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째 날 아침, 엄철가는 축사 바닥에서 잠에서 깼다. 어두운 천장, 발 밑에 깔린 건초, 그리고 온몸에 배어 있는 말 냄새. 이제는 이 모든 것이 낯설지 않았다.
그녀는 일어나 몸을 털었다. 어젯밤 저스틴이 가르쳐 준 동작이 아직도 몸에 배어 있었다. 네 발로 서서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 물을 마시는 법. 처음에는 너무나 부끄러웠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조차 사라져 가고 있었다.
줄리가 축사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손에 건초 한 줌을 들고 있었다.
“일어났구나. 잘 잤어?”
엄철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점점 어색해지고 있었다. 말을 하려면 인간의 언어를 떠올려야 했는데, 그 과정이 점점 더디게 느껴졌다.
줄리가 그녀 앞에 건초를 내려놓았다. “먹어. 오늘도 훈련이 있어.”
엄철가는 망설였다. 하지만 저스틴의 채찍이 생각났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건초를 입으로 가져갔다. 씹으면서도 이게 자신의 입인지, 말의 주둥이인지 분간이 안 갔다.
“좋아. 그게 맞는 행동이야.”
줄리가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은 다정했지만, 엄철가는 그 속에 숨겨진 명령을 읽을 수 있었다. ‘계속 암말로 있어라. 순종해라.’
아침 훈련은 더 가혹해졌다.
저스틴이 그녀를 목장의 넓은 공터로 데리고 갔다. 땅에는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낮은 울타리, 좁은 통로, 그리고 인공 웅덩이.
“오늘은 점핑 훈련이다.”
저스틴이 채찍을 휘둘렀다. 엄철가는 본능적으로 네 발로 땅을 디뎠다. 달리기 시작하자 바람이 귀를 스쳤다. 첫 번째 장애물 앞에서 그녀는 몸을 솟구쳤다. 울타리를 넘는 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착지가 불안정했다. 그녀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다시!”
저스틴의 목소리가 채찍 소리와 함께 날아왔다. 엄철가는 벌떡 일어나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두 번째 장애물, 세 번째 장애물. 넘어지고, 일어나고, 또 넘어졌다.
그녀의 무릎과 손바닥은 까져 피가 흘렀지만, 저스틴은 멈추지 않았다.
“더 빨리! 더 강하게!”
정오가 지나서야 훈련이 끝났다. 엄철가는 땅에 쓰러져 숨을 헐떡였다. 인간의 몸으로 버티기엔 너무 가혹한 훈련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저 명령에 따를 뿐이었다.
점심시간, 줄리가 가져온 음식은 다시 건초와 여물이었다. 엄철가가 약간의 거부감을 보이자, 줄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맛이 없어?”
“아니... 아니야.”
엄철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여 먹기 시작했다. 씹을수록 건초의 거친 질감이 혀를 찔렀지만, 그 고통조차 점점 무뎌지고 있었다.
“참 잘했어. 넌 이제 내가 바라던 바로 그 암말이 되어 가고 있어.”
줄리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엄철가는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칭찬을 받았다는 기쁨이 밀려왔다.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암말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오후 훈련은 더욱 잔혹해졌다.
저스틴이 목장의 다른 수말들을 불러 모았다. 거대한 체구의 숫말들이 엄철가 주위를 맴돌았다. 그들의 숨결이 거칠게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오늘은 네가 진짜 암말임을 증명할 시간이다.”
저스틴이 채찍을 들어 그녀의 엉덩이를 쳤다. “가서 그들과 교미해라.”
엄철가의 몸이 굳어졌다. 인간의 의식이 마지막으로 반항했다. 하지만 그 반항은 오래가지 않았다. 저스틴의 채찍이 다시 내리쳤고, 그녀의 몸은 이미 훈련된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수말이 다가왔다. 그 거대한 체구 앞에서 엄철가는 작은 말처럼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본능이 가르친 자세였다.
수말이 그녀 위로 올라탔다. 무게가 그녀를 짓눌렀다. 고통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지만, 그녀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입에서는 인간의 언어 대신 말의 울음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하나, 둘, 셋.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수말들이 번갈아 가며 그녀를 차지했다. 그녀의 의식은 점점 흐릿해졌고, 마지막에 남은 것은 순수한 신체적 반응뿐이었다.
훈련이 끝났을 때, 엄철가는 축사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지만, 그녀는 왜 아픈지조차 잊고 있었다. 그저 암말이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줄리가 그녀 옆에 앉았다. “오늘 정말 수고했어. 넌 훌륭한 암말이야.”
엄철가는 고개를 들어 줄리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더 이상 반항심이 없었다. 대신 충성심과 의존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네가 시키는 대로 할게.”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흔적조차 사라져 있었다.
저녁, 줄리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계약을 기억해? 네가 나를 도와 심사를 통과하기로 한 거.”
엄철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 의미는 이미 퇴색되어 있었다. 그저 줄리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그런데 계약은 한 달이야. 아직 15일이 남았어. 그러니까 계속 암말로 있어야 해.”
엄철가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15일이 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명령에 따르면 된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밤이 깊어졌다. 엄철가는 축사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공간 속에서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암말이다. 나는 줄리의 암말이다.’
그 생각은 더 이상 괴롭지 않았다.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인간으로서의 복잡한 감정에서 해방된 기분이었다.
다음 날 아침, 저스틴이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훈련이 더욱 체계적이었다. 점핑, 질주, 그리고 다른 말들과의 교감 훈련. 엄철가는 모든 것을 거부 없이 받아들였다.
그녀의 걸음걸이가 변했다. 팔과 다리의 움직임이 점점 말의 보행과 닮아갔다. 고개를 숙이는 각도, 꼬리의 흔들림, 심지어 눈동자의 움직임까지. 모든 것이 암말의 그것과 일치하기 시작했다.
점심시간, 줄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오늘 오후에 특별 훈련이 있어. 네가 완전한 암말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줄 거야.”
엄철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줄리가 시키는 대로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후, 저스틴이 그녀를 목장의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에는 거울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다. 엄철가는 그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음 본 건 네 발로 서 있는 자신이었다. 등은 굽어 있었고, 고개는 숙여져 있었다. 더 이상 인간의 자세가 아니었다.
“이게 너의 진짜 모습이야.”
저스틴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거울 속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 눈빛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말의 눈, 순종과 충성만이 담긴 눈.
“이제 너는 암말이다. 그걸 인정해.”
엄철가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이게 나야. 나는 암말이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암말입니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마지막 인간의 조각이 부서졌다. 그녀는 완전히 암말이 되었다.
줄리가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참 잘했어. 이제 넌 진짜 내 암말이야.”
엄철가는 줄리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녀의 마음은 평온했다. 더 이상 고민도, 후회도 없었다. 그저 줄리의 암말로 살아가면 된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그날 밤, 엄철가는 축사에서 잠을 청했다. 그녀는 네 발을 접고 몸을 웅크렸다. 말들이 자는 자세였다. 그녀의 입에서는 고요한 숨소리만 새어 나왔다.
꿈을 꾸었다. 그녀는 넓은 목장을 달리고 있었다. 바람이 갈기를 스치고, 발밑의 흙이 튀었다. 그곳에는 인간의 고통도, 슬픔도 없었다. 오직 자유로움만이 있었다.
하지만 그 자유로움은 암말로서의 자유였다. 인간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길들여진 결과였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엄철가는 더 이상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대로 암말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열여섯째 날은 이렇게 끝났다. 그리고 아직 열다섯 날이 더 남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줄리가 일찍 찾아왔다.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와.”
엄철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손님?”
“응. 내가 네 훈련 상태를 평가해 달라고 부른 사람이야.”
줄리의 말에 엄철가는 긴장했다. 평가라는 말이 왠지 불안했다. 하지만 그 불안도 곧 사라졌다. ‘나는 암말이니까.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손님은 정오쯤 도착했다. 나이 지긋한 남자였다. 그는 엄철가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훌륭하군요. 이정도 훈련된 암말은 처음 봅니다.”
줄리가 자랑스러운 듯 웃었다. “제가 직접 훈련시켰어요.”
손님이 엄철가에게 다가와 몸을 살폈다. 그 손길이 그녀의 등을 타고 내려갔다. 엄철가는 그 Touch를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다.
“움직여 보게.”
엄철가는 저스틴이 가르친 대로 움직였다. 네 발로 질주하고, 장애물을 넘고, 멈추고. 모든 동작이 완벽했다.
손님이 박수를 쳤다. “대단하군요. 이 암말은 경매에 내놓아도 좋을 정도입니다.”
줄리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이 암말은 제 겁니다. 절대 팔지 않아요.”
엄철가는 그 말에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버림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녀는 줄리에게 다가가 얼굴을 비볐다.
줄리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아. 이제 갈 시간이야.”
손님이 떠난 후, 저스틴이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더 가혹했다. 채찍이 그녀의 등을 갈겼지만, 그녀는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그날 저녁, 엄철가는 인간의 언어를 거의 잊어버렸다. 그녀의 입에서는 대부분 말의 울음소리가 나왔다. 몇몇 단어만 간신히 기억할 뿐이었다.
“줄... 리...”
그녀가 간신히 내뱉은 말에 줄리가 웃었다. “참 잘했어.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야.”
엄철가는 기쁘게 꼬리를 흔들었다.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암말로서의 삶이 편안했다.
밤이 깊어지자, 저스틴이 그녀를 다른 말들과 함께 두었다. 그녀는 수말들과 어울리며 밤을 보냈다. 그들의 거친 숨결과 몸짓이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열일곱째 날 아침, 엄철가는 완전히 암말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네 발로 일어나 건초를 먹고, 줄리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인간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누성이라는 이름, 무도 종사라는 직업, 유학 생활. 모든 것이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녀는 오직 줄리의 암말로만 존재했다.
줄리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넌 완벽한 암말이야. 내가 바라던 바로 그 모습이야.”
엄철가는 줄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인간의 빛이 없었다. 오직 암말의 충성심만이 반짝이고 있었다.
계약은 아직 열흘 이상 남아 있었다. 하지만 엄철가는 더 이상 날짜를 세지 않았다. 시간은 그저 흘러갈 뿐,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줄리의 명령뿐이었다.
그녀는 암말로 타락했다. 그리고 그 타락이 오히려 그녀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