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대전이 끝났다. 하늘과 땅이 갈라지고, 신들의 피가 대지를 적셨으며, 수많은 신령들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후로 인간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대지를 일구고, 성을 쌓고, 문명을 발전시켜 나갔다. 신들은 점차 그들의 기억 속에서 신화가 되었다.
동방의 어느 작은 마을. 푸른 산과 맑은 물이 감싸고, 대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아늑한 곳이었다.
용아는 마을 입구의 고목나무 위에 앉아 멀리 보이는 논밭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버리지 못한 마지막 신력의 잔재였다. 그는 스스로 신력의 대부분을 버렸다. 너무 강한 힘은 인간 세계에 불균형을 초래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인간들 사이에 섞여 살고 싶었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그녀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을 서당에서 아이들의 낭랑한 낭송 소리가 들려왔다. 용아의 귀는 그 소리를 따라갔다.
"신와는 천지 사이에 깃들어, 만물의 이치를 다스리느니라..."
그 목소리였다. 부드럽고 온화하며, 오랜 세월의 지혜를 담은 그 목소리. 봉아였다.
용아는 고목나무에서 살짝 몸을 일으켰다. 그의 키는 인간의 젊은이보다 조금 더 컸고, 얼굴은 잘생기고 늠름했으며, 눈매는 깊고 날카로웠다. 신의 기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인간들 사이에서 그다지 튀지 않을 정도로 조절하고 있었다.
그는 몇 걸음 움직여 서당 쪽으로 다가갔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마을을 지키는 수호자라고 알고 있었다. 가끔씩 나타나 밤새 순찰을 돌고, 사나운 짐승을 물리치며, 병든 자에게 신비로운 생기를 불어넣기도 했다. 그들은 그를 신처럼 숭배하지는 않았지만, 깊이 존경했다.
서당의 창문 너머로 봉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푸른 두루마기를 입고, 손에는 대쪽 책을 들고 있었다. 검은 머리는 깔끔하게 묶었고, 얼굴에는 항상 온화한 미소가 떠 있었다. 아이들이 질문을 하면, 그는 참을성 있게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용아는 문득 예전의 그녀를 떠올렸다. 신계에서 빛나는 날개를 펴고, 천상의 음악을 울리며 대지를 품던 그 모습. 지금의 봉아는 그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용아는 지금의 그녀가 더 좋았다. 이렇게 평범하게 인간들 사이에 섞여, 서당의 선생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그때 봉아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용아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는 얼른 시선을 피해 몸을 돌렸다.
아직 때가 아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녀는 이제 인간 세계에 적응하고 있다. 내가 함부로 다가가면 그녀의 삶에 혼란을 줄 것이다.
용아는 발걸음을 돌려 마을 밖으로 나갔다. 저 멀리 산맥이 펼쳐져 있었다. 그 너머에는 아직도 어둠의 기운이 남아 있는 지역이 있었다. 그는 정기적으로 그곳을 순찰하며 광명의 힘으로 대지를 정화해야 했다. 그것이 그의 책임이었다.
봉아는 창밖으로 사라지는 용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어깨는 여전히 곧게 펴져 있었고, 걸음걸이는 굳건했다. 하지만 그가 돌아서는 순간, 눈빛에 스치는 그 무언가를 봉아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움. 그것은 마치 예전에 신계에 있을 때, 그가 전장으로 나갈 때마다 그녀에게 보내던 눈빛과 같았다.
"선생님, 왜 그렇게 창밖만 보세요?"
가장 앞자리에 앉은 여자아이가 물었다.
봉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직 어린 그들에게 신와와 인간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신이라는 존재가 실제로 이 세상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란다. 자, 우리 계속하자."
그는 다시 책을 펼쳤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교실 밖으로 날아가, 저 멀리 산맥을 넘어 용아를 따라가고 있었다.
세월은 흘렀다. 마을의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반복했다. 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었고, 그들의 아이들이 다시 서당에 들어왔다.
용아의 얼굴에도 서서히 인간의 감정이 깃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표정했던 그의 표정이 점차 부드러워졌고,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잔치 때면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신와였을 때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어느 날, 용아가 밤새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동이 틀 무렵, 그는 서당 앞에 멈춰 섰다. 봉아가 벌써 일어나 서당 마당을 쓸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군요."
용아가 말을 걸었다.
봉아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옷자락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고, 눈가에는 약간의 피로가 어려 있었다.
"밤새 순찰 다녀오셨군요."
"네. 오늘은 북쪽 숲까지 다녀왔습니다. 요즘 밤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더군요."
봉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는 빗자루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어둠의 기운입니까?"
"아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의주시해야 합니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아침 공기가 그들 사이를 맴돌았다.
"식사라도 하시겠습니까?"
봉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용아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 달랐다.
"네, 기꺼이."
그들은 서당 옆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봉아가 부엌에서 간단한 죽과 나물을 내왔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용아는 천천히 숟가락을 움직였다. 이렇게 그녀가 차린 음식을 먹는 것은 처음이었다.
"맛이 좋군요."
"다행입니다."
봉아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볼끝이 살짝 붉어졌다. 용아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 한편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이 마을에 온 지도 꽤 되었군요."
"네, 벌써 몇 해가 지났습니다."
"적응은 잘 되십니까?"
봉아가 물었다.
용아는 죽을 한 숟갈 더 뜨며 대답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지금은 이곳이 편안합니다. 특히 서당에서 아이들이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 그 모든 것이 평화롭게 느껴집니다."
그 말에 봉아가 살짝 미소 지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신계의 화려함보다, 이곳의 소박한 일상이 더 좋습니다."
용아는 그 미소를 보며 문득 묻고 싶은 말이 생겼다. 예전 신계에서 함께했던 그 시절, 그녀는 어떤 기분으로 신력의 일부를 버리기로 결심했는지. 하지만 그는 그 질문을 삼켰다. 아직 때가 아니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 마을에 계실 겁니까?"
대신 그는 그렇게 물었다.
봉아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네. 이곳이 제 집입니다."
그 말에 용아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도 그렇다. 이제 더 이상 신계로 돌아갈 수 없다. 이곳이 그의 새로운 터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그녀가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날 이후, 용아는 순찰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서당에 들러 봉아와 인사를 나누었다. 때로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함께 차를 마시기도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말로 표현되지 않은 어떤 관계가 천천히 싹트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흐를수록 그들의 존재를 잠식해 갔다. 봉아의 몸에 서서히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처음에는 가벼운 피로감과 어지러움. 그리고 어느 날 밤, 그는 자신의 다리가 사라지고 황금빛 비늘로 덮인 뱀의 꼬리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충격과 공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어둡고 위험한 기운을 느꼈다. 그것은 마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저주와도 같은 힘이었다. 신력의 대부분을 버렸지만, 그가 한때 신와였기에 그 힘은 그의 몸속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지금, 어둠에 의해 왜곡되어 가고 있었다.
봉아는 이를 숨기기로 결심했다. 용아에게 알리면 그가 걱정할 것이고, 어쩌면 그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었다. 그는 낮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이 되면 자신의 변화된 모습과 싸우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어둠이 그의 몸을 집어삼키려 할 때마다, 그는 용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따뜻했던 눈빛, 소박했던 대화, 함께 마신 차의 향기. 그것들만이 그를 지탱해 주는 유일한 빛이었다.
하지만 그 빛도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의 내면에서 어둠이 조금씩, 조금씩 힘을 키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