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과 악의 대전이 끝난 지 이미 천 년이 흘렀다. 그날의 하늘은 피처럼 붉게 물들었고, 대지는 무수한 신과 마물의 시체로 뒤덮였다. 최후의 광명이 어둠을 물리치는 순간, 신들은 하나둘 잠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존재인 동방의 신동은 남은 신력을 스스로 포기하고 인간의 몸과 융합하기로 선택했다.
용와는 그 결정의 순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신력이 빠져나갈 때 몸이 타는 듯한 고통이 있었지만, 동시에 전에 없던 자유로움을 느꼈다. 인간의 피부, 인간의 심장, 인간의 숨결. 모든 것이 낯설면서도 신선했다. 그의 곁에는 항상 봉와가 있었다. 그녀도 같은 선택을 했다. 신녀에서 인간 여교사로, 그 변화는 그녀의 눈동자에 온기와 부드러움을 더해주었다.
마을은 작았다. 울창한 숲속에 자리 잡은 이곳은 대전의 참화를 피해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용와는 매일 동이 틀 무렵이면 마을을 한 바퀴 돈다. 더 이상 신력이 가득 차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몸속에 남아 있는 광명의 힘으로 대지를 순찰한다. 발밑의 흙에서 올라오는 온기,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이슬, 멀리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 이런 것들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했다.
“용와 님, 오늘은 좀 이르시네요.”
마을 입구에서 쌀가마니를 나르던 장년이 인사를 건넸다. 용와는 손을 들어 가볍게 답례했다.
“밭에 벌레가 끼었다는 소식을 들었소. 확인하려고 왔네.”
“아, 그거라면 걱정 마십시오. 어제 봉와 님이 오셔서 약초를 뿌려 주셨습니다. 벌써 많이 줄었어요.”
봉와.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용와의 가슴 한쪽이 은근히 울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학교는 마을 한가운데에 있었다. 작은 나무 건물이었지만,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문 앞에 서니 안에서 봉와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드럽고 명료한 음색이었다. 그녀는 글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용와는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귀를 기울였다.
“자, 이 글자는 ‘사랑’을 뜻하는 ‘애’입니다. 마음이 담겨 있지요.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이 있나요?”
“저요! 엄마를 사랑해요!”
“저는 아빠요!”
“저는…… 봉와 선생님을 사랑해요!”
아이들의 순수한 대답에 봉와가 살짝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용와의 귀에 오래도록 맴돌았다.
그날 오후, 학교 수업이 끝나고 용와는 봉와와 함께 마을을 걸었다. 두 사람은 좁은 길을 나란히 걸으며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았다. 다만 어깨가 스칠 듯 말 듯한 거리,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의 팔목을 스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요즘 마을에 이상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아요.”
봉와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용와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오?”
“글쎄요…… 밤하늘의 별빛이 예전 같지 않아요. 마치 무언가가 별빛을 삼키는 듯한 느낌이랄까.”
용와는 그녀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녀는 신녀로서의 감각이 남아 있었다. 예전의 힘은 대부분 잃었지만, 본능만큼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내일부터 더 세심히 살펴보겠소.”
“저도 함께할게요.”
“아니, 교사로서의 임무가 있지 않소.”
“아이들은 오후에는 공부하지 않아요. 그 시간에 저도 도울 수 있어요.”
용와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예전 신녀이던 시절의 그 빛이었다.
며칠 후, 한밤중이었다. 용와는 잠에서 깨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유난히 밝은 별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곧 그 별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커지며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운석이었다.
용와는 몸을 일으켜 재빨리 옷을 챙겨 입었다. 운석이 떨어진 방향은 마을에서 서쪽으로 한참 떨어진 숲속이었다. 그는 거침없이 그쪽으로 달려갔다.
숲속에 도착했을 때, 땅은 깊게 패여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투명한 돌덩이가 놓여 있었다. 보통의 운석과는 달랐다. 그 안에는 검은 기운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용와는 손을 내밀어 가까이 다가가려다가 멈칫했다. 그 돌에서는 이계의 마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력은 예전 대전 때 남은 어둠의 힘과 뒤섞여 더욱 강력해져 있었다.
“이건……”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봉와였다. 그녀는 잠옷 위에 겉옷을 걸친 채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운석이 떨어졌다고 해서…… 이게 뭐죠?”
“모르겠소. 하지만 위험한 기운이 느껴지오.”
봉와는 운석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내밀었다. 용와가 말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의 손끝이 돌에 닿는 순간, 운석 안의 검은 기운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리고 봉와의 손을 타고 그 기운이 흘러들어갔다.
“봉와!”
용와가 그녀를 붙잡아 뒤로 끌어당겼다. 봉와는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눈동자는 이상하게 빛나고 있었다.
“괜찮아요…… 이것은……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무슨 소리요?”
“이 힘은…… 과거의 어둠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섞여 있어요. 마치…… 저를 부르는 것 같아요.”
용와는 그녀의 말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봉와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런 위험한 것에 가까이 가지 마시오. 내가 이 돌을 처리하겠소.”
하지만 봉와는 그의 품에서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용와, 이 힘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는 이미 신이 아니에요. 우리는 인간이에요. 때로는 어둠도 받아들여야 해요.”
그 말에 용와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더 꼭 감쌀 뿐이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운석 앞에 서서 새벽이 올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투명한 돌 안에서는 검은 기운이 계속해서 춤추고 있었고, 그 주위로는 작은 생명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개미, 지렁이, 나비. 그들은 마치 운석이 내뿜는 마력에 이끌리듯 가까이 다가왔다.
용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긴 밤이 끝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정한 밤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