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바람과 소년

站点:NovelAI.one内容:前8章在线试读ID:58305602更新:2026-07-26 08:40
공항에 도착했을 때, 늦여름의 저녁 바람이 살갗에 닿는 감촉이 낯설었다. 유리창 너머로 스며드는 붉은 노을이 활주로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승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출구 앞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임일은 캐리어 손잡이를 꼭 쥔 채, 무심한 눈빛으로 저 멀리 마중 나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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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의 첫 만남

공항에 도착했을 때, 늦여름의 저녁 바람이 살갗에 닿는 감촉이 낯설었다. 유리창 너머로 스며드는 붉은 노을이 활주로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승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출구 앞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임일은 캐리어 손잡이를 꼭 쥔 채, 무심한 눈빛으로 저 멀리 마중 나온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십 년. 영국에서 보낸 시간이 이렇게 한순간에 멀어지다니. 공기마저 다르게 느껴졌다. 습하고, 묘하게 달콘한 냄새가 섞인 바람이 그의 짧은 머리칼을 살랑거리게 했다. 아버지는 사업 때문에 바쁘다며 직접 나오지 못했고, 대신 새어머니가 나오기로 했다고 했다. 전화로 짤막하게 “네 새엄마야. 소만청이라고 해.”라고만 알려줬을 뿐이다. 기대 반, 낯섦 반. 그는 목을 가다듬고 사람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저쪽, 출구 난간 옆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진청색 원피스를 입고, 어깨에는 얇은 크림색 가디건을 걸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른손에는 조그만 핸드백을 들고, 왼손은 자연스럽게 난간 위에 얹은 채였다. 자세가 곧고, 시선은 차분하게 출구 쪽을 향해 있었다.

임일의 발걸음이 순간 멎었다. 그 사람일까? 심장이 조금 느리게 뛰다가, 이내 속도를 높였다. 저 사람이 정말 내 새어머니란 말인가. 광고판이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그런 우아함이 아니라, 좀 더 현실적이면서도 묘한 중력 같은 것이 그 여인에게서 느껴졌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이었지만, 확실한 건 성숙한 여인의 기품이 온몸에 배어 있다는 점이었다.

소만청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젊은 남자를 알아보자마자 표정을 살짝 풀었다. 사진으로 미리 얼굴을 본 적이 있긴 했지만, 실물은 한층 더 훤칠했다. 키가 크고, 체격은 수척하지 않으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운동으로 다져진 느낌이었다. 얼굴 윤곽은 아버지를 닮아 뚜렷했지만, 눈매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닮은 듯 부드러웠다. 그 부드러움 속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건, 나중에 천천히 알게 될 사실이었다.

“임일이죠?”

소만청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마치 깊은 밤에 잔잔히 퍼지는 첼로 음색처럼. 그녀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정중한, 그러나 선을 넘지 않는 미소였다.

“네. 소만청… 어머니세요?”

임일이 대답했다. ‘어머니’라는 호칭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익숙지 않았다. 어색하게 굳은 입술 사이로 나온 소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하지만 소만청은 개의치 않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비행에 힘들었겠다. 짐은 이게 전부야?”

“네. 간단하게 챙겼어요.”

사실 캐리어 하나와 등에 멘 배낭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십 년의 시간이 눌러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꺼낼 사이도 없이, 소만청은 몸을 돌려 앞장서 걸었다. 신발 굽이 대리석 바닥에 닿는 소리가 또각또각 규칙적이었다.

임일은 그 뒷모습을 보며 잠시 멈칫했다. 진청색 원피스가 엉덩이와 허리 라인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가디건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는 놀라울 정도로 가냘프면서도 단단해 보였다. 성숙한 여성 특유의 향이 스쳤다. 은은한 비누 향인지, 향수인지 구분되지 않는 냄새. 순간 숨을 들이켜자 폐 깊숙이 무언가 달라붙는 기분이었다. 가슴께가 묘하게 저렸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 둘은 나란히 섰지만, 거리는 약간 떨어져 있었다. 벽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이 낯설었다. 스물도 안 된 소년과, 기품 있는 중년 여인. 거울에 잡힌 소만청의 옆모습은 퍽 진지했다. 얇게 화장한 얼굴, 곧게 뻗은 콧날, 입술 끝에 살짝 맺힌 주름. 젊지 않은 나이인데도 피부는 투명한 듯했고, 눈가에 깃든 약간의 피곤함이 오히려 분위기를 깊게 만들었다.

임일은 그 모습을 곁눈질로 훔쳐보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떤 여성에게 느껴보는 미묘한 설렘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런 감정은 이상했다. 예의에 어긋난다는 걸 알면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가 시선을 느꼈는지, 살짝 그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순간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피곤해 보이네. 집에 가면 좀 쉬어.”

소만청이 건조하게 말했다. 눈빛은 차분했지만, 어떤 벽이 느껴졌다. 아직은 서로를 탐색하는 수준이다. 아들이라고 부르기도, 아줌마라고 부르기에도 어정쩡한 관계. 임일은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괜찮아요.”

차는 예상했던 대로 조용한 세단이었다. 소만청이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가죽 시트에 앉자 은은한 방향제 냄새가 났다. 창밖 풍경은 낯선 도시의 불빛으로 점점 물들고 있었다. 도로를 따라 줄지어 선 가로등들이 주황색 빛을 차 안으로 던졌다.

“대학 입학 준비는 다 됐니?”

소만청이 핸들을 잡은 채 물었다. 눈은 여전히 전방을 향했다.

“네. 서류는 다 제출했고, 기숙사도 신청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처음 한 학기만 집에서 통학하라고 하셨어요.”

“그래. 네 아버지가 그렇게 하라셨구나.”

소만청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임일의 아버지가 하는 결정에 일일이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다만 주어진 상황을 차분히 받아들이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임일은 그 말투 속에서 묘한 거리를 느꼈다.

“어머니는… 몇 살이세요?”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스스로도 무례하다고 느꼈는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니, 젊어 보이셔서요.” 소만청은 짧게 웃었다. 실소에 가까운 웃음.

“서른일곱이다.”

임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열아홉 살 차이. 예상했지만 직접 듣고 나니, 머릿속에서 뭔가 이상하게 계산되는 느낌이었다. 보통 어머니와 아들의 나이 차이. 하지만 이 여인을 보고 있으면 ‘어머니’라는 말조차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그는 살며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유리 너머로 스치는 도시의 불빛이 리듬감 있게 반짝였다.

“꽤 많이 차이 나네요.”

혼잣말인지, 질문인지 모를 말을 흘리자, 소만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기어를 변속하며 조용히 속도를 높였을 뿐이다. 그러나 임일의 마음속에서는 호기심이 불쑥 자라나고 있었다. 이 여자는 어떤 사람인가. 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아버지와 결혼했을까. 그 질문들이 입술을 간질였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차가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이윽고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 앞에 차가 멈췄다. 이층 구조의 현대식 집이었는데, 창마다 따듯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버지의 취향이 반영된 듯 군더더기 없는 건물이었다.

“도착했다. 짐은 내가 도와줄게.”

소만청이 시동을 끄며 말했다. 임일은 재빨리 차에서 내려 스스로 캐리어를 내리겠다고 손을 내저었다. 그런 그의 손동작을 잠시 바라보던 소만청은, 이윽고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현관문을 향해 걸어갔다. 정원의 작은 잔디밭 사이로 풀내음이 섞인 저녁 바람이 불어왔다. 임일은 그 바람을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이상한 긴장감을 느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아버지 임종석이 마주 나왔다. 중년의 사업가다운 단정한 셔츠 차림이었고, 얼굴에는 반가움과 약간의 피곤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임일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무사히 왔구나. 멀리서 고생했다. 얼른 들어와라.”

아버지의 두터운 손길이 낯설기도, 반갑기도 했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기에, 아버지와의 사이에도 알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그래도 그는 진심으로 아들을 반기는 듯했다.

거실을 지나 식당으로 안내받자, 이미 상에는 음식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된장찌개에서 풍겨오는 구수한 냄새, 갓 지은 밥의 김이 모락모락 올랐다. 나물 반찬들과 생선구이, 전 몇 장이 보기 좋게 놓여 있었다. 분명 소만청이 직접 준비했을 것이다. 그녀가 앞치마를 풀며 주방에서 마지막 반찬을 내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많이 먹어. 오랜만에 집 밥이지?”

소만청이 살짝 미소 지으며 말을 건넸다. 여전히 그녀의 미소에는 따듯함이 있으면서도,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어떤 벽이 있었다. 임일은 자리에 앉으면서도 계속 그녀를 관찰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손짓, 수저를 나란히 놓는 세심함, 아버지에게 반찬을 권할 때의 낮은 목소리. 모든 동작이 절제되고 우아했다. 나이는 분명 자기보다 훨씬 많은데, 왜 이렇게 눈길이 계속 갈까.

“영국 생활은 어땠어? 혼자 지내느라 고생 많았겠다.”

아버지가 젓가락으로 생선 살을 발라내며 물었다. 임일은 짧게 “괜찮았어요.”라고 답하고 국을 한 숟갈 떴다. 사실 고생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지금 꺼내고 싶진 않았다.

소만청은 자신의 밥을 조금씩 뜨면서도, 두 부자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끼어들지 않았다. 그게 그녀의 방식이었다. 적당한 거리 유지. 방해하지 않음. 하지만 바로 그 태도 때문에 임일은 더욱 의식하게 됐다. 밥을 먹는 동안 몇 번이고 그녀를 바라봤다.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는 손끝, 야채를 집을 때의 손목 각도, 이따금 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는 동작. 미세한 장면들이 뇌리에 새겨졌다.

“밥 입에 맞니? 입맛에 안 맞으면 따로 해줄까?”

소만청이 불쑥 물었다. 임일이 자꾸 자신을 쳐다보자, 그 시선을 단순히 낯선 음식에 대한 탐색으로 해석한 듯했다. 임일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주 맛있어요. 정말로.”

진심이었다. 영국에서 먹던 음식과는 비교도 안 되게 정갈하고 깊은 맛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혀는 맛을 느끼기보다는 다른 감각에 집중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식사를 마칠 때쯤 아버지는 핸드폰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회사에서 연락이 온 모양이었다.

“미안하다. 급히 처리할 일이 생겼어. 만청 씨, 아들 방 좀 봐줘요. 나중에 내려올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소만청은 “알겠습니다.”라고 짧게 답했다. 그리고 다시 임일을 향해 말했다.

“방은 이층이야. 내가 안내할게. 짐 가지고 따라와.”

임일은 캐리어를 끌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뒷모습. 원피스 자락이 발목께에서 살랑거렸다. 이 집은 너무 조용했다. 아버지의 서재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복도엔 두 사람의 발소리만 남았다.

방은 생각보다 넓고 깔끔했다. 햇빛이 잘 드는 창문, 책상과 침대, 벽을 따라 붙박이장이 있었다. 소만청은 문 앞에 서서 방 안을 한 번 훑어보고 말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수건은 저쪽 찬장에 있고, 이불은 얇은 것과 두꺼운 것 둘 다 준비해뒀어.”

“감사합니다, 어머니.”

임일은 의식적으로 존칭을 붙였다. ‘어머니’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자 또다시 묘한 불편함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소만청은 그 말에 아주 작게 고개를 까딱였을 뿐,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닫아주었다.

혼자 남은 방 안, 임일은 침대에 걸터앉아 가방을 내려놓았다. 공항에서부터 지금까지, 너무 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창밖의 저녁 바람이 커튼을 살랑이게 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소만청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의 목소리, 손짓, 그리고 그가 낯설어할 거라 여기고 일부러 거리를 두는 듯한 조심스러운 태도까지.

가슴속에서 묘하게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호기심과 설렘, 그리고 금지된 것에 대한 아득한 긴장감. 그는 입술을 깨물며 그 감정을 외면하려 애썼다. 하지만 이미 마음 깊은 곳에선 무언가 싹트고 있었다. 열아홉 살 차이.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관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그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을 것 같았다.

거실에서는 소만청이 식탁을 정리하는 작은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평화로운 소리가, 오히려 임일의 마음을 불안하게 흔들어 놓았다. 저녁 바람이 다시 한 번 창밖을 스치며, 긴 밤의 시작을 알렸다.

처마 아래 온기

대학 첫 학기는 생각보다 한결 수월하게 시작되었다. 임일은 영국에서 배운 것과는 다른 강의 방식에 처음엔 조금 어색했지만, 며칠 지나자 금세 적응했다. 교수님의 말투나 학생들 사이의 분위기가 낯설면서도 왠지 정겹게 느껴졌다. 별장에서 학교까지는 버스를 타고 네 정거장쯤 가야 했고, 그는 매일 아침 서둘러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는 현관을 나섰다.

그날 아침도 그랬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부엌에서 은은한 된장국 냄새가 풍겨왔다. 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반찬 몇 가지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수만청은 이미 식탁 앞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일어났어? 얼른 와서 먹어.”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하고도 분명했다. 임일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가 직접 담근 듯한 깍두기와 멸치볶음, 그리고 달걀 프라이가 접시 위에 놓여 있었다. 외관만으로도 정성이 느껴지는 아침 식사였다.

“맛있겠네요.”

임일이 젓가락을 들며 짧게 말했다. 수만청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지만 시선은 여전히 손에 든 책에 두고 있었다. 그녀는 보통 아침 일찍 일어나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 습관이 있었고, 임일이 아침 먹는 동안 자리를 지켜주는 것이 일종의 배려인 듯했다.

며칠 동안 이런 소소한 풍경이 계속되었다. 그녀는 의붓아들에게 친절했지만 결코 지나치게 다가서지 않았고, 임일 또한 그런 거리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하지만 내심 그는 그녀가 신경 쓰는 모든 세세한 부분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강의가 일찍 끝나 별장으로 돌아온 임일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정원 쪽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차 향기를 맡았다. 거실 통창 너머로 보니 수만청이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 무렵이었다. 그녀는 긴 원피스를 입고 다리를 포갠 채, 다탁 위에 찻잔을 올려두고 책을 읽고 있었다.

임일은 가방을 내려놓고 천천히 테라스로 나갔다. 문을 열자 저녁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벌써 왔어? 오늘 강의 일찍 끝났나 보네.”

“네. 교수님이 사정이 있으셨나 봐요.”

임일은 그녀 옆에 서서 정원을 바라보았다. 잔디밭 너머로 붉게 물든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군데군데 핀 작은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 앉아 책 읽는 게 습관이신가 봐요. 전에 며칠 봤을 때도 저녁이면 여기 계셨던 것 같아요.”

그가 무심한 듯 말을 건네자 수만청은 책을 덮으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응. 하루 중 이 시간이 제일 좋아. 바람도 선선하고 조용하니까. 차 한 잔 마실래?”

“그럴까요?”

임일은 그녀 옆에 놓인 빈 의자에 앉았다. 수만청은 다소곳이 새 찻잔을 꺼내 따뜻한 홍차를 따라주었다. 찻물이 찻잔에 닿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요즘 대학 생활은 좀 어때? 적응됐어?”

“네, 생각보다 재밌어요. 다만 아직 어색한 것도 많고요. 팀 프로젝트나 그런 건 영국이랑 방식이 좀 달라서요.”

“그렇구나. 그래도 린이는 금방 적응할 거야. 성격도 차분하고 성실하니까.”

그녀의 칭찬에 임일은 찻잔을 입에 대며 살짝 웃었다. 차에서 달콤하고도 쌉쌀한 향이 올라왔다.

“아버지는 언제쯤 들어오시는지 아세요?”

임일이 불쑥 묻자 수만청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직 일정이 확실하지 않아. 아마 다음 달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녀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속에 깃든 외로움 같은 것을 임일은 느꼈다. 그녀는 남편, 즉 임일의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중했지만, 그런 그녀조차도 긴 출장이 버거운 듯 보였다. 임일은 그런 틈을 조금씩 읽어내고 있었다.

며칠 후 늦은 오후, 갑자기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임일은 방 안에서 책을 읽고 있다가 창밖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오늘도 테라스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갔지만, 거실에도 주방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거실 창 너머로 보니 그녀가 정원 한쪽에 서 있었다. 작은 정자 아래에 서서 비를 급히 피하긴 했지만, 바람에 빗방울이 옆으로 흩날리며 그녀의 원피스 자락을 적시고 있었다. 그녀는 두 팔로 몸을 감싼 채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임일은 망설이지 않고 현관 옆에 놓인 큰 우산을 집어 들었다. 바깥은 벌써 폭우에 가까운 빗줄기였다. 그가 우산을 펼쳐 들고 정자 쪽으로 뛰어가자 운동화와 바짓단이 순식간에 흠뻑 젖었다.

“만청 아주머니!”

그는 우산을 그녀 쪽으로 기울이며 약간 숨을 몰아쉬었다. 수만청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어머, 린이. 왜 나왔어? 이렇게 비 많이 오는데.”

“우산 가져왔어요. 같이 들어가요.”

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이자 빗방울이 그의 어깨를 때렸다. 수만청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우산 아래로 들어왔다. 어깨가 살짝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였다.

둘은 함께 천천히 현관을 향해 걸었다. 우산은 임일의 손에 단단히 쥐어져 있었고, 그의 왼쪽 어깨와 팔은 거의 비에 젖어 있었다. 수만청이 문득 그 모습을 보고는 미안한 듯 말했다.

“자꾸 네 쪽이랑 쏟아지는데 괜찮겠어?”

“괜찮아요. 전 원래 비 좀 맞아도 감기 안 걸리는 체질이라.”

그는 가볍게 웃어 보였지만 수만청의 미간엔 근심이 남아 있었다. 현관에 도착하자 그녀가 물기 묻은 신발을 벗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옷 갈아입고 수건으로 머리 꼭 말려. 감기 걸리면 큰일이니까.”

“네, 알겠어요.”

임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수만청은 바로 계단으로 올라가지 않고 잠깐 멍하니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린이.”

“네?”

“고마워. 그런데… 다음엔 괜히 비 맞고 그러지 마. 아무리 그래도 너와 나는 분명히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어.”

그녀의 말은 단호하면서도 어딘가 불안정한 떨림을 품고 있었다. 임일은 우산을 접으면서 무심한 표정을 지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작은 불꽃이 일었다. 그녀가 신분 차이를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냥 비 맞는 게 싫으실 것 같아서 그랬을 뿐이에요.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의 담담한 대답에 수만청은 미심쩍은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으로 올라갔다.

그날 밤, 방 안은 조용했다. 빗소리는 여전히 창밖을 두드리고 있었고, 임일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벽지에 스민 은은한 빗소리가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정원에서 우산을 기울이며 다가갔을 때의 그녀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놀라고 당황했지만 이내 안심하는 듯한, 그 복잡한 눈빛.

그녀의 체온이 우산 아래에서 느껴지던 짧은 순간, 빗속에서도 분명하게 다가왔던 연한 비누 향. 그리고 ‘선을 지키라’고 말하던 긴장된 목소리. 그 모든 것이 그의 가슴속에서 천천히 꿈틀거렸다.

임일은 자신이 왜 이렇게 그녀에게 집착하게 됐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단순히 외로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머니를 잃은 뒤로 늘 곁에 없던 따뜻함에 대한 갈망이 그녀에게서 묘한 형태로 표출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녀 역시 외로움에 지쳐 있고 그 외로움을 채워줄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음을 그는 직감했다.

그녀가 저녁마다 홀로 정원에서 차를 마시는 모습, 출장 간 아버지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살짝 흔들리는 눈동자,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빗속에서 그가 건넨 우산을 받아들이던 미묘한 침묵 속에 그 증거가 있었다.

임일은 눈을 떴다. 방 안은 어둡고 고요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정말 좋아하게 된 건가.”

혼잣말처럼 작게 내뱉은 말은 빗소리에 섞여 이내 사라졌다. 그렇다. 그는 이제 스스로 부인할 수 없을 만큼 그녀에게 끌려 있었다. 다만 그 감정을 어떤 형태로 드러내고 어떻게 다뤄야 할지, 그 단계는 아직 설익은 채였다.

다음 날 아침, 빗줄기는 한풀 꺾여 있었다. 아침 햇살이 축축한 정원을 비추며 물기를 반짝이게 했다. 임일이 계단을 내려가자 식탁 위에는 어제처럼 정갈한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 수만청은 여전히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가가 조금 피로한 듯해 보였다. 잠을 설친 기색이었다.

“어제 비 많이 맞아서 괜찮은 거죠? 열은 없어요?”

임일이 자리에 앉으며 묻자 수만청은 작게 웃었다.

“좀 늦게 잠들긴 했어도 괜찮아. 오히려 네가 걱정돼서. 너 어깨랑 팔 많이 젖었잖아. 감기 기운 없지?”

“저는 정말 괜찮아요. 아침에 일어나기도 상쾌하고요.”

임일은 여전히 평온한 어조로 대답하며 밥을 뜨기 시작했다.

식사 후 그가 방으로 올라가려 할 때, 수만청이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린이.”

“네?”

“어제 일은… 정말 고마웠어.”

임일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뭔가 말을 고르는 듯했다. 이내 짧은 한숨과 함께 작게 덧붙였다.

“사실, 저녁 무렵이면 좀 을씨년스러울 때가 있었거든. 네가 함께 있어 줘서… 그냥 좀 덜 외로웠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부엌 쪽으로 자리를 옮겼고, 임일은 조용히 계단을 올라갔다. 가슴속에서 작은 파문이 일었다. 그녀의 저 고백 아닌 고백은 마치 닫혔던 문이 아주 살짝 열리는 소리 같았다.

방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은 임일은 펜을 굴리며 생각했다. 조급해서는 안 된다. 그녀의 경계심은 여전히 두텁고, 그녀 스스로 확립한 도덕적 기준도 강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조금씩 쌓이고 있는 이 작은 신뢰와 친밀감이 언젠가 그 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에 젖은 정원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 빛나는 풍경 속에서 그는 그녀의 미소를 또렷이 떠올렸다. 부드럽고도 애잔했던 그 표정. 밤새 꿈속에서도, 책상 앞에서도, 그 미소가 좀처럼 흩어지지 않았다.

그가 그토록 원하는 것은 단순한 가족의 정이나 스쳐 지나는 다정함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더 확실히 알았다. 이 마음은 이미 오래전 어느 순간부터 싹터,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집착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시험과 경계

가을이 깊어 가는 캠퍼스는 단풍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임일은 수요일 아침, 조심스럽게 소만청의 방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무언가 골똘히 읽고 있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부드러운 빛이 그녀의 옆얼굴을 감싸고 있었고, 차분하게 내려뜨린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만청 씨, 죄송한데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소만청은 고개를 들지 않고 가볍게 대답했다.

“얘기해 봐요.”

임일은 문가에 서서 마치 망설이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학교에서 이번 주 금요일에 학부모 간담회가 있는데… 아버지는 출장 중이잖아요. 참석하려면 보호자 사인이 필요해서요.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대신 와 주실 수 있나요?”

그녀의 손가락이 책장 위에서 잠시 멈췄다. 소만청은 비로소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임일은 얌전히 서서 시선을 살짝 아래로 떨어뜨린 채 마치 다 큰 아들이 어머니에게 부탁하는 것 같은 순종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것은 거절하기 어렵게 만드는 태도였다.

“몇 시지요?”

“오후 두 시예요. 오래 걸리지 않아요. 끝나면 근처에서 식사라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동안 집에서 많은 신세를 졌는데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 드려서요.”

소만청은 잠시 침묵하다가 손을 내저었다.

“식사는 됐고, 행사에만 같이 가 주면 되겠네요.”

“그래도…”

“됐다고 했어요.”

그녀의 어조는 단호했지만 부드러웠다. 임일은 고집을 부리지 않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끄덕였다.

“알겠어요, 만청 씨.”

금요일 오후, 소만청은 연한 베이지색 긴 치마를 입고 가볍게 화장을 한 뒤 학교에 도착했다. 임일은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를 보자 눈이 반짝였다.

“여기까지 와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당연한 일인걸요. 들어가요.”

간담회장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른 학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만청은 나이가 어린 편은 아니었지만, 또래보다 훨씬 젊어 보여 학부모들 사이에서 은근한 시선을 끌었다. 그녀가 서류에 사인하는 모습은 침착했고, 교수님의 설명을 가끔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임일은 한쪽에 서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다른 무리의 학부모들과 확연히 다른 특별한 존재인 듯 지켜보았다.

일이 끝난 후 두 사람은 캠퍼스의 작은 오솔길을 걸었다. 바람이 수건처럼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만청 씨, 잠깐만요. 저 식당 좀 봐요. 이 시간인데도 사람이 없네요. 조용하게 밥 먹기 좋겠어요. 어차피 집에 가도 저 혼자 해 먹어야 하니까.”

소만청은 그가 교묘하게 사실을 바꿔 말하고 있음을 알아챘다——아침에 일부러 가정부에게 휴가를 준 사람이 바로 그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방식은 전혀 싫지 않았고, 그가 끊임없이 챙기는 태도에는 일말의 계산이 담긴 듯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부드러운 강요가 느껴졌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냥 간단히 먹기만 해요.”

“당연하죠, 만청 씨 말씀대로 할게요.”

음식이 나왔다. 임일은 그녀를 위해 생선 가시를 발라내고, 국을 떠 주며, 심지어 물수건까지 그녀의 손이 닿기 좋은 곳에 놓아두었다. 이런 섬세한 배려는 매우 자연스럽지만, 지나치게 가까웠기에 소만청은 계속 불편함을 느꼈다.

“임일아, 너 요즘 학교에서 무슨 일 있니?”

“왜요?”

“네가 좀… 이상해 보여서.”

“이상하다고요?”

임일이 고개를 들었다. 식당의 따뜻한 조명 아래서 그의 눈동자는 깊고 부드러웠으며 입가에 감도는 미소는 여전히 순수했지만, 눈빛 속에 숨겨진 무언가가 사람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나는 그냥… 만청 씨에게 잘하고 싶을 뿐이에요.”

소만청은 곧바로 시선을 피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네가 그럴 필요는 없어.”

“필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서예요.”

그리고 그는 갑자기 가볍게 이렇게 덧붙였다.

“게다가 만청 씨는 오늘 정말 예뻐요.”

공기가 갑자기 얼어붙었다. 소만청이 젓가락을 내려놓는 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

“임일.”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유난히 무거웠다.

“이런 말은 앞으로도, 어떤 상황에서도 해선 안 되는 거야.”

“하지만…”

“안 돼.”

그녀는 엄격하게 말을 끊었고, 미간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나는 네 아버지의 아내야. 네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존중은 바로 이것뿐이야. 더 많은 건 안 되고, 한 발짝도 넘어선 안 돼.”

임일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마치 잘못한 아이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미안해요.”

사과는 진심으로 하는 듯했지만, 소만청은 그의 눈 속에서 한순간 반짝인 무언가를 포착했다. 그것은 결코 순종이나 억울함이 아니라, 마치 놓아 주지 않겠다는 은밀한 고집 같은 것이었다.

주말, 임일은 이른 아침부터 서재에 틀어박혔다.

소만청은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부엌에서 꽃을 꽂고 있을 때 갑자기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왔다——드뷔시의 <달빛>. 그녀의 손에 들린 꽃가위가 빈 꽃병에 닿을 듯 말 듯 멈춰 섰다.

피아노 소리는 거실을 지나 복도를 타고 마치 어디선가 흘러내리는 물처럼 천천히 다가왔다. 모든 음표는 정성스럽게 다듬어져 있었고, 리듬과 감정 표현이 매우 세밀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걷다가 서재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은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문틈 사이로 임일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등은 곧게 펴져 있었고 열 손가락이 건반 위를 흐르며, 아직 젊은 옆모습이 아침 햇살 속에서 또래답지 않은 침착함과 집중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지금 연주하는 부분은 바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악장이었다.

남편에게도 말한 적 없는 취향인데,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마지막 음이 깃털처럼 가라앉았다. 임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간으로 시선을 보냈다.

“만청 씨.”

소만청은 얼른 눈길을 거두었지만 발은 쉽게 떼지 못했다.

“연습할 곡이에요. 잘 쳤나요?”

“괜찮았어.”

그녀가 의도적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연습하려면 계속하렴.”

그리고 그녀는 몸을 돌려 거실로 빨리 돌아갔지만, 가슴이 두근거리는 소리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무엇이든 감히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런 생각은 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소만청은 의도적으로 임일을 피하기 시작했다.

식사 시간은 더 이상 그와 맞추지 않았다. 저녁이면 일찍 방으로 돌아가 문을 잠갔다. 그가 집에 있으면 그녀는 외출할 핑계를 찾았고, 커튼을 열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면 정원에서 꽃을 가꾸며 몇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대화도 짧아졌고 어조도 다시 예의 바르고 차가운 태도로 돌아갔다. 마치 무언의 경고를 알리는 듯했다——우리는 이 지점까지이며, 더 이상은 안 된다고.

하지만 임일은 물러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혀 서두르는 기색도 없었다.

그는 바쁘게 그녀를 쫓아다니지 않았다. 매일 아침 그녀의 방 문 앞에는 한 잔의 미지근한 물과 오늘 아침 새로 꽂은 꽃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그가 늘 다정하고 온화한 눈빛으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 좋은 하루 보내요, 만청 씨.”

그러고는 가방을 메고 학교로 향했다. 마치 그 모든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처럼. 그의 태도는 여전히 삼가고 알맞은 거리를 두며, 지난번 실언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런 거리 유지가 소만청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비가 내리는 저녁, 그녀가 저녁 약속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현관에는 우산이 놓여 있었고, 현관 조명은 켜져 있었으며, 구두 옆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생강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 거실 소파에는 임일이 양복을 걸친 채 깊이 잠들어 있었고, 그의 손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우산이 들려 있었다.

소만청은 그 자리에 서서 오랫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잠든 모습은 어린아이처럼 아주 평온했지만, 손에 든 우산은 조금 전까지 빗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렸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재킷을 벗어 그에게 덮어 주려다 손을 멈추고, 결국 조용히 제 방으로 돌아갔다.

문을 닫자마자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안 돼. 절대 안 돼.

그녀의 생일은 보름 후에 조용히 다가왔다. 소만청은 본래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아침에 부엌에서 장수 국수를 한 그릇 삶아 먹고 혼자 조용히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식탁 위에 작은 하늘색 선물 상자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나비 리본이 정성스럽게 묶여 있었고, 겉면에는 친필로 단정하게 쓰여 있었다: 만청 씨, 생일 축하합니다.

그녀의 가슴이 미세하게 떨렸다.

“생일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작은 거예요.”

임일은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손에 두유를 들고 부엌에서 나왔다.

“열어 보세요.”

소만청은 선물을 열지 않으려 했지만, 떨면서 손가락이 리본을 당기고 있었다. 상자 안에는 손으로 만든 가죽 다이어리가 들어 있었고, 종이의 질감이 부드러웠으며 표지에는 그녀의 이니셜이 금박으로 찍혀 있었다. 첫 장에는 그가 직접 쓴 문구가 있었다——‘당신이 있는 나날들이 모두 축복이기를.’

위험한 선물이 아니었다. 지나칠 정도로 값비싼 물건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마치, 그녀의 삶의 매 순간을 함께하고 싶다는 암시 같았다.

그녀는 손에 든 다이어리를 움켜쥐었다.

“임일아.”

“네?”

임일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따뜻하게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봄바람이 불기 전에 이미 풀숲 끝의 작은 움직임을 예감한 듯, 그가 이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만청은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말했다.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말했죠.”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더 조심했어요. 마음을 담았지만, 월권은 안 했어요. 좋아하는 마음이 있지만, 만청 씨를 곤란하게 하지는 않아요.”

그는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런데 만청 씨, 당신은 내가 마음을 접기를 바라시나요?”

말문이 막혔다. 소만청은 서 있었다. 가을바람이 복도를 지나 복숭아나무 가지에 걸린 작은 열매를 흔들었다. 그녀는 한슘을 쉬며 몸을 돌려 다이어리를 가슴에 안은 채 말없이 거실을 떠나 계단을 올라갔다.

임일은 식탁 앞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창밖 은은한 햇살 아래서 그의 입가에는 거의 들리지 않을 듯 말하는 가벼운 미소가 번졌다. 이번 시험에서 그는 이기지도 않았지만 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허점을 파고들다

거실은 깊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 창밖으로는 저녁 바람이 가끔씩 유리문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소만청은 식탁 앞에 홀로 앉아 있었다. 천장의 샹들리에는 꺼져 있었고, 그녀가 켜놓은 스탠드 조명의 은은한 빛만이 그녀의 실루엣을 그림자 속에서 도려낸 듯 떠올리고 있었다. 손에는 이미 절반 이상 비워진 와인잔을 가만히 쥐고 있었고, 탁자 위에는 거의 바닥을 드러낸 와인 병이 놓여 있었다.

며칠째 집 안은 텅 빈 듯 적막했다. 남편은 사업상 중요한 술자리가 있다며 나간 뒤로 연락조차 거의 없었다. 그녀는 본디 이런 고독을 견딜 성격이었고, 애초에 이 결혼 또한 외로움을 피하기 위한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고요와 마주하고 있자면, 낯선 집 안의 낯선 공기가 그녀의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알코올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은 이제 거의 무감각해져 있었다. 그녀는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소만청은 고개를 겨우 돌렸다. 어깨에 메신저백을 멘 임일이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있었다. 어두운 거실 안, 스탠드 불빛 아래 와인잔을 든 소만청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그의 동작이 잠시 멈췄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임일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 섬세하게 억제된 어떤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는 가방을 소파 옆에 내려놓고 천천히 식탁 쪽으로 다가왔다. 가까워질수록 공기 중에 감도는 은은한 와인 향과 그녀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달콤하면서도 은근한 장미 계열의 향수가 뒤섞여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네 아버지, 오늘도 안 들어오셨어."

소만청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미소에는 체념과 자조가 반반 섞여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등을 약간 구부정하게 한 채 식탁에 기대어 있었다. 임일은 평소 그토록 단정하고 우아하던 그녀가 이토록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라 가슴 한켠이 저릿하게 죄어오는 것을 느꼈다.

"많이 드셨네요."

그는 탁자 위의 빈 병을 가리키며 부드럽게 물었다.

"혼자 마시기엔 너무 적적하지 않으셨어요?"

소만청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잔을 다시 입가로 가져갔다. 하지만 잔을 기울이려는 찰나, 손목에서 힘이 풀리며 잔이 미끄러질 뻔했다. 임일은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과 와인잔을 동시에 감싸쥐었다. 그의 손바닥은 차가운 그녀의 피부 위에서 유난히 뜨겁게 느껴졌다.

"이제 그만 방으로 들어가셔야겠어요."

소만청은 미약하게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술기운에 다리가 풀려 몸이 옆으로 쏠렸다. 임일은 곧바로 그녀를 지그시 붙잡아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녀의 체온과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그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한 걸음씩 복도를 따라 안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창밖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이 얇은 커튼을 살짝 들어 올렸다. 임일은 그녀를 침대 가장자리에 조심히 앉혔다. 소만청은 힘없이 매트리스에 손을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가가 불빛 아래 촉촉하게 반짝이는 것을 임일은 놓치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임일이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살짝 굽히고 물었다. 그 말이 방아쇠가 된 듯, 소만청의 눈물이 조용히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얼른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려 했지만, 솟구치는 감정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목소리는 갈라지고 떨렸다.

"이 집에선 다들 날 친절하게 대하지만, 내 편은 아무도 없어. 네 아버진 항상 바쁘고, 나는 매일 이 넓은 집에 혼자야……. 나는 그냥…… 그냥 제대로 된 가족이 갖고 싶었을 뿐인데."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어른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진 그녀의 내면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임일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당겼다. 그리고 숨 돌릴 틈도 없이, 그 떨리는 몸 전체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외로우셨군요."

아, 이건 아니야, 라는 이성이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 경고음을 울렸다. 하지만 안정제 같은 그의 품은 너무도 따뜻했고, 그녀의 깨지기 직전의 신경을 감싸 안기에는 너무도 배려심이 넘쳤다. 소만청은 그만 임일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는 눈물을 쏟아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커튼 사이로 스미는 달빛조차 흐릿한 방 안에서, 분위기는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소만청의 호흡이 잦아들고, 취기가 그녀의 의식을 한 겹 부드럽게 덮은 상태에서, 임일은 살며시 그녀를 자신의 팔에서 떼어내 침대 시트 위에 눕혔다. 그녀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고, 몸에는 아무런 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의식은 깨어 있고 싶어 하지만 알코올이 그녀의 경계심을 모두 걷어낸 흔적이 역력했다. 그야말로 허점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순간이었다.

임일은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올렸다. 손가락 끝이 지나간 자리마다 소만청의 가느다란 몸서리가 이어졌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경련하듯 침대 시트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망설임은 잠시뿐이었다. 임일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듯이,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그녀의 살짝 벌어진 입술에 포갰다. 부드럽게,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집요한 열기는 마치 그녀의 숨결을 맛보려는 듯 거침이 없었다.

소만청은 경직되었다. 닫혀 있던 눈이 번쩍 떠졌다. 희뿌연 초점 속에 임일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잘못됐어, 안 돼. 이성은 그녀에게 손을 내저으라 외쳤지만, 그녀의 팔은 마치 천근만근 무거운 듯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애써 낸 기척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작은 신음소리뿐이었다. 밀쳐내려던 손은 오히려 그의 셔츠 앞자락을 붙잡고 말았다. 밀어내는 건지, 아니면 더 가까이 붙잡는 건지 스스로도 분간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임일은 그녀가 밀쳐내지 않자, 행동을 천천히 이어갔다. 정성을 다하듯 조금씩 키스의 강도를 높여가며, 한 손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은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그의 혀끝이 전해주는 온기는 무너지기 직전의 그녀의 정신마저 알코올과 함께 녹여버리는 듯했다. 소만청의 눈가에서는 방금 전과는 다른 이유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혼란과 죄책감, 그리고 부인할 수 없는 끌림이 뒤섞인 뜨거운 눈물이 다시 한 번 맺혔다.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계속."

소만청의 목소리는 갈라진 속삭임에 가까웠다. 반은 거부고 반은 체념이었다.

"하지만 이제 아니잖아요."

임일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낮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 숨결이 닿은 귓바퀴가 붉게 물들었다.

"외롭고, 힘들고, 속수무책일 때… 저는 여기 있었어요."

방 안의 커튼이 바람에 한 번 더 크게 펄럭이며 차가운 밤공기가 스며들었다. 하지만 서로의 체온을 확인한 두 사람의 피부 위로는 오히려 뜨거운 불길이 일었다. 임일은 더욱 깊숙이 그녀에게 파고들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서 목덜미로, 쇄골로 내려갈 때마다 소만청은 몸부림치듯 허리를 틀었지만,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마치 그를 더 깊이 받아들이려는 조바심처럼 보일 뿐이었다.

임일의 배려는 섬세하고도 집요했다. 그녀가 숨을 가다듬을 틈을 끊임없이 주면서도, 물러서야 할 순간에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그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에 소만청은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 다정한 공격에 목말라했는지를 절감했다. 침대 시트는 곧 뒤틀리고 흐트러졌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녀의 팔과 다리는 성숙한 여성의 아름다운 곡선을 유감없이 드러냈고, 그 위로 임일의 젊고 확신에 찬 몸이 겹쳐졌다.

"……미안해요."

어느 순간, 소만청이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를 사과였다.

"괜찮아요."

임일은 즉시 대답하며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무 걱정하지 마요. 나만 믿어요."

마치 주문과도 같은 그 말에 소만청은 마지막 남은 긴장마저 풀어버렸다. 그는 그녀의 내면과 외면 모두를 파고들고 있었다. 낯선 쾌감과 이를수록 쌓여 가는 죄책감 사이에서 그녀의 신경은 한계까지 긴장했다가, 이내 부드럽게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밤바람은 점점 더 세차게 불었고, 바람에 실려 온 선선한 공기조차 두 사람의 얽힌 오열과 숨소리에 점차 동화되어 갔다. 결국, 피할 수 없는 허점을 완전히 내준 채, 소만청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손은 마침내 임일의 등을 감싸 쥐었고, 그 촉촉한 눈꺼풀 위로는 달빛마저 흔들리듯 스며들고 있었다.

깊은 밤, 침실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바람은 잦아들었고, 난간을 휘감았던 흰 커튼도 축 처져 있었다.

어둠의 밤, 빠져들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뚫고 침실을 은은하게 덮었다. 소만청은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눈앞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잠시 정신이 들지 않아 몸을 움직이려는데, 팔이 무언가 따뜻한 것에 닿았다.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옆에는 임일이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고, 숨소리는 가볍고 고왔다. 소만청은 숨을 삼키며 몸을 얼어붙게 했다. 어젯밤의 파편 같은 장면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어둠 속에서 느껴진 숨결, 서로 엉킨 손가락, 더운 체온. 그리고 자신의 내뱉었던 짧은 울음 같은 소리. 그 모든 게 꿈만 같았지만, 현실이었다. 그녀는 속이 울렁거렸다. 후회가 마치 바닷물처럼 폐부 깊숙이 차올랐다.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그녀는 급하게 몸을 일으키려다 이불을 끌어안았다. 몸이 떨려서 이가 덜덜거렸다. 그녀의 움직임에 임일이 살며시 눈을 떴다. 소만청은 얼굴이 화끈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임일은 천천히 팔을 뻗어 그녀의 손끝을 스쳤다. 감촉이 찌릿하게 전해져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만청 씨."

그의 목소리는 아침 공기보다 더 부드러웠다. 소만청은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눈물이 맺혀 시야가 얇게 번졌다.

"미안해요. 그런데 나는 진심이에요. 정말로 만청 씨를 좋아해요. 헛된 감정이 아니에요."

그녀는 드디어 그를 바라보았다. 임일의 얼굴엔 어린 나이답지 않은 단단한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눈빛이 너무 맑아서 오히려 그녀를 찔렀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겨우 짜낸 목소리는 떨리고 끊어졌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몸을 돌렸다. 온몸이 부끄럽고 비참했다. 남편의 아들과 이런 관계가 되다니. 그녀의 도덕심과 자존심이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었다. 임일은 그런 그녀에게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물 한 잔을 따라 침대 옆에 두었다.

"추스르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부담 주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는 방을 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소만청은 혼자 남아 이불을 꽉 움켜잡았다. 그의 배려가 더 괴로웠다. 화내거나 억지로 매달리면 오히려 저항하기 쉬웠을 텐데, 그는 언제나 조금씩 그녀의 방어선을 은은하게 녹였다.

그 후 며칠간 소만청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를 철저히 피했다. 식탁에서든 거실에서든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그녀는 얼굴을 굳게 하고, 목소리도 딱딱하게 했다. 어떤 틈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저녁, 임일이 조용히 커피를 내려 그녀 앞에 놓았다. 소만청은 순간 몸을 긴장시키며 차갑게 말했다.

"임일, 부탁이 있어. 이런 일 이제 그만둬. 우리 사이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네 아버지께 얼굴을 들 수 없게 하지 마. 나도 이제 이런 감당 못 해."

그녀는 마지막 말을 거의 토해내듯 던졌다. 임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저 적막하게 그의 눈은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 그는 작은 웃음을 허공에 흩뿌리며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만청 씨가 그렇게 원한다면."

소만청은 그 대답에 오히려 허탈한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가슴 한켠이 바늘로 찌르듯 아려왔다. 그날 이후, 임일은 정말로 선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일상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매일 아침 그녀가 깨기 전에 부엌 탁자 위에는 따뜻한 보리차 한 잔과 작은 접시에 담긴 과일이 놓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밤늦게 서재에서 책을 읽다 잠들면, 어느새 등에 얇은 담요가 덮여 있었다. 한 번은 머리가 아파 식탁에 엎드려 있는데, 조용한 발소리가 다가오더니 진통제 한 알과 미지근한 물이 그녀의 손 옆으로 미끄러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살며시 물건을 두고 사라질 뿐이었다. 소만청은 그 작은 행동들에 매번 가슴이 복잡해졌다. 짜증 섞인 목소리로 노려보고 싶었지만, 눈을 들면 그는 이미 물러나 없었다. 그의 존재는 마치 바람 같았다. 잡으려 하면 멀어지고, 잊으려 하면 어느새 피부에 닿아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그녀의 완강하던 마음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외로웠다. 솔직히 그녀는 외로웠다. 남편은 항상 바빴고, 이 넓은 집은 늘 적막했다. 그런데 임일의 이런 은은한 관심은 마치 어두운 방에 비치는 한 줄기 달빛 같았다.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빛의 따스함이 점점 그리워졌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남편이 또다시 출장을 갔다. 그것도 일주일이나 걸리는 긴 출장이었다. 임일의 아버지는 짐을 꾸리며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짧게 던지고 떠났다. 현관문이 닫히자 집 안은 깊은 정적에 잠겼다. 소만청은 거실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았다. 가을 저녁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있었다. 적막이 그녀를 짓누르는 듯했다. 그날 밤, 그녀는 평소보다 일찍 침실로 들어갔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이불이 사각거렸다. 귀를 기울여 보니 집 안은 고요했다. 그런데 그 적막 속에서, 그녀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심장이 이유 없이 두근거렸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복도에서 아주 미세한 소리가 났다. 바퀴벌레 스치는 소리보다도 작은, 맨발로 나무 바닥을 밟는 소리. 소만청은 숨을 멈추었다. 문이 열렸다. 달빛을 등진 검은 실루엣이 방으로 스며들었다. 임일이었다. 그녀는 일어나 앉아야 할지 누워 있어야 할지 몰랐다. 몸이 마비된 듯 굳었다. 임일은 천천히 침대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고 있었다. 소만청은 떨리는 입술로 겨우 말을 꺼냈다.

"안 돼… 여기 오면 안 된다고 했잖아…."

목소리는 이미 체면을 잃고 가늘게 떨렸다. 임일은 침대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녀의 손을 더듬어 찾으려 했지만 먼저 닿지 않았다.

"만청 씨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그의 속삭임은 부드러웠지만 날카로운 진실을 담고 있었다. 소만청은 부정하려고 고개를 저었지만, 이미 몸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임일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그의 손바닥은 까칠하고 따뜻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죄책감이 머릿속을 강타했지만, 그의 손길이 주는 온기에 몸이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느 순간 희미한 연기처럼 사라졌다. 임일이 천천히 몸을 기울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김은 너무나 조심스러웠고, 마치 무언가 깨어질까 봐 겁내는 듯했다. 그녀는 그 순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외로움이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뒷목을 감싸안았다. 임일은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더 깊숙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서로의 옷이 스치는 소리, 체온이 한데 엉기는 감촉. 방 안은 점차 더운 공기로 가득 찼다. 이번에는 소만청도 더 이상 굳어 있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등에 파고들었고, 숨소리는 점점 격해졌다. 규칙이니 도덕이니 하는 관념은 저 멀리로 떠밀려 가 버렸다. 그녀는 그 순간만큼은 오로지 온기와 위로에 굶주린 한 여자였다. 그의 움직임이 깊어지자 그녀는 다리를 그에게 감았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떨림이 전신을 휘감고 지나갔다. 임일은 긴장한 듯 숨을 크게 들이쉬며 그녀의 귀에 뜨겁게 속삭였다. "사랑해요." 그리고 그는 마지막 순간 그녀 안에 그대로 머물렀다. 소만청은 그 강한 온기가 몸속 깊이 스며드는 걸 느끼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한동안 방 안에는 거친 숨소리만 감돌았다. 임일은 그녀의 몸 위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와 옆으로 누웠다. 그는 조금도 힘을 주지 않고, 마치 아기를 다루듯 그녀를 살며시 감싸안았다. 그의 맥박이 아직 빠르게 뛰고 있는 것이 가슴에 전해졌다. 소만청은 점차 현실로 돌아왔다. 몸의 열기가 가시자, 서늘한 밤공기가 피부에 스며들었다. 충동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거대한 공허와 수치가 찾아왔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돌려 베개를 끌어안았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소리는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물었지만 어깨가 심하게 들썩였다. 부끄러웠다. 자신이 한 짓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품에서 느낀 포근함과 따스함이 몸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그 온기는 그녀가 수년간 갈망해 왔던 종류의 것이었다. 단순한 육체적 쾌락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감싸이는 그 안도감. 그 따스함이 너무도 간절해서, 그녀는 이 상황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비참했다. 도덕과 욕망 사이에서 찢겨진 그녀의 영혼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임일은 그녀가 우는 소리를 들었는지, 살며시 다가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만청 씨… 미안해요. 하지만 나는 진짜로 당신을 생각해요."

소만청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이 오히려 그녀의 죄책감을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그냥 이 따스함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싶었다. 추하게 우는 이 순간조차, 그의 손길이 자신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프게 고마웠다. 바깥에는 어느새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저녁 바람이 아니었다. 깊은 밤을 흔드는 거센 바람이 창문을 두드렸다. 소만청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마치 이 폭풍 속에 모든 것을 흘려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눈물은 점차 잦아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베개를 끌어안고 있었고, 임일의 한 팔이 조용히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어둠 속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밤은 깊고, 그들은 어둠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비밀의 영역

아침 햇살이 식탁 위에 길게 누웠다. 린이는 느릿느릿 계단을 내려오며 넥타이를 매만졌다. 소만청은 이미 부엌에서 식탁을 준비하며 오늘 아침으로 콩나물국을 끓였다. 냄새가 계단 위까지 희미하게 올라왔다.

"잘 잤니?"

그녀가 뒤돌지 않고 물었다.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했다. 린이는 살짝 미소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네, 어머니."

짧은 대답 뒤에 부엌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만청이 밥과 국을 내려놓으며 그 옆에 반찬 그릇을 가지런히 두었다. 린이가 숟가락을 들자 그녀도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지만, 만청은 곧바로 수저를 집어 들었다. 평범한 가정의 아침 풍경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들은 그저 엄마와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 평온함은 유리처럼 얇았다. 깨질 듯한 긴장감이 그들 사이에 희미하게 감돌았다. 전날 밤의 체온과 숨결이 아직도 몸에 남아 있는 탓이리라. 린이가 젓가락을 떨어뜨리려다가 가까스로 잡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곧바로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학교 끝나면 몇 시쯤 와요?"

린이가 국을 한 숟갈 떠 입에 넣으며 물었다.

"늦지 않을 거야. 네 시쯤?"

만청이 조심스럽게 대답하고 밥을 떠먹었다. 그녀의 젓가락질은 여전히 우아했지만, 손목에 남은 붉은 자국은 긴 소매 속으로 감춰져 있었다. 린이는 그걸 어렴풋이 눈치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녁은 뭘로 할까?"

"아무거나 괜찮아. 요즘 네가 해주는 건 다 맛있으니까."

린이의 말에 만청은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 잠시 부드러움이 스쳤지만, 이내 다시 단단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식사가 끝나자 린이는 방으로 올라가 가방을 챙겼다. 만청은 조용히 빈 그릇을 치우며 싱크대 앞에 섰다. 물소리가 주방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손을 움직이면서도 머릿속은 텅 빈 듯했다. 지난 몇 주 동안의 일들이 물거품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밤이면 모든 게 뒤바뀌었다.

그날 밤, 집 안의 불이 모두 꺼지고 어둠이 내려앉자, 린이는 평소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복도를 건넜다. 그의 양말 발이 카펫을 살며시 밟으며 만청의 방 문 앞에 멈췄다. 문은 언제나처럼 잠겨 있지 않았다. 손잡이를 살짝 돌리자 경첩이 조용히 숨을 내쉬듯 열렸다.

방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만청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그녀의 실루엣을 은은하게 감쌌다. 긴 머리가 느슨하게 풀어져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잠옷 차림의 그녀는 낮에 비해 훨씬 더 여리고 맨살을 드러낸 것 같았다.

린이는 말없이 다가가 그녀의 등 뒤에 섰다. 손을 들어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만청은 약간 몸을 움찔했지만, 밀쳐내지는 않았다. 대신 깊고 느린 한숨을 내쉬었다. 린이의 체온이 얇은 옷감을 통해 전해졌다.

"하루 종일 당신 생각만 했어요."

린이가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만청의 귀밑머리가 그의 숨결에 살랑 흔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신 손을 들어 린이의 팔을 감싸 쥐었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야."

목소리에는 체념이 가득했다.

"알아요."

린이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를 그녀의 뒷목에 살짝 기댔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피부에 닿자 그녀는 숨을 삼켰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나도."

린이는 천천히 그녀를 돌려세웠다. 만청은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걸 볼 수 있었다. 두려움, 갈등, 그리고 그 이면에 감춰진 기대까지. 린이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으며 엄지손가락으로 광대뼈를 부드럽게 쓸었다.

"만청 씨."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만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린이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그녀의 손이 린이의 셔츠 앞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린이는 그녀를 침대 쪽으로 천천히 이끌었다. 침대 시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 부드럽게 퍼졌다.

시간은 멈춘 듯했다. 세상과의 모든 연결이 끊어진 이 방 안에서, 그들은 그저 숨 쉬는 온기만을 느끼며 서로를 확인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그녀의 긴장은 조금씩 녹아내렸다. 린이는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모든 손길마다 그가 평소 보여주던 배려와 집요함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가 완전히 놓아버릴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았다.

며칠이 지나면서 이 패턴은 더욱 뚜렷해졌다. 낮에는 지극히 평범한 의붓모자. 린이는 약속 시간을 물었고, 만청은 저녁 메뉴를 고민했다. 가끔 거실에서 마주 앉아 TV를 보기도 했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린이가 소파에 앉으면 그녀는 반대편에 앉았다. 하지만 그 거리는 밤이면 사라졌다.

린이는 학업과 생활에서 점점 더 그녀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어느 날 오후, 그가 방에서 공부하며 서류를 뒤적이자 만청이 차를 들고 올라왔다.

"뭐 찾니?"

"입학할 때 냈던 서류인데, 장학금 신청에 필요하대요. 아버지께서 챙기셨던 것 같은데."

린이가 책상 위를 어지럽히며 대답하자 만청이 조용히 서랍장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몇 초 만에 투명 파일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

"여기 있을 거야. 지난번에 네 아버지가 정리해뒀더라."

린이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살짝 웃었다.

"역시 당신이 최고예요."

그 말에 만청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별거 아니야."

그녀는 재빨리 방을 나가려 했지만, 린이가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만청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린이는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고 일어서며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고마워요."

만청은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이 빠르게 방문 쪽을 향했다. 다행히 계단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재빨리 린이의 가슴을 밀어내며 속삭였다.

"낮에는 그러지 마. 누가 볼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막으려 해도 막아지지 않는 미소가 흘렀다. 그 후로도 그녀는 자주 그의 방을 드나들며 필요한 것을 챙겨주었다. 린이는 그럴 때마다 문을 살짝 닫고 그녀를 잠시 붙잡아 두었다. 그녀는 극구 말렸지만, 결국엔 잠시 동안 그의 품에 머물렀다.

저녁이면 그녀는 자연스럽게 린이의 식성에 맞춰 요리했다. 그가 어릴 적 영국에서 먹던 음식을 물어보고, 인터넷을 찾아가며 레시피를 익혔다. 식탁에 그의 취향에 맞는 반찬이 하나둘 늘어갔다.

"너무 애쓰지 않으셔도 되는데."

린이가 말했지만, 만청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맛있게 먹으니까 그냥 기분이 좋아서 하는 거야."

이중적인 생활은 그녀에게도 차츰 익숙해졌다. 낮에는 조금 떨어진 듯 차분한 의붓어머니였고, 밤에는 린이의 품에서 젊은 여자로 돌아갔다. 그 경계가 무뎌지면서 그녀 안의 죄책감은 여전히 살아 있었지만, 그걸 누르는 외로움과 온정이 더 컸다.

그러던 어느 저녁, 모든 걸 시험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날 저녁 식사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시작되었다. 만청이 린이가 좋아하는 마파두부와 계란볶음밥을 준비하고 식탁에 앉았을 때, 거실 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둘의 손이 동시에 멈췄다.

"여보세요? 나 왔소."

임 선생의 목소리가 현관에서 울렸다. 만청이 얼어붙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린이도 얼른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 시간에 아버지가 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보통 출장이나 늦은 모임으로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 벌써 식사 중이었구먼. 나도 아직 저녁을 못 먹었는데, 잘 됐네."

임 선생은 피곤한 기색으로 정장 차림 그대로 식탁 쪽으로 걸어왔다. 만청이 얼른 마음을 가라앉히고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일찍 들어오셨어요. 밥 더 차려드릴까요?"

"그러지. 냄새가 아주 좋구먼."

임 선생은 린이의 맞은편, 아내의 옆자리에 앉았다. 린이는 잠시 굳은 표정을 풀고 평소처럼 아버지에게 인사했다.

"아버지, 다녀오셨어요."

"그래, 요즘 학업은 어떠냐?"

"잘하고 있어요."

짧은 대답을 주고받는 동안 만청이 부엌으로 들어가 밥과 수저를 더 가져왔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식탁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자, 세 사람의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처음 몇 분은 평범한 대화가 오갔다. 임 선생이 회사 근황을 짧게 이야기하고, 린이가 대학 수업에 대해 몇 마디 답했다. 만청은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식탁 아래에서 느닷없이 따뜻한 감촉이 그녀의 발끝에 닿았다.

만청은 젓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녀는 표정을 바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린이의 발끝이 그녀의 슬리퍼 위로 살짝 올라왔다. 그녀는 살짝 발을 뒤로 뺐지만, 린이가 다시 살며시 따라왔다. 발가락이 그녀의 발등을 천천히 훑었다.

그녀는 재빨리 린이를 흘끗 보았다. 그는 태연하게 아버지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다.

"전공 공부는 좀 어렵긴 한데, 교수님이 괜찮으셔서 따라갈 만해요."

"그래, 좋은 교수 만난 건 복이야."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른 채 밥을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청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긴장과 공포,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자극이 그녀의 혈관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밥알을 세며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린이의 발이 그녀의 발목을 따라 종아리께로 살짝 올라왔다. 따뜻한 온기가 스타킹을 뚫고 전해졌다.

"만청 씨, 이 마파두부 참 맛있네. 평소보다 더 잘한 것 같아."

임 선생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아내를 바라봤다. 만청은 깜짝 놀라 딸꾹질을 삼켰다.

"아… 네, 오늘 고추기름을 조금 바꿔 봤어요."

목소리는 가까스로 평온을 유지했다. 그녀는 몰래 식탁 아래에서 발을 빼내려고 다리를 살짝 움직였다. 그러자 린이의 발이 잠시 떨어졌다가, 곧바로 그녀의 다른 발 위에 부드럽게 포개어졌다. 압박이 아닌, 애무처럼. 만청의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밥을 먹는 척하며 숟가락을 입에 물었다. 볼이 뜨거워졌다.

린이는 태연하게 아버지에게 디저트 이야기를 꺼냈다. 만청은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잠시 후, 린이의 발이 떨어져 나갔다. 그녀의 다리는 아직도 그 온기를 기억하며 미세하게 떨렸다.

식사가 끝나고, 임 선생은 피곤하다며 먼저 침실로 올라갔다. 만청이 설거지를 시작하려 하자 린이가 조용히 다가왔다.

"괜찮아요?"

그의 속삭임에 만청은 고개를 저었다.

"너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아버지 앞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라기보다 두려움에 가까웠다. 하지만 린이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무서웠지만… 짜릿했어요. 당신도 그랬잖아요."

만청은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부정할 수 없었다. 공포만큼이나 자극적이었던 그 순간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설거지를 계속했다. 물소리만이 부엌에 차갑게 흘렀다. 린이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감추었다.

며칠 후, 주말 저녁이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리다 저녁 무렵에 그쳤다. 린이는 저녁을 먹고 나서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야경 보러 갈까요? 날씨가 개서 야경이 참 예쁠 것 같아요."

만청은 잠시 망설였다. 이 시간에 밖에 나가는 건 위험 부담이 있었다. 하지만 이 집 안에 갇혀 지내는 은밀함에 지쳐가던 참이었다.

"그래, 잠깐이면."

그녀의 동의에 린이는 얼른 차 키를 챙겼다. 만청은 얇은 재킷을 걸치고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었다. 둘은 조용히 집을 나섰다. 차에 오르자, 린이가 라디오를 켜고 부드러운 재즈 음악을 틀었다.

차는 한강 쪽으로 향했다. 대로변을 따라 달리며 가로등 불빛이 차창을 스치듯 흘러갔다. 만청은 조수석에 앉아 흘러가는 거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린이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손을 내려 그녀의 손을 찾았다. 그녀는 손을 빼지 않았다. 손가락이 천천히 깍지 끼였다.

차는 남산 공원 주차장에 멈췄다. 늦은 저녁이라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도시의 불빛이 저 멀리 반짝이며 작은 은하수를 이루고 있었다. 린이가 시동을 끄자, 고요함이 차 안을 감쌌다. 재즈 선율만이 은은하게 흘렀다.

"저기 보여요? 저기가 우리 학교 쪽인데."

린이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만청이 몸을 기울여 그 방향을 바라봤다. 그 순간, 린이가 몸을 돌려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와 마주했다.

어둠 속에서 린이의 눈빛이 깊고 진지하게 빛났다. 만청은 그 눈빛에 끌리듯 살짝 입술을 열었다. 린이가 다가갔다. 그들의 입술이 포개어졌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운 접촉이었다. 하지만 곧 깊어졌다. 린이가 혀를 밀어 넣자 그녀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감싸고 다른 손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두 사람 사이의 콘솔 박스가 거추장스러웠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숨소리와 입맞춤 소리가 조용한 차 안을 채웠다.

오랜 키스가 끝나고, 린이는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기댔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왜 울어요?"

"모르겠어… 그냥."

만청이 고개를 저었다. 린이는 그녀의 눈가를 엄지로 닦아주며 조용히 말했다.

"나 계속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이렇게 도망치듯이 아니라, 정말로."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만청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이성이 모든 걸 부정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결정을 내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린이가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대답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내 옆에 있어 준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만청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마지못해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아래로 내리깔렸다. 린이는 그녀의 손을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녀의 손등 위로 그의 따뜻한 숨결이 닿았다. 그날 밤, 그들은 차 안에서 오랫동안 손을 잡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만청은 조금씩 변했다. 가면을 쓰고 있다는 느낌은 여전했지만, 그 가면조차 예전보다 가벼워졌다. 아니, 어쩌면 가면이 진짜 얼굴이 되어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어느 평일 아침, 린이가 평소처럼 일어나 내려왔을 때, 식탁 위에는 그가 영국에서 먹던 식빵과 스크램블 에그, 베이컨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만청이 앞치마를 두른 채 부엌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린이가 놀라며 식탁을 바라봤다. 만청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며칠 전에 인터넷에서 배웠어. 원래 이런 건 못 하는데. 먹어 봐, 입에 맞을지 모르겠다."

린이는 자리에 앉아 포크를 들었다. 계란을 한 입 베어 물자 버터 향이 입 안에 퍼졌다.

"맛있어요. 정말."

그녀는 안도한 듯 살며시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부엌으로 돌아가지 않고 린이의 맞은편에 앉아 그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눈빛에는 엄마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다정하고도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린이는 그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식사를 이어갔다.

어느 주말, 그녀는 일찍 일어나 다림질을 하고 있었다. 거실 한쪽에 다리미판을 펴고 린이의 셔츠를 조심스럽게 다렸다. 린이는 소파에 느긋이 앉아 책을 읽다가 그 광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녀는 다림질에 집중하느라 혀끝을 살짝 깨물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그녀의 옆모습을 따뜻하게 감싸고, 스팀 다리미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뭐 해요?"

린이가 물었다.

"네 셔츠 구겨져서. 앞으로 중요한 날엔 이렇게 입어."

그녀는 다림질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린이는 책을 덮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등 뒤에 서서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짝 포갰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돼요. 이제 내가 알아서 할게요."

"됐어, 내가 하는 게 더 편해."

만청이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밀어냈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바빴다. 셔츠의 칼라를 세우고, 소매의 작은 주름까지 펴가며, 마치 예술품을 다루듯 정성스러웠다. 그녀가 이 집에 온 지 3년이 되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진정한 아내이자, 무언가 깊은 애정을 쏟는 여자처럼 느껴졌다.

린이는 더 이상 말리지 않고 그녀가 다린 셔츠를 걸치는 상상을 했다. 그 셔츠에는 다리미 열기와 함께 그녀의 온기가 배어 있을 터였다. 그는 웃음을 참으며 다시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마음속 방어선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녀는 이제 그걸 인정했다. 매일 아침 그를 위해 커피를 내리고, 그의 옷을 다리고, 그의 저녁 식탁을 준비하는 일들이 그녀에게 자연스러워졌다. 의무감이 아닌, 기쁨이었다. 지난 몇 달간의 혼란과 죄책감은 여전히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보다 더 강한 것이 그녀를 움직였다. 함께하는 일상이 주는 충만감. 그리고 어둠 속 그와의 시간이 주는 벅찬 온기.

그날 밤, 린이는 다시 그녀의 방을 찾았다. 문을 열자 만청은 창가에 서 있지 않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를 기다렸다는 듯이.

"왔니?"

그녀가 조용히 묻자 린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바닥을 펴서 자신의 뺨에 대었다.

"만청 씨, 이제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게요. 당신도 이제 도망치지 마요."

만청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손끝이 그의 광대뼈를 쓸었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마침내 린이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그를 꼭 껴안았다. 세상의 어떤 규칙과 도덕도 이 포옹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린이의 등 뒤에서 손을 깍지 끼며 깊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소리 안에는 항복과 해방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풍파의 시작

욕실 불빛이 창백하게 소만청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손에 쥔 작은 플라스틱 막대기를 바라보는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약국에서 몰래 사 올 때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설마 하는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이제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른 두 개의 붉은 선이 그 모든 막연한 기대와 부정을 산산조각내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변기 옆 타일 바닥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감촉이 엉덩이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임신. 의붓아들의 아이를 가졌다. 이 사실이 아직 실감 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견딜 수 없을 만큼 생생하게 다가왔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신음 같은 숨을 내쉬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눈물이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목소리는 너무나 작고 힘이 없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서른일곱, 남편과의 사이에서도 아이를 갖지 못했는데, 이제 이런 식으로 임신을 하다니. 운명의 잔인한 장난인지, 아니면 지난 몇 달간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벌인지 알 수 없었다.

테스트기를 휴지통 깊숙이 감추고, 찬물로 몇 번이고 얼굴을 씻었다. 눈가가 붉게 부풀어 오른 것을 숨기기 위해 냉수를 오래도록 얼굴에 뿌렸다. 욕실 문을 나서기 전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티를 내서는 안 된다. 아직은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다.

그날 저녁 내내 소만청은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 화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볼륨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춰져 있었고, 화면 속 등장인물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조차 그녀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속이 계속 울렁거렸고,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만청 씨, 무슨 일 있어요?"

임일의 목소리에 소만청은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그가 언제 다가왔는지도 몰랐다. 검은 티셔츠에 면바지를 입은 그의 모습이 소파 옆에 서 있었다. 젊고 단단한 체구, 깊고 그윽한 눈빛. 그 눈으로 지금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소만청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저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잠겼고, 시선은 좀처럼 그를 마주하지 못했다.

임일은 말없이 그녀 곁에 앉았다. 가까워진 체온에 소만청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조금 움찔했다. 그는 그런 소만청의 옆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평소 단정하게 묶었던 머리는 오늘따라 풀어져 몇 가닥이 흘러내렸고, 눈 밑에는 옅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입술 색깔도 안 좋고, 몇 시간째 멍하니 있고. 아까 저녁도 거의 못 드셨잖아요."

조용하지만 집요한 물음이었다. 소만청은 대답 대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어나서 방으로 가려는 그녀의 손목을 임일이 살며시 잡았다.

"제게 말 못 할 일인가요?"

그의 손길에는 조심스러운 배려가 깃들어 있었지만, 동시에 놓치지 않겠다는 완강함도 숨어 있었다. 소만청은 손목을 빼려다 멈칫했다. 눈을 감았다 뜨니 또다시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사실을 감당할 힘이 자신에게 있을까. 망설이는 그 틈을 임일은 놓치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오래 계셨잖아요. 쓰레기통에… 그게 있더라고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소만청의 눈이 크게 떠지며, 동공이 흔들렸다. 임일의 손목을 잡은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무슨 말이야, 그게…."

말끝을 흐리는 소만청을 향해 임일은 몸을 더 기울였다. 그의 얼굴에서도 평소의 여유로운 미소가 사라지고 진지함만이 남아 있었다.

"임신한 거죠? 내 아이예요."

단호한 어조로 말하는 임일의 말에 소만청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마시는 공기마저 무거웠다. 그토록 감추고 피하고 싶었던 진실이 한순간에 벽을 허물고 쏟아져 나왔다.

임일은 잠시 말을 잊은 듯 멍한 표정으로 소만청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 복잡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소만청은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두 팔로 끌어당겼다.

"고마워요, 만청 씨."

갑작스러운 포옹에 소만청은 숨이 막혔다. 그의 품은 뜨거웠고, 떨고 있는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임일의 손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등을 쓸었다.

"기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잠깐은 아무 생각이 안 났어요. 그런데 당신이 이렇게 떨고 있으니까…. 이건 절대 나쁜 일이 아니에요. 내가 다 책임질게요. 나, 이제 열여덟이지만, 그래도 남자예요."

소만청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격렬하게 저었다. 따뜻한 온기가 싫지 않았지만, 현실은 너무도 냉정했다.

"안 돼… 안 된다고, 임일아."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울먹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두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약하게 밀어내며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게 물들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좋은 일이니? 현실을 봐. 나는 네 아버지의 아내야. 법적으로 네 어머니란 말이야. 이 사실을 누가 받아들여, 우리를 용서해주겠어?"

"아버지께 말씀드릴게요."

임일의 단호한 목소리에 소만청은 충격을 받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걸 솔직히 말할 거예요.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하시든, 나는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 이 아이도, 그리고 당신도, 그냥 놓을 수가 없어요. 도망치고 숨어 다니는 건 이미 불가능해요. 당신부터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잖아요."

"절대 안 돼!"

소만청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그를 막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팔을 움켜쥐며 몸을 떨었다.

"네 아버지는 착한 분이야. 나도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는데… 그분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큰 상처를 받겠니. 안 돼. 이 사실은 결코 그분에게 알려선 안 돼. 아무에게도 알려선 안 돼."

거실 공기가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아직 어둡고 혼란스러운 현실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하는 침묵만이 흘렀다. 소만청의 단호한 거절과 애원 섞인 목소리는 임일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녀를 더 강하게 밀어붙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바로 그때, 거실 구석 탁자 위에 놓인 휴대전화가 울렸다. 벨소리가 정적을 찢고 날카롭게 공간을 울렸다. 소만청은 화들짝 놀라며 전화를 바라보았다. 액정 화면에 뜬 이름은 ‘여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소만청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집어 들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임일도 긴장한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 보세요."

목소리를 최대한 평온하게 가다듬어 말했지만, 자신의 귀에도 부자연스럽게 들렸다.

“만청 씨, 나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편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분하고 온화했다. 그 낯익은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죄책감을 찔러왔다.

“아, 네…. 무슨 일이세요?”

“일정이 좀 변경됐어. 원래 한 달 반쯤 걸릴 줄 알았던 프로젝트인데, 예상보다 일찍 마무리가 될 것 같아. 아마 다음 주면 귀국할 수 있을 거야.”

순간 소만청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음 주라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일단 집에 들어가면 이번에는 꽤 오래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적어도 한 달 정도는 집에서 자네랑 같이 있고 싶네.”

소만청은 숨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앞이 아득해지며 손에 힘이 풀렸다. 휴대전화가 미끄러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임일이 즉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손에서도 긴장이 전해져 왔다.

“만청 씨? 듣고 있어?”

“아… 네, 네. 알겠어요…. 조심해서 들어와요.”

겨우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휴대전화를 내려놓는 소만청의 손은 마비된 듯 경직되어 있었다.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아버지가… 한 달 동안 집에 계신대.”

임일도 굳은 표정이었다. 그의 팔이 소만청의 어깨를 감쌌다. 따뜻함이 전해졌지만 불안감까지 잠재울 수는 없었다. 이제 단순히 마음의 죄책감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위기가 그들 앞에 닥쳐오고 있었다. 서로의 숨결이 엉키고, 한동안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거실 창밖으로 저녁 바람이 불어와 커튼을 살짝 흔들었다. 도시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 깜박이고 있었다. 이제 그 평화로운 풍경조차 그들에게는 폭풍 전의 고요함처럼 느껴졌다. 숨 쉴 틈 없이 밀려드는 파도 앞에 선 듯, 두 사람은 서로를 붙잡은 채 거대한 풍파의 시작을 조용히 마주하고 있었다.

수호의 약속

아버지의 발소리가 현관에서 들려오자, 임일은 소만청의 손을 살며시 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해야 해."

소만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얼굴에 남아 있던 긴장과 설렘을 애써 감추며 평소처럼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임일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 한구석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만청 씨, 나 왔어요."

아버지 임중호의 목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소만청은 소파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식사는 하셨어요?"

"응, 밖에서 간단히 먹었어. 너 얼굴이 좀 안 좋아 보이네. 어디 아파?"

임중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아내의 얼굴을 살폈다. 소만청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그냥 요즘 잠을 좀 못 자서 그래요."

임일은 자신의 방에서 그 대화를 엿들으며 주먹을 꼭 쥐었다. 소만청의 얼굴이 안 좋아 보인 건 사실이었다. 요즘 들어 그녀는 아침마다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했고, 식욕도 부쩍 떨어져 있었다. 임일은 그 원인을 알고 있었다. 바로 두 달 전, 아버지가 출장을 떠나고 단둘이 보낸 그 비 오는 밤 이후부터였다.

다음 날 아침, 소만청은 평소보다 일찍 깨어났다. 속이 메슥거리는 느낌에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화장실로 뛰어갔다. 그녀가 구토하는 소리가 복도를 따라 흘러나왔다. 임일은 그 소리에 잠에서 깨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아버지가 출근하자, 임일은 재빨리 약국으로 향했다. 입덧에 좋다는 약을 사기 위해서였다. 약사가 건넨 약봉지를 받아들며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혹시라도 누군가 이 약을 산 이유를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두려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두려움은 소만청의 건강이었다.

집에 돌아온 임일은 조용히 부엌으로 들어갔다. 냉장고에서 쌀과 닭고기를 꺼내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영국에서 자란 덕에 요리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약한 불에 은근히 끓여내는 죽에서 은은한 향이 퍼져 나갔다.

"뭐 하는 거야?"

갑자기 들려온 아버지의 목소리에 임일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임중호가 부엌 입구에 서서 의아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출근했다고 생각했는데, 서류를 깜빡 잊고 집에 다시 들른 모양이었다.

"아, 그냥... 죽이 먹고 싶어서요. 요즘 소화가 잘 안 돼서."

임일은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약봉지는 바지 주머니 안에 있었지만, 그 작은 봉지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질 정도로 예민하게 인식되었다.

"그래?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너도 몸 조심해라."

임중호는 아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서류를 챙겨 다시 집을 나섰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임일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오후, 임일은 죽과 약을 들고 소만청의 방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안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다시 한 번 노크하자, 이번에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소만청은 침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임일은 조용히 다가가 침대 옆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몸은 좀 어때요? 이거 뜨거울 때 드세요. 약도 사왔어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쟁반을 바라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죽과 정성스럽게 포장된 약봉지. 그녀의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임일 씨... 나는..."

말을 잇지 못하는 소만청의 손을 임일이 조용히 잡았다.

"말하지 않아도 돼요. 일단 죽부터 드세요. 건강이 가장 중요하니까."

소만청은 숟가락을 들어 천천히 죽을 떠먹었다. 한 숟갈, 또 한 숟갈 삼키는 그녀의 목울대가 움직일 때마다 임일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보호 본능을 느꼈다.

며칠 후, 아버지가 다시 출장을 떠난 밤, 그들은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소만청의 손에는 산부인과에서 받아온 것으로 보이는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확실해요. 임신 8주째래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깨어질 듯한 유리처럼 가늘고 위태로웠다. 임일은 조용히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무서워요.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걸 생각하면 겁이 나요. 하지만..."

소만청은 말을 멈추고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 속에는 모순된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뱃속에 자라나는 생명에 대한 본능적인 사랑, 그리고 그 생명을 둘러싼 윤리적 장벽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낳고 싶어요. 제 안에 있는 이 작은 생명을..."

임일은 소만청의 양손을 꼭 잡았다. 그의 눈빛은 열여덟 소년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단호하고 성숙했다.

"어떤 결정을 하든 그건 만청 씨의 선택이에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저는 어떤 결정이든 지지할 거라는 거예요."

"하지만 이건..."

"만약 만청 씨가 이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다면, 저는 평생을 걸고 만청 씨와 아이를 책임질 거예요. 아직 어리고 미숙하지만, 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요."

그의 말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밤공기가 차가워지고 깊은 어둠이 거실을 감쌀 무렵, 소만청은 임일의 품에 안겨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가 들썩일 때마다 임일은 더욱 세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나는 나쁜 여자예요. 어떻게 아들 같은 사람과 이런 관계를... 그리고 이제는 아이까지... 나는 분명 나쁜 사람이에요."

소만청의 목소리는 흐느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책망하면서도 그 품에서 떠나지 못했다. 외로움과 갈망이 뒤얽힌 그녀의 감정은 이미 제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있었다.

임일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조용히 속삭였다.

"사랑하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에요. 만약 우리의 감정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라면... 그리고 만청 씨, 당신은 절대 나쁜 여자가 아니에요. 오히려 너무 따뜻한 사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하는 거잖아요."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젖은 그녀의 눈이 임일을 바라보았다. 그 깊은 눈동자 속에서 어떤 확고한 결심 같은 것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나... 결정했어요. 이 아이를 낳기로."

그 순간 임일은 소만청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결정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고마워요, 만청 씨. 약속할게요. 당신을 절대 혼자 두지 않겠다고."

소만청은 그의 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자기 배 위로 올라갔다. 아직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는 그곳에 분명 어떤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금지된 사랑 속에서 싹튼 작은 생명.

"비밀로 해야 해요. 세상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요. 이 아이가 자라서도 이 진실을 알게 해서는 안 돼요."

소만청의 목소리는 이제 더욱 단호해졌다. 한번 결정을 내리자, 오히려 그녀의 독립적이고 강한 성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물론이에요. 이것은 오직 우리만의 비밀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도 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임일도 마찬가지였다. 부드럽고 섬세했지만, 그의 내면에는 집요함이 숨겨져 있었다. 한번 마음을 정하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 고집 센 성격은 어쩌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 집요함이 소만청과 아이를 지키는 데 필요했다.

"당장은 어려울지 몰라도, 우리가 함께 풀어나가면 반드시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우리 셋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의 말에 소만청은 비로소 이 작고도 큰 소년이, 아니 이제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될 남자가 얼마나 단단한 의지를 가졌는지 깨달았다.

두 사람은 새벽이 올 때까지 서로를 꼭 붙잡고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는 어둠이 서서히 걷히며 희미한 여명이 퍼지기 시작했다. 세상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작은 거실에서 맺어진 약속은 너무도 은밀하고도 깊은 것이었다.

소만청은 마음속 깊이 죄책감을 여전히 안고 있었다. 아마 평생 그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감정, 즉 생명을 지키려는 모성 본능과 임일에 대한 믿음이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임일 씨, 이 아이가 태어나면... 우리 이 아이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 건가요?"

그녀의 질문에 임일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일단은 우리가 지켜야 해요. 언젠가 때가 오면... 하지만 그때도 상처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죠."

소만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임일의 손이 그녀의 배 위로 살며시 올라갔다. 두 사람의 손이 겹쳐진 그곳에서 작은 심장이 이미 뛰고 있었다. 세상의 시선과 도덕의 잣대를 넘어, 그 심장 박동은 분명한 생명의 리듬을 울리고 있었다.

"사랑해요, 만청 씨. 그리고 우리 아이도."

아직 어린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소만청은 눈물을 닦으며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가둬두었던 말을 마침내 꺼냈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그들의 이마가 서로 맞닿았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고, 두 사람의 호흡이 하나로 섞였다. 이제 그들은 단순한 연인의 관계를 넘어서, 하나의 생명을 함께 지키는 공범자이자 수호자가 되어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들이 맹세한 그 약속만은 결코 깨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어떤 고난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