세요. 오늘부터 당신은 더 이상 월월이 아닙니다. 당신은 제 물건입니다. 노예입니다. 알겠어요?”
아제가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보안요원들에게 손짓했다. 그들이 월월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발버둥쳤지만 소용없었다. 두 남자의 힘에 그녀는 속수무책이었다. 블라우스 단추가 튕겨 나가고, 치마가 허벅지까지 올라갔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울면 안 돼요. 웃어요. 아름다운 노예의 미소를 보여줘요.”
아제가 명령했다. 하지만 월월은 울고 있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가 울수록 아제는 더 신나게 찍었다.
“좋아, 좋아. 이 눈물 연기, 진짜 좋다. 시청자들이 엄청 좋아할 거야.”
한 시간 동안 촬영이 진행되었다. 월월은 속옷만 남은 상태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목에는 밧줄이 감겨 있었다. 발목도 마찬가지였다. 아제가 그녀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검은색 볼 재갈이었다. 침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더럽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은 반응하고 있었다. 젖고 있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오, 이거 봐. 몸은 솔직하구나.”
아제가 그녀의 다리 사이를 카메라로 비추며 웃었다. 월월은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제가 그녀의 턱을 잡고 강제로 카메라를 보게 했다.
“자, 이제 마무리 할게요.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해봐요.”
재갈이 풀렸다. 월월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제, 제발… 그만둬 주세요…”
“안 돼요. 오늘부터 당신은 제 노예예요. 이 계약서가 효력을 발휘하는 한, 당신은 내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해요. 알겠어요?”
아제가 계약서를 그녀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월월은 그 문서를 보며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적힌 것을 확인했다. 분명 그녀가 쓴 글씨였다. 그녀가 직접 서명한 것이었다.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촬영이 끝나고 보안요원들이 그녀를 데리고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거기에는 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 문이 열리자, 내부는 깜깜했다. 월월은 강제로 차에 태워졌다. 그녀의 가방과 핸드폰은 압수당한 상태였다.
“어,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노예 클럽이요. 당신의 새로운 집이에요.”
아제가 말하며 차문을 닫았다. 엔진 소리가 울렸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월월은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점점 멀어지는 도시의 불빛을 바라봤다. 그녀가 알던 세상, 그녀가 누리던 모든 것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차는 한 시간 정도 달렸다. 도심을 벗어나 외곽으로 갔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마침내 차가 한 건물 앞에 멈췄다. 낡은 공장 같았다. 벽에는 녹이 슬었고, 창문은 깨져 있었다.
“도착했어요. 내리세요.”
보안요원이 차문을 열며 말했다. 월월은 떨리는 다리로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발가벗겨진 채로 서 있었다. 속옷만 입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피부가 소름 끼쳤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안은 완전히 달랐다. 현대식 인테리어였다. 은은한 조명이 비치고, 고급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마치 고급 호텔 로비 같았다. 하지만 거기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전혀 고급스럽지 않았다. 한 중년 남성이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월월 양. 전 이 클럽의 매니저 리총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당신의 조련을 담당할 겁니다.”
리총이 인사하며 손을 내밀었다. 월월은 그 손을 잡지 않았다. 리총은 개의치 않고 웃었다.
“자, 먼저 기본 규칙을 알려드리죠. 이곳에서는 숫자로 불립니다. 당신은 7번입니다. 앞으로 7번으로 불릴 거예요. 과거의 이름, 과거의 신분, 모든 것은 잊어야 합니다. 여기서 당신은 단지 노예일 뿐입니다.”
리총이 그녀를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지나 여러 개의 문이 보였다. 문마다 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가 7번 문 앞에 멈췄다.
“여기가 당신의 방입니다. 앞으로 이 방에서 지내게 될 겁니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됩니다. 오늘은 푹 쉬세요.”
문이 열렸다. 방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침대, 책상, 옷장.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창문은 없었다. 콘크리트 벽뿐이었다. 월월은 그 방에 홀로 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감금당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 이건 불법이에요. 저를 여기서 내보내 주세요.”
그녀가 외쳤지만,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문을 두드렸다.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깨달았다. 그녀가 그 계약서에 서명한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 그녀는 더 이상 월월이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7번 노예였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깨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자존심, 자유,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대신, 그녀의 마음속에서 또 다른 무언가가 자라나고 있었다. 두려움과 굴욕 사이에서, 그녀는 알 수 없는 쾌락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부정하려 했지만, 그 감정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녀는 자신이 점점 타락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알았다. 그녀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