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살이 창문 틈새로 비집고 들어와 거실 바닥에 길쭉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주택은 소파에 걸터앉아 신발 끈을 매만지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대학 강의가 오후에나 시작되는 날이라 여유가 넘쳤다. 부모님이 외지에서 일한 지 2년째, 집은 삼 남매의 자유로운 공간이 되어 있었다. 큰 누나 주설은 벌써 직장에 나갈 채비를 하느라 분주했고, 막내 여동생 주만만은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느라 평일에는 얼굴 보기 힘들었다.
“택아, 아침은 꼭 챙겨 먹어. 내가 어제 사다 둔 빵이 식탁 위에 있어.”
주설이 방에서 나오며 긴 생머리를 하나로 묶으며 말했다. 옅은 화장을 한 얼굴이 피곤해 보였지만, 동생을 챙기는 눈빛은 여전히 다정했다. 그녀는 회사원 특유의 깔끔한 블라우스와 슬랙스 차림에 낮은 굽의 구두를 신고 있었다. 주택은 고개를 들지 않고 대꾸했다.
“응, 누나도 조심해서 가. 요즘 야근 너무 힘들다며. 얼른 가서 자리라도 잡아.”
주설은 작게 웃으며 현관으로 걸어갔다. 손에 든 가방을 한 번 고쳐 쥔 그녀가 잠시 멈춰 서서 거실을 둘러봤다. 가족 사진이 놓인 선반 위에는 먼지가 살짝 쌓여 있었고, 텔레비전은 꺼진 채 고요했다. 평범한 아침 풍경이었지만, 그녀의 표정엔 뭔가 알 수 없는 미세한 긴장감이 스쳤다. 곧바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나며 집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주택은 혼자 남은 거실에서 스마트폰을 들었다. 여자친구 유정정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 오전 수업 없으니까 놀러 갈까? 너희 집에 갈까 해 ♡’. 주택은 귀가 살짝 벌개지며 답장을 보냈다. ‘그래, 얼른 와. 빵이라도 구워줄게.’ 그녀는 주택과 같은 대학에 다녔지만 학과가 달랐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귀어 온 사이였고, 요즘은 거의 매일같이 이 집을 드나들었다.
30여 분쯤 지나자 초인종이 울렸다. 주택이 긴장을 풀고 달려가 문을 열었다. 밖에는 유정정이 서 있었다. 짙은 남색의 JK 교복을 입고, 가슴팍에는 리본이 단정히 매여 있었으며, 발목까지 오는 흰색 레이스 단발 양말이 가느다란 종아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에 작은 쇼핑백을 들고 다른 손으로 치마 자락을 살짝 잡으며 생긋 웃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나 세워 두는 거 아니야?”
“미안, 누나 좀 챙기느라.”
주택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유정정은 익숙한 듯 거실로 걸어가 소파에 앉으며 양말을 신은 발을 바닥에 톡톡 굴렀다. 주택은 부엌으로 가 미리 사둔 빵을 접시에 담고 딸기잼을 곁들여 내왔다. 그녀가 반색하며 빵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택아, 너 요즘 부쩍 살갑다? 무슨 꿍꿍이 있어?”
“그냥… 네가 매일 와 주니까 고맙지. 집이 텅 빈 느낌이라 심심했거든.”
주택은 그녀 옆에 바짝 붙어 앉으며 말했다. 유정정의 교복 치마 자락이 소파 쿠션에 살짝 구겨졌다. 그녀가 빵을 한입 베어 물자 잼이 입가에 묻었고, 주택이 손수건을 집어 닦아주며 장난스레 웃었다. 유정정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에이, 더러워. 내가 할게. 근데 이거 봐, 새로 산 양말이야. 레이스 부분이 예쁘지 않아?”
그녀가 발을 살짝 들어 보이자, 양말의 섬세한 무늬가 햇빛에 반짝였다. 주택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발목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웃고 떠들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텔레비전에서는 오전 음악 프로가 흘러나왔고, 창밖에는 늦봄의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모든 게 지극히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행복한 가정의 한 단면 같았다.
바로 그 무렵, 집에서 몇 개의 블록 떨어진 번화가 거리에서 주설은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회사로 향하는 길이었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등 뒤에 신경이 쓰였다. 사람들 틈에 섞여 어딘가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일종의 시선, 끈적거리고 집요한 눈길이 그녀의 뒷모습을 훑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돌아서서 인파를 살폈지만, 의심스러운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 유모차를 민 젊은 엄마, 이어폰을 낀 학생들뿐이었다. 그녀는 어깨를 한 번 움찔하고는 버스에 올랐다.
사실, 그 시선의 주인은 멀지 않은 골목 입구에 서 있었다.
신비한 사람은 어두운 긴 외투를 입고, 얼굴 절반을 모자와 마스크로 가린 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가 조금씩 고개를 틀어 주설이 탄 버스의 뒷모습을 응시할 때, 단단한 눈동자에 이상한 빛이 스쳤다. 주설의 바쁜 발걸음, 약간 굽은 어깨, 그리고 가방을 꼭 쥔 손의 습관적인 동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마치 포식자가 먹잇감의 패턴을 연구하듯 조용하고 치밀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검은 장갑을 낀 손가락이 공중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한 그 움직임은 순간의 바람에 실려 사라졌다. 그는 주설의 집 주소와 그녀의 일상 루틴을 이미 어렴풋이 꿰뚫고 있는 눈치였다. 거리에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차 경적 소리,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뒤섞여 요란했지만, 그에게만은 모든 것이 정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주설… 네 안에 잠든 문을 열어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가 낮고 느릿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은 이내 주변 소음에 삼켜져 아무도 듣지 못했다. 그는 곧바로 골목 안으로 몸을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외투 자락이 흔들리며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고, 이내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녹아들어 사라졌다. 누구도 그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잠시 머물렀던 자리에는 싸늘한 기운이 한순간 맴돌 뿐이었다.
한편, 주설은 버스 안에서 좌석에 몸을 기대며 깊은 호흡을 내뱉었다. 이유 없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녀는 속으로 되뇌었다. ‘피곤한가 보다. 요즘 잠을 설쳐서 예민해졌어.’ 그녀는 스마트폰을 꺼내 동생 주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정정이 왔니? 점심은 잘 챙겨 먹어.’ 답장은 곧바로 왔다. ‘응, 지금 같이 있어. 누나 걱정 붙들어 둬.’ 그녀는 짧게 웃음을 터뜨리며 폰을 가방에 넣었다. 그녀의 마음은 그 순간만큼은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하지만 그 평온은 오래가지 못할 운명이었다. 집 안에서는 여전히 유정정과 주택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유정정은 양말을 벗고 맨발로 소파에 올라 앉아 주택의 어깨에 기댔다. 그녀의 발가락이 쿠션의 솔기를 살짝 긁었고, 주택은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천천히 키스를 나눴다. 공기에는 달콤한 딸기잼 향과 젊은 연인들의 체온이 배어들었다. 창가의 커튼이 미풍에 살랑이며 그림자를 춤추게 했고, 모든 게 한 폭의 그림처럼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바깥 세상의 그림자는 이미 조용히 다가와 그 행복의 가장자리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신비한 사람은 언제든 집 안의 평화를 깨부술 힘을 품고, 다음 행보를 위한 준비를 서서히 갖추고 있었다. 주설의 불안한 예감은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다가오는 폭풍의 전조였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