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신와 음락기: 신와 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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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대전이 끝났다. 하늘과 땅이 갈라지고, 신들의 피가 대지를 적셨으며, 수많은 신령들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후로 인간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대지를 일구고, 성을 쌓고, 문명을 발전시켜 나갔다. 신들은 점차 그들의 기억 속에서 신화가 되었다. 동방의 어느 작은 마을. 푸른 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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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후

선악의 대전이 끝났다. 하늘과 땅이 갈라지고, 신들의 피가 대지를 적셨으며, 수많은 신령들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후로 인간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대지를 일구고, 성을 쌓고, 문명을 발전시켜 나갔다. 신들은 점차 그들의 기억 속에서 신화가 되었다.

동방의 어느 작은 마을. 푸른 산과 맑은 물이 감싸고, 대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아늑한 곳이었다.

용아는 마을 입구의 고목나무 위에 앉아 멀리 보이는 논밭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버리지 못한 마지막 신력의 잔재였다. 그는 스스로 신력의 대부분을 버렸다. 너무 강한 힘은 인간 세계에 불균형을 초래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인간들 사이에 섞여 살고 싶었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그녀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을 서당에서 아이들의 낭랑한 낭송 소리가 들려왔다. 용아의 귀는 그 소리를 따라갔다.

"신와는 천지 사이에 깃들어, 만물의 이치를 다스리느니라..."

그 목소리였다. 부드럽고 온화하며, 오랜 세월의 지혜를 담은 그 목소리. 봉아였다.

용아는 고목나무에서 살짝 몸을 일으켰다. 그의 키는 인간의 젊은이보다 조금 더 컸고, 얼굴은 잘생기고 늠름했으며, 눈매는 깊고 날카로웠다. 신의 기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인간들 사이에서 그다지 튀지 않을 정도로 조절하고 있었다.

그는 몇 걸음 움직여 서당 쪽으로 다가갔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마을을 지키는 수호자라고 알고 있었다. 가끔씩 나타나 밤새 순찰을 돌고, 사나운 짐승을 물리치며, 병든 자에게 신비로운 생기를 불어넣기도 했다. 그들은 그를 신처럼 숭배하지는 않았지만, 깊이 존경했다.

서당의 창문 너머로 봉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푸른 두루마기를 입고, 손에는 대쪽 책을 들고 있었다. 검은 머리는 깔끔하게 묶었고, 얼굴에는 항상 온화한 미소가 떠 있었다. 아이들이 질문을 하면, 그는 참을성 있게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용아는 문득 예전의 그녀를 떠올렸다. 신계에서 빛나는 날개를 펴고, 천상의 음악을 울리며 대지를 품던 그 모습. 지금의 봉아는 그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용아는 지금의 그녀가 더 좋았다. 이렇게 평범하게 인간들 사이에 섞여, 서당의 선생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그때 봉아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용아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는 얼른 시선을 피해 몸을 돌렸다.

아직 때가 아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녀는 이제 인간 세계에 적응하고 있다. 내가 함부로 다가가면 그녀의 삶에 혼란을 줄 것이다.

용아는 발걸음을 돌려 마을 밖으로 나갔다. 저 멀리 산맥이 펼쳐져 있었다. 그 너머에는 아직도 어둠의 기운이 남아 있는 지역이 있었다. 그는 정기적으로 그곳을 순찰하며 광명의 힘으로 대지를 정화해야 했다. 그것이 그의 책임이었다.

봉아는 창밖으로 사라지는 용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어깨는 여전히 곧게 펴져 있었고, 걸음걸이는 굳건했다. 하지만 그가 돌아서는 순간, 눈빛에 스치는 그 무언가를 봉아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움. 그것은 마치 예전에 신계에 있을 때, 그가 전장으로 나갈 때마다 그녀에게 보내던 눈빛과 같았다.

"선생님, 왜 그렇게 창밖만 보세요?"

가장 앞자리에 앉은 여자아이가 물었다.

봉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직 어린 그들에게 신와와 인간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신이라는 존재가 실제로 이 세상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란다. 자, 우리 계속하자."

그는 다시 책을 펼쳤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교실 밖으로 날아가, 저 멀리 산맥을 넘어 용아를 따라가고 있었다.

세월은 흘렀다. 마을의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반복했다. 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었고, 그들의 아이들이 다시 서당에 들어왔다.

용아의 얼굴에도 서서히 인간의 감정이 깃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표정했던 그의 표정이 점차 부드러워졌고,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잔치 때면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신와였을 때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어느 날, 용아가 밤새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동이 틀 무렵, 그는 서당 앞에 멈춰 섰다. 봉아가 벌써 일어나 서당 마당을 쓸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군요."

용아가 말을 걸었다.

봉아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옷자락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고, 눈가에는 약간의 피로가 어려 있었다.

"밤새 순찰 다녀오셨군요."

"네. 오늘은 북쪽 숲까지 다녀왔습니다. 요즘 밤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더군요."

봉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는 빗자루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어둠의 기운입니까?"

"아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의주시해야 합니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아침 공기가 그들 사이를 맴돌았다.

"식사라도 하시겠습니까?"

봉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용아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 달랐다.

"네, 기꺼이."

그들은 서당 옆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봉아가 부엌에서 간단한 죽과 나물을 내왔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용아는 천천히 숟가락을 움직였다. 이렇게 그녀가 차린 음식을 먹는 것은 처음이었다.

"맛이 좋군요."

"다행입니다."

봉아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볼끝이 살짝 붉어졌다. 용아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 한편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이 마을에 온 지도 꽤 되었군요."

"네, 벌써 몇 해가 지났습니다."

"적응은 잘 되십니까?"

봉아가 물었다.

용아는 죽을 한 숟갈 더 뜨며 대답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지금은 이곳이 편안합니다. 특히 서당에서 아이들이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 그 모든 것이 평화롭게 느껴집니다."

그 말에 봉아가 살짝 미소 지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신계의 화려함보다, 이곳의 소박한 일상이 더 좋습니다."

용아는 그 미소를 보며 문득 묻고 싶은 말이 생겼다. 예전 신계에서 함께했던 그 시절, 그녀는 어떤 기분으로 신력의 일부를 버리기로 결심했는지. 하지만 그는 그 질문을 삼켰다. 아직 때가 아니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 마을에 계실 겁니까?"

대신 그는 그렇게 물었다.

봉아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네. 이곳이 제 집입니다."

그 말에 용아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도 그렇다. 이제 더 이상 신계로 돌아갈 수 없다. 이곳이 그의 새로운 터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그녀가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날 이후, 용아는 순찰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서당에 들러 봉아와 인사를 나누었다. 때로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함께 차를 마시기도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말로 표현되지 않은 어떤 관계가 천천히 싹트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흐를수록 그들의 존재를 잠식해 갔다. 봉아의 몸에 서서히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처음에는 가벼운 피로감과 어지러움. 그리고 어느 날 밤, 그는 자신의 다리가 사라지고 황금빛 비늘로 덮인 뱀의 꼬리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충격과 공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어둡고 위험한 기운을 느꼈다. 그것은 마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저주와도 같은 힘이었다. 신력의 대부분을 버렸지만, 그가 한때 신와였기에 그 힘은 그의 몸속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지금, 어둠에 의해 왜곡되어 가고 있었다.

봉아는 이를 숨기기로 결심했다. 용아에게 알리면 그가 걱정할 것이고, 어쩌면 그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었다. 그는 낮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이 되면 자신의 변화된 모습과 싸우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어둠이 그의 몸을 집어삼키려 할 때마다, 그는 용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따뜻했던 눈빛, 소박했던 대화, 함께 마신 차의 향기. 그것들만이 그를 지탱해 주는 유일한 빛이었다.

하지만 그 빛도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의 내면에서 어둠이 조금씩, 조금씩 힘을 키우고 있었다.

성장과 연정

세월은 마을을 스쳐 지나갔고, 그 사이 용아와 봉아도 어느덧 성인이 되었다.

용아는 더욱 잘생기고 늠름해졌다. 넓은 어깨와 탄탄한 가슴,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피부는 그가 매일 대지를 순찰하며 마을을 지키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강철처럼 단단했지만, 더 이상 예전의 냉랭함만은 아니었다. 그 아래에는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깃들어 있었다.

봉아는 마을 여인들 사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숙녀로 손꼽혔다. 가냘픈 허리와 우아한 걸음걸이, 고운 손끝에는 항상 먹물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지혜와 온화함을 나누었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다. 그녀의 발 아래 감춰진 비밀을. 밤이 되면 그녀의 하반신은 황금 비단뱀의 꼬리로 변하고,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며 천외의 운석이 심어 놓은 욕망에 몸부림친다는 것을.

봉아는 용아를 볼 때마다 가슴 한켠이 저렸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마을 어귀에 서서 먼 산을 바라보거나, 논둑을 따라 걸으며 농부들과 이야기하거나, 혹은 우물가에서 물을 길며 투박하지만 힘 있는 손으로 물동이를 들어 올렸다. 그럴 때마다 봉아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감정을 감추곤 했다. 신와라는 신분, 그것이 그녀를 짓누르는 무거운 사슬이었다. 그녀는 이미 신력을 버렸지만, 과거의 기억은 여전히 그녀의 피 속에 흐르고 있었다. 용아 또한 같은 신와였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된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경멸일까, 연민일까. 봉아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어느 봄날, 산기슭에 진달래가 만개했다. 봉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물을 캐러 나갔다. 길을 가다가 그녀는 무심코 용아가 앉아 있는 바위를 바라보았다. 용아는 그곳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봉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다. 오랜 세월 동안 그녀가 억눌러 온 감정이, 그가 자신에게 건네는 무심한 미소 하나하나에, 비 오는 날 자신의 집 지붕을 고쳐 주던 그의 뒷모습에,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다. 나는 그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나는 이미 타락했다.

용아도 그날 이후로 봉아를 볼 때마다 무언가 다른 것을 느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이 서당 문을 닫을 때, 그녀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 웃는 소리, 저녁놀 아래 그녀의 실루엣.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마을의 수호자다. 내 임무는 순찰이다. 그러나 밤이 깊어 별이 뜨면, 그는 문득문득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생각에 스스로 화가 났다.

마을은 두 사람의 수호 아래 평화로웠다. 봄이면 씨를 뿌리고, 여름이면 논두렁에서 아이들이 뛰놀았다. 가을이면 황금빛 벼 이삭이 물결치고, 겨울이면 마을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불을 쬐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용아는 마을을 순찰하며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봉아는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이 모든 것의 일부가 되었다.

어느 날, 용아가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봉아의 서당 앞을 지나게 되었다. 아이들은 이미 집으로 돌아갔고, 서당 안에는 봉아 혼자 남아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용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문가에 섰다.

“봉아, 오늘도 수고가 많다.”

봉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녀의 눈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용아님도 수고하셨습니다. 마을이 평화로워 다행입니다.”

“네가 있기에 마을 아이들이 글을 배울 수 있다.”

“용아님이 계시기에 마을이 안전합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가 공기 중에 떠올랐다. 하지만 봉아는 고개를 숙여 책상을 정리하는 시늉을 했다. 용아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그의 발걸음이 멀어질 때, 봉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끝이 떨렸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책상 모서리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녀의 속에서는 또 다른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어둠의 힘이 그녀의 내면에서 낮고 음흉한 속삭임을 퍼부었다. *그를 가져라. 너는 이미 타락했다. 그도 너의 것이 되어야 마땅하다.*

봉아는 이를 악물었다. 안 돼. 나는 그를 더럽힐 수 없어.

그날 밤, 달이 구름 뒤에 숨었다. 봉아는 홀로 방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하반신은 이미 황금 비단뱀 꼬리로 변해 있었다. 비늘은 달빛에 반짝였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는 저주가 숨어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과 싸웠다. 그녀가 기억하는 용아의 얼굴, 그의 강직한 눈빛,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지탱해 주었다. 나는 그를 지켜야 한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이 마을을, 그를 지키겠다.

다음 날 아침, 봉아는 평소처럼 서당 문을 열었다.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용아가 서당 앞을 지나갈 때, 봉아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용아도 그녀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 평범한 일상 속에, 그들의 애정은 숨겨져 있었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침묵을 깨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그들의 운명인 것처럼.

하늘에서 온 손님

땅이 울렸다. 깊고 낮은 포효가 지면을 타고 전해져 왔고, 용아는 즉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손가락이 허리춤의 검자루를 스쳤다. 저녁놀이 물든 하늘은 아직 선명했지만, 마을 서쪽 숲 너머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예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바람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신와의 피가 아직 남아 있는 한, 이 마을의 위험을 감지하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숲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공기는 무거워졌고,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기운이 그의 피부를 찌르듯 아팠다. 이상한 냄새가 났다. 타는 듯하면서도 썩은 듯한, 마치 오래된 무덤을 열었을 때 풍기는 그런 냄새였다.

드디어 도착했다. 숲속 공터 한복판이 움푹 패여 있었다. 그가 본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구덩이 속에서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투명한 운석이 박혀 있었다. 운석은 빛을 반사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변의 모든 광선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표면은 매끄러웠지만, 안쪽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형체가 희미하게 비쳤다.

용아는 천천히 다가갔다. 운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그가 아는 어떤 마력과도 달랐다. 낯설고, 음험하며, 동시에 지독하게 집착하는 듯한 힘이었다. 이건... 신와의 세계에서 온 것도, 인간의 세계에서 생겨난 것도 아니었다.

운석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미세한 균열이 표면을 타고 퍼져나가더니, 순간 폭발하듯 산산조각났다. 투명했던 조각들은 공중에서 녹아내리며 끈적한 액체로 변했고, 그 액체는 땅에 떨어지자마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라색 빛을 띤 끈적한 덩어리가 꿈틀거리며 다발을 이루었다. 끝부분에서 검은색 가시가 돋아났고, 그 가시들은 마치 눈이 있는 듯 주변을 살폈다.

용아는 검을 뽑았다. "무슨 요괴냐?"

대답은 없었다. 대신 촉수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솟구쳤다. 용아는 몸을 낮추며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검날이 첫 번째 촉수를 베어냈지만, 잘린 단면에서 곧바로 새로운 촉수가 돋아나 더 거세게 덤벼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촉수들은 바닥을 타고 번식하기 시작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어 공터 전체를 뒤덮었다.

"젠장!"

용아는 뒤로 물러서며 상황을 판단했다. 이건 단순한 마물이 아니었다. 이 촉수들은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재생하고 증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 움직임에는 일종의 지성이 느껴졌다. 단순한 본능이 아니라, 무언가를 목적으로 한 움직임이었다.

촉수들은 공터를 넘어 숲속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무를 감고, 바위를 덮고,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용아가 검으로 몇 개를 더 베어냈지만, 그것은 빗물에 바위를 막는 격이었다. 촉수들은 끊임없이 솟아나와 구덩이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검은 안개가 짙어지며 하늘을 가렸고, 마치 거대한 돔이 그 자리를 덮는 듯했다.

용아는 이곳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촉수들의 성장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을 쪽으로 뻗어 나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발을 돌려 숲을 빠져나갔다. 등 뒤에서는 촉수들이 자라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나무가 부러지고, 땅이 갈라지는 소리. 그리고 그 모든 소음을 덮는, 낮고 깊은 웅웅거림.

그가 숲 가장자리에 도착했을 때,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더 이상 숲이 아니었다. 검은 촉수들이 하늘을 찌르며 솟아올라 마치 살아있는 성벽처럼 구덩이를 감싸고 있었다. 구덩이는 이미 마굴로 변해 있었다. 그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주인 없는 마력이 형체를 갖추기 시작하고 있었다.

용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마굴을 막지 않으면, 마을은 위험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신와의 힘을 대부분 버린 지금, 그는 평범한 인간보다 강할 뿐이었다. 이 마굴을 봉인하려면 더 큰 힘이 필요했다.

그의 마음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봉아. 그녀라면 무언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예전에 신와였을 때 읽었던 고서들, 그중에 이 이상한 마력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용아는 마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뒤로, 마굴은 계속해서 자라났다. 검은 촉수들이 하늘을 덮고, 그 끝에서 보라색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그 액체가 닿은 땅에서는 또다시 작은 촉수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마굴은 살아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굶주리고 있었다.

홀로 탐사

햇살이 온화하게 내리쬐는 마을 광장. 봉아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피어난 작은 꽃들이 아이들의 환호를 자아냈다.

"선생님, 또 해주세요!"

"와, 정말 예뻐요!"

봉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붉은색, 노란색, 보라색 꽃잎이 공중에서 춤을 췄다.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그 순간이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섬뜩한 기운. 봉아의 손이 멈췄다. 꽃잎들이 허공에 떠 있는 채로 굳어버렸다.

"선생님?"

"왜 그러세요?"

아이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봉아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잠시만, 모두 교실로 돌아가 있어라."

아이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교실로 들어갔다. 봉아는 고개를 들어 북쪽 하늘을 응시했다. 저 멀리, 산 너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하늘을 더럽히고 있었다.

"이건..."

봉아의 눈동자가 좁혀졌다. 평범한 요마의 기운이 아니었다. 더 깊고, 더 어둡고, 더 위험한 힘. 그녀가 한때 신와로서 감지하던 그런 종류의 악의였다.

"용아는 오늘 서쪽 숲을 순찰 중이셨지..."

봉아가 이를 악물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 저 기운이 마을까지 퍼지기 전에 근원을 차단해야 한다.

그녀는 교실을 한 번 돌아보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그녀의 결심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잠시 다녀오마."

봉아는 몸을 휘감아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바람이 그녀의 옷자락을 스쳤다. 한때 인간의 몸으로 살아가던 시절보다 훨씬 가벼운 몸놀림. 신와였던 기억이 그녀의 움직임을 인도했다.

숲을 지나고, 작은 언덕을 넘어섰다. 어둠의 기운이 점점 짙어졌다. 공기 중에 떠도는 마력이 피부를 찌르는 듯했다.

"저건..."

봉아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 땅이 갈라져 있고, 그 틈새에서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는 무언가 꿈틀거리는 형체들이 스쳤다. 마치 지옥의 아가리가 벌어진 듯한 광경이었다.

봉아는 천천히 땅에 내려섰다. 발끝이 닿은 순간, 땅에서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었다.

"마굴... 그것도 상당한 규모군."

그녀는 신중하게 주변을 살폈다. 마굴의 입구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는 아니었다. 더 오래되고, 더 어두운 존재의 목소리.

"저 안에 들어가야 하나..."

봉아의 마음이 갈등했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면 이 악의는 반드시 마을을 집어삼킬 것이다. 용아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다.

"나는 한때 신와였다. 이 정도 마굴쯤이야..."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굴 입구로 다가갔다. 발밑에서 돌들이 굴러떨어졌다. 그 소리가 마치 경고처럼 메아리쳤다.

어둠이 그녀를 감쌌다. 시야가 좁아지고, 귀를 막는 정적. 하지만 봉아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손끝에서 은은한 빛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한때 그녀가 지녔던 신력의 잔재였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봉아는 바닥에 새겨진 이상한 문양들을 발견했다. 그것은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며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문양을 조사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순간이었다.

발밑의 땅이 갑자기 꺼졌다.

"뭐?!"

봉아의 몸이 허공을 가르며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날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천장에서 뻗어 나온 수많은 촉수들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런!"

봉아는 손을 휘둘러 촉수들을 베어내려 했다. 하지만 촉수들은 끝이 없었다. 베어내자마자 다시 자라나고, 더 많은 촉수들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검고, 미끄럽고, 차가운 촉수들이 그녀의 팔과 다리를 휘감았다. 봉아는 몸부림쳤지만, 촉수들은 점점 더 강하게 그녀를 조여왔다.

"놓아라!"

봉아의 외침이 마굴 안에서 메아리쳤다. 하지만 촉수들은 오히려 더 거세게 그녀를 감쌌다. 그녀의 허리를, 가슴을, 목을 감아왔다. 숨이 막혀왔다.

그 순간, 봉아의 몸에서 이상한 열기가 치솟았다. 그것은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변화였다. 그녀의 하반신이 점점 무거워지고,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무...무슨...?"

봉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다리가 서로 붙어가고 있었다. 피부가 갈라지고, 그 틈새에서 반짝이는 금빛 비늘이 나타났다.

"이럴 수가..."

그녀의 다리가 하나의 거대한 뱀 꼬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황금빛 비단뱀 꼬리. 그것은 마치 오래전부터 그녀의 몸 안에 잠들어 있던 본모습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봉아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경악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변화가 가져다주는 이상한 쾌감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본능이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촉수들은 그녀의 변화를 감지한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후, 더욱 거세게 그녀를 조여왔다. 이번에는 그녀를 감싸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몸 속으로 파고들려는 듯이.

"아악!"

봉아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 고통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영혼 깊은 곳을 할퀴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어둠이 그녀의 몸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녀의 의지가 흐려지고, 본능이 깨어나고 있었다. 그 본능은 그녀에게 속삭였다.

'받아들여라... 이 힘을... 이 어둠을...'

봉아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마굴의 마력이 그녀의 몸 속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의 신와였던 기억이, 인간이었던 기억이,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그녀의 눈앞에 용아의 얼굴이 스쳤다.

"용아..."

그 이름을 속삭이는 것이 그녀가 인간으로서 마지막으로 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어둠이 그녀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마굴 개조

마굴의 어둠 속에서 촉수들이 꿈틀거렸다. 봉아의 몸을 감싼 촉수 끝에 박힌 가시들이 그녀의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 차갑고 끈적한 무언가가 상처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두 세계의 어둠이 혼합된 독액이었다.

“아악!”

봉아의 비명이 마굴 벽면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독액이 혈관을 타고 퍼져나갈 때마다 몸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의 힘이 그녀의 하체에서 이상한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무슨... 무슨 일이...”

봉아의 목소리는 떨렸다. 허리 아래로 감각이 사라지더니 이내 뜨거운 무언가가 뼈를 녹이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그녀의 다리가 비틀리며 변형되기 시작했다. 피부가 갈라지고 그 틈새로 반짝이는 비늘이 돋아났다.

“그만... 제발 그만...”

봉아는 몸부림쳤지만, 촉수들은 더욱 강하게 그녀를 조여왔다. 마성의 힘이 그녀의 정신을 서서히 잠식해갔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지만, 차츰 그 힘이 주는 쾌감에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비늘이 허벅지부터 종아리까지 번져나갔다. 그녀의 두 다리가 하나로 합쳐지며 황금빛 비단뱀의 꼬리로 변모했다. 길고 당당한 뱀 꼬리가 마굴 바닥에 늘어져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이게... 내 몸이라고?”

봉아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낯선 힘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성에 물든 얼굴에는 여전히 고통이 서려 있었지만, 그 사이로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그녀의 귀가 뾰족하게 변하며 얼굴 윤곽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눈을 감았다 뜨자 동공이 수직으로 가느다랗게 변했고,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입술은 더욕 붉어지고 볼에는 요염한 홍조가 떠올랐다.

“이게... 내가 원하던 힘인가...”

봉아의 목소리는 더 이상 전과 같지 않았다. 낮고 매혹적인 음색으로 변해 마굴의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의 긴 꼬리가 바위 틈을 스치며 요염하게 움직였다.

촉수들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구속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새로운 몸을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감싸며 만족스러운 움직임을 보였다. 봉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마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용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강직하고 올곧은 눈빛, 그리고 그가 항상 감추고 있던 그리움. 봉아의 가슴 한켠이 아려왔지만, 이내 마성의 힘이 그 감정을 집어삼켰다.

“용아... 너는 언제나 나를 외면했지.”

봉아의 목소리에는 씁쓸함과 애수가 섞여 있었다. 그녀의 꼬리가 바위를 휘감으며 힘을 발휘했다. 단단한 바위가 부서져 내렸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

그녀의 눈동자에 위험한 빛이 스쳤다. 마성은 그녀의 마음을 더욱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더 이상 선생님도, 마을의 수호자도 아니었다. 오직 갈증만이 그녀를 지배했다.

봉아의 혀가 입술을 핥았다. 마른 목을 적셔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따뜻하고 힘찬, 남성의 정액이 그녀의 갈증을 해소해줄 것이었다.

“이제 누구를... 내 제물로 삼을까...”

그녀의 음성은 마굴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며, 마치 뱀의 속삭임처럼 길고 매혹적으로 울려 퍼졌다. 황금빛 세로동공이 어둠 속에서 반짝이며, 새로운 포식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라미아의 자태

그날 밤, 마을 어귀의 버드나무 숲에는 보랏빛 안개가 자욱했다. 봉아는 서당 문 앞에 서서 손에 든 등불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몇 주째 계속된 이질감이 오늘 밤 마침내 극에 달했다. 허벅지 아래로 스며드는 시리고 간지러운 느낌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봉아는 간신히 걸음을 옮겨 방 안으로 들어갔다. 등불을 책상 위에 내려놓자 손가락이 떨렸다. 치마자락을 걷어 올리자 다리 피부에 금빛 비늘 같은 것이 반짝이고 있었다. 깜짝 놀라 손을 떼자마자, 하반신 전체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찢어질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아아아악!"

봉아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치맛속에서 다리가 풀리고 뭉개지는 형체를 느꼈다. 옷감이 찢어지며 불룩 솟아오르는 근육 덩어리, 피부를 뚫고 자라나는 비늘. 순간적으로 뱀의 형상이 확연히 드러났다. 치마가 완전히 찢겨 나가고, 굵고 긴 황금색 비단뱀 꼬리가 방바닥을 휘감았다. 꼬리의 지름은 어른 팔뚝만 했으며, 비늘 사이사이로 흰 무늬가 나선형으로 감겨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금줄처럼 반짝였다.

봉아는 숨을 헐떡이며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꼬리의 감촉이 낯설었다. 비늘은 매끄러우면서도 단단했고, 꼬리 끝은 가늘게 말려 있었다. 그녀는 다리 대신 뱀의 하체로 느껴지는 촉각에 어지러움을 참았다. 배꼽 아래쪽, 비늘과 인간 피부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부분에서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배 아래로 시선을 돌리자, 복부 중앙에 복잡한 무늬의 음문이 드러났다. 보랏빛 점액이 스며 나오며 뱀 모양의 선명한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음문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열리고 닫혔다. 봉아는 그 광경에 소스라치게 놀라 손으로 가리려 했지만, 손바닥에 닿는 촉감은 끈적하고 뜨거웠다.

"이게... 무슨..."

봉아의 입술이 연보라색으로 물들었다. 혀로 핥자 달콤하면서도 자극적인 맛이 퍼졌다. 동시에 가슴이 격하게 부풀어 올랐다. 옷깃 사이로 젖가슴이 터져 나올 듯 커지며, 유두가 검붉게 변해 돌기처럼 솟아올랐다. 봉아는 두 손으로 가슴을 감쌌지만, 그마저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방 안에 어둠의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봉아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마원이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녀의 봉원은 이미 완전히 변질되어 있었다. 한때 신성한 힘의 근원이었던 그곳은 이제 뱀 계열 마물 특유의 음란하고 탐욕스러운 마원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봉아는 그 감각에 몸을 떨었다. 내장 깊숙이서 꿈틀거리는 욕망이 뇌리를 스쳤다. 그것은 남성의 정액에 대한 갈망이었다. 배고픔이 아니라 중독성 있는 갈증이었다.

봉아는 네 발로 기어 꼬리를 질질 끌며 벽 쪽으로 다가갔다. 거울 너머로 비친 자신의 모습에 숨이 막혔다. 상반신은 인간 여인의 아름다움을 간직했지만, 하반신은 완전히 황금 비단뱀이었다. 긴 머리는 어깨 너머로 흘러내렸고, 연보랏빛 입술이 스치는 숨결은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눈동자는 세로로 길쭉하게 변해 뱀의 눈처럼 반짝였다.

"용아... 용아..."

봉아는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입안에 고인 침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용아의 정액을 상상하자 하체의 음문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꼬리가 바닥을 스치며 긴장한 듯 꿈틀거렸다. 봉아는 자신의 타락을 자각하면서도 그 감각을 거부할 수 없었다. 마성은 그녀의 이성을 무너뜨리고 본능을 지배하고 있었다.

"봉아... 뭐... 무슨 일이야?"

문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용아였다. 그는 순찰 도중 요마의 기운을 느끼고 곧바로 달려온 것이다. 봉아는 몸을 숨기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용아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래, 용아. 드디어 보았구나."

봉아의 목소리는 낮고 음탕하게 울렸다. 그녀는 꼬리를 휘감으며 용아 쪽으로 기어갔다. 비늘이 바닥에 스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이것이 나의 진짜 모습이야. 나는 더 이상 서당 선생님이 아니야. 나는 이제... 너의 정액을 갈망하는 라미아야."

용아는 칼을 뽑아 들었지만, 손이 떨렸다. 봉아의 눈동자에 비친 그리움과 애처로움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봉아... 정신을 차려. 내가 널 구할게."

"구한다고? 나는 더 이상 구원받을 수 없어. 나는 이미 타락했어. 너의 정액으로만 살아갈 수 있어. 너를 사랑하는 마음조차도, 이제는 너를 잡아먹고 싶은 욕망으로 변했어."

봉아의 꼬리가 용아의 발목을 감쌌다. 용아는 몸을 움츠렸지만, 꼬리의 힘은 엄청났다. 봉아가 그의 몸을 끌어당겼다. 입술이 용아의 귀에 닿았다.

"나를 거부할 수 없을 거야, 용아. 나는 너의 옛 연인이야. 너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는 존재야. 나를 포용해. 그럼 나는 너를 절대 놓지 않을 거야."

용아는 눈을 감았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 봉아에 대한 깊은 애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칼을 놓았다.

"봉아...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봉아의 입술에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는 인간의 온기를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에는 마성의 빛이 어렸다. 그녀는 용아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럼, 이제부터 영원히 함께하자."

타락의 첫 각성

깊은 어둠이 깔린 마굴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처음에는 작은 진동에 불과했다. 땅을 타고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이 마굴 입구에 쌓인 돌무더기를 흔들었다. 그러다 점차 그 진동은 규칙적인 움직임으로 바뀌었고, 이내 무언가가 마굴 깊은 곳에서부터 기어 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늘이 바위에 스치는 찌르르한 마찰음이 동굴 벽면에 울려 퍼졌다.

그 형체는 마침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십여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뱀의 몸뚱이가 마굴 입구를 가득 메웠다. 비늘 한 조각 한 조각이 금빛으로 반짝이며, 그 위에는 어둠의 기운이 띠처럼 감돌고 있었다. 뱀의 상반신은 여전히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하반신은 완전히 황금 비단뱀의 꼬리로 변해 있었다. 허리 아래로 이어진 비늘은 촘촘하고 매끄러웠으며, 꼬리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면서도 강력한 힘을 감추고 있었다.

봉아였다. 아니, 더 이상 예전의 봉아는 아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본래의 맑고 온화한 빛을 잃고, 어둠과 욕망이 뒤섞인 혼탁한 광채를 띠고 있었다.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그 미소는 한때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따뜻한 미소가 아니었다. 차갑고, 탐욕스럽고,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짐승의 미소였다.

"아..."

그녀가 입을 열자, 가느다란 신음 섞인 숨결이 새어 나왔다. 혀끝이 입술을 스쳤다. 거칠고 뜨거운 숨결이 입가에서 뿜어져 나왔다. 목 안은 바짝 말라 있었다. 갈증이었다. 어떤 갈증인지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정액에 대한 갈증이었다.

마성이 그녀의 몸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봉와의 의식은 깊은 수렁 속에 잠겨 있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본래 자아가 발버둥 치고 있었다.

*안 돼... 이런 모습이 아니야...*

내면에서 외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마성은 달콤한 속삭임으로 그녀의 저항을 무너뜨렸다.

*편안해져라. 이제 너는 자유다. 신와로서의 굴레도, 인간으로서의 제약도 없다. 너의 본능을 따르라.*

그 속삭임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녀의 의식을 휘감았다. 봉와의 저항이 약해질 때마다 마성은 더 강력하게 그녀를 사로잡았다.

*기억해라, 너는 더 이상 인간도 신와도 아니다. 너는 이제 라미아다. 타락한 존재다. 그리고 타락한 존재는 타락의 기쁨을 누릴 자격이 있다.*

봉와는 몸을 꿈틀거리며 마굴 밖으로 완전히 기어 나왔다. 긴 꼬리가 바위 위를 미끄러지며 지나갔다. 차가운 바위의 촉감이 비늘을 타고 전해져 올랐지만, 그녀는 더 이상 차가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 안에 있는 마성이 모든 감각을 뜨겁게 달궈 놓고 있었다.

밤하늘이 그녀를 반겼다. 마굴 위로 펼쳐진 하늘에는 별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 별빛마저도 그녀의 눈에는 먹잇감을 찾는 데 방해가 되는 잡음에 불과했다. 그녀의 후각과 청각은 인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바람을 타고 전해져 오는 냄새들. 흙 냄새, 풀 냄새, 그리고 멀리서 풍겨 오는 생명체의 체취. 그중에서도 특히 남성의 냄새가 그녀의 감각을 자극했다. 땀 냄새, 피 냄새, 그리고 그 아래에 감춰진 더 진한 정액의 냄새가 그녀의 콧속을 파고들었다.

"아... 아..."

봉와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반신이 불안정하게 꿈틀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더 이상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마성이 그녀의 신경을 조종하고 있었다. 그녀는 단지 그 조종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저항하지 마라. 저항할수록 더 고통스러울 뿐이다.*

마성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조금 더 부드러웠다. 마치 사랑하는 이를 달래는 어조처럼.

*너는 이미 우리의 일부가 되었다. 너의 몸은 이미 그것을 원하고 있다. 느껴라. 네 하반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너의 비늘이 어떻게 빛나는지. 너는 이제 완벽하다. 완벽한 사냥꾼이다.*

봉와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마을 쪽을 향하고 있었다. 저 멀리, 마을의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남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그녀의 먹잇감이었다.

*그래, 바로 그곳이다. 네가 원하는 것이 있다.*

봉와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이번에는 더 확신에 찬 미소였다. 그녀의 혀가 입술을 핥았다. 침이 고이는 것이 느껴졌다. 목마름이 더 심해졌다.

그녀는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긴 뱀 꼬리가 바위와 흙 위를 미끄러졌다. 움직임은 부드럽고도 힘있었다. 그녀는 마굴 주변을 천천히 배회하기 시작했다. 사냥감을 찾는 짐승처럼.

처음에는 마굴 근처의 숲속을 탐색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았다. 작은 동물들이 그녀의 기척을 느끼고 도망갔지만, 그녀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더 강력한 생명력, 더 진한 정액을 가진 존재였다.

인간. 그중에서도 젊고 힘 있는 남성.

그녀의 꼬리가 나뭇잎 사이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사냥的本能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마성이 그녀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었다.

*기다려라. 곧 기회가 올 것이다.*

그녀는 마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야영지를 발견했다. 아마도 사냥꾼들이 잠시 쉬기 위해 마련한 임시 숙소인 듯했다. 불이 꺼져 있었고, 텐트 안에서는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봉와는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설렘과 갈망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손끝이 떨렸다.

*조심스럽게... 놀라게 하지 마라...*

봉와의 꼬리가 텐트 가장자리에 닿았다. 그 순간, 그녀의 본래 의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만둬! 이건 미친 짓이야!*

봉와의 목소리가 내면에서 울려 퍼졌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인간을 덮치려 하고 있었다. 예전에 그녀가 보호하고 가르치던 그 인간들을.

*너는 서당 선생님이었잖아! 너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마을 사람들을 도왔잖아! 지금 네가 하려는 짓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봉와의 몸이 잠시 멈췄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두 의식이 충돌했다. 한쪽은 타락과 욕망에 물들어 있었고, 다른 한쪽은 절망과 공포로 떨고 있었다.

*나는... 나는 이러면 안 돼...*

하지만 마성은 그녀의 저항을 비웃었다.

*안 돼? 왜 안 돼? 너는 이제 무엇을 위해 살겠느냐? 신와로서의 사명도, 인간으로서의 의무도 이미 버리지 않았느냐. 너는 이제 자유로워졌다. 자유롭게 네 욕망을 따를 자유가 생겼다. 그게 네가 진정 원하는 것이 아니었느냐?*

*아니야! 그건... 그건 네가 내 마음속에 심은 거짓말이야!*

*거짓말? 그럼 왜 네 몸은 떨리고 있느냐? 왜 네 입에서는 침이 고이느냐? 왜 네 가슴은 이렇게 두근거리느냐?*

마성의 말은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 말들은 모두 사실이었다. 봉와의 몸은 이미 배반하고 있었다. 그녀의 본래 의식이 아무리 저항해도, 몸은 마성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텐트 안에서 남자가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봉와의 귀가 그 소리를 포착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긴 꼬리가 텐트 입구를 조용히 열었다.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의 숨결은 고르고 평화로웠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봉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에서 맥박이 뛰는 것이 보였다. 생명력이 그녀를 유혹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녀의 얼굴이 그의 얼굴에 가까워졌다.

그녀의 입술이 그의 목에 닿았다. 그리고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의 체취, 그의 땀 냄새, 그리고 그 아래에 감춰진 그녀가 원하는 그 냄새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음..."

봉와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몸이 열기로 가득 찼다. 그녀의 꼬리가 불안정하게 꿈틀거렸다.

*이제 시작이다.*

마성의 목소리가 승리감에 차서 울려 퍼졌다. 봉와의 본래 의식은 깊은 절망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녀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마성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타락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용와의 귀환

용아는 손에 든 창을 어깨에 걸쳐 메고, 마을 외곽의 숲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한낮의 태양이 나뭇잎 사이로 쏟아져 내려 그의 검은 머리카락에 반짝였다. 순찰로는 특별한 이상이 없었다. 동쪽 산기슭에서 멧돼지 한 마리가 지나간 흔적을 발견했을 뿐, 위협이 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 익숙한 나무 담장과 지붕들이 보여 작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람 한 줄기가 그의 뺨을 스치며 불어왔다. 그 바람 속에는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그의 신와로서의 감각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마기였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운이 마을 위로 새까만 실처럼 뻗어 올라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결코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어둠이었다.

용아의 숨이 가빠졌다. 그는 창을 단단히 쥐고 마을을 향해 속력을 냈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마기가 짙어졌다. 그 중심엔 분명히 한 존재가 있었다. 그는 봉아가 새겨진 오래된 나무 조각을 가슴께에서 꺼내어 확인했다. 그 조각에 깃든 기운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전에는 따뜻하고 온화했지만, 지금은 차갑고 미끈거리며, 마치 뱀의 비늘 같은 느낌이었다.

“봉…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떨림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봉아의 서당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길을 따라 움직일수록,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지고 나무들은 기울어져 가로막는 듯했다. 그가 마을 중앙 광장에 다다랐을 때, 앞길이 막혔다.

마을 주민들이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들의 눈은 흐릿하고 창백했으며, 입가에는 쓸데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들은 걸음걸이도 불안정하게 비틀거리며, 마치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어이, 뭐 하는 짓이냐!”

용아가 소리쳤지만, 그들은 대답 대신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한 남자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용아는 재빨리 몸을 돌려 그의 손목을 잡고 살짝 밀어냈다. 남자는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용아 님… 우리를… 받아 주세요…”

또 다른 여인이 속삭였다. 그 목소리에는 마력이 실려 있었다. 용아의 귀에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봉아가 어디 있느냐! 네 이놈들, 정신을 차려라!”

그러나 주민들은 대답 대신 일제히 그를 에워쌌다. 그들의 손에는 낫이나 괭이가 들려 있었고, 눈빛은 흐릿하지만 위협적이었다. 용아는 창을 휘둘러 그들의 무기를 쳐내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창날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바람이 울부짖었지만,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네 이놈들, 봉아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그는 분노에 차서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이 한 주민의 턱을 스치자 그가 나가떨어졌다. 용아는 그를 부축해 바닥에 눕히고, 다시 주변을 경계했다. 열 명도 넘는 주민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 모두에게서 똑같은 낯선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분명 봉아의 힘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타락한 형태라니, 용아의 가슴이 짓눌리는 듯했다.

그는 신력을 깨워 몸을 가볍게 하고, 주민들 사이를 미끄러지듯 통과했다. 한 명 한 명을 쓰러뜨리기보다는 그들의 움직임을 빼앗기 위해 손목과 발목을 정확히 찔렀다. 그의 창은 정밀하게 움직였고, 주민들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마지막 주민이 쓰러진 뒤, 용아는 숨을 헐떡이며 주위를 살폈다. 마기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서당 쪽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피로와 분노를 억누르며 고개를 들어 마굴로 변해버린 서당의 지붕을 바라보았다.

“반드시 찾겠다. 봉아, 무슨 일이 있어도 널 구해내마.”

그의 목소리에는 굳은 결의가 담겨 있었다. 그는 창을 다시 어깨에 메고, 쓰러진 주민들을 한 번 더 돌아본 후 마굴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로, 어둠이 깔린 마을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