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제 전투의 폐허는 마치 거대한 짐승의 뱃속 같았다. 부서진 기둥과 무너진 벽돌 사이로 휘몰아치는 마령의 기운이 아직도 남아 있었고, 공기 중에는 피와 살이 타는 듯한 악취가 감돌았다. 혼풍은 피 묻은 검은 로브를 휘날리며 돌무더기 위를 걸어갔다. 그의 눈동자는 어둑한 밤하늘처럼 깊고 음산했다.
"이런 대규모 전투... 결국 나 혼자 살아남았군."
그가 중얼거렸다. 소염과의 싸움에서 그는 큰 부상을 입었지만, 적어도 숨을 쉬고 있었다. 그가 발밑에 떨어진 반쯤 부서진 돌을 걷어차자, 갑자기 돌 아래에서 희미한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
혼풍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는 재빨리 돌을 치우고 그 아래에서 낯선 문양이 새겨진 검은 구체를 발견했다. 구체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의 손에 닿자마자 따뜻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여신 공략 시스템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기계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인 혼풍을 감지했습니다. 시스템이 주인에게 무한한 힘을 제공할 것입니다. 조건: 소염 주변의 모든 여성들을 성공적으로 공략하십시오.>
혼풍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번졌다. "소염... 그 불쌍한 놈. 실력은 뛰어나지만 주변 여자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
그는 시스템이 제공하는 정보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첫 번째 대상은 소의선. 온화하고 선량한 의사, 소염의 소꿉친구. 그녀는 소염이 장기간 무시한 탓에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의선... 시작은 그녀로군."
혼풍은 상처를 치료할 약초를 찾는 척하며 기운을 감추고 소의선이 있는 마을로 향했다.
며칠 후, 혼풍은 상처 입은 여행자로 변장해 소의선의 작은 진료소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문이 열리자 긴 흑발을 단정히 묶고 온화한 미소를 띤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의 눈에는 걱정과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저... 마물에게 공격당해 상처를 입었습니다. 치료해 주실 수 있나요?"
혼풍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팔에 난 깊은 상처를 내밀었다. 물론 그것은 그가 시스템의 힘으로 만든 가짜 상처였다.
"어서 들어오세요. 바로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소의선은 그를 안으로 안내하며 약재를 준비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상처를 씻고 약을 바르며 말했다.
"이 상처는 깊지만 제대로 치료하면 금방 나을 거예요. 참으세요."
"감사합니다. 당신은 정말 뛰어난 의사시군요."
혼풍이 감탄하듯 말했다. 소의선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수줍게 웃었다.
"천만에요. 의사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녀가 붕대를 감는 동안 혼풍은 그녀의 손동작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 손은 부드럽지만 확실한 힘이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대화를 이끌기 시작했다.
"이 마을은 평화로워 보이네요. 혼자 사시나요?"
소의선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네... 가끔 외로울 때도 있지만,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보람을 느껴요."
"그런 분이 왜 혼자일까요? 당신처럼 아름답고 자상한 분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원할 텐데."
혼풍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그 안에는 이해와 공감이 담겨 있었다. 소의선은 얼굴이 약간 붉어졌지만 곧 애써 표정을 감췄다.
"할 일이 많아서요. 그리고... 저는 이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어요."
말을 마치자 그녀의 표정에 그늘이 드리웠다. 혼풍은 눈치챘다. 그 '누군가'가 바로 소염이라는 것을.
그날 이후 혼풍은 자주 진료소를 찾았다. 처음에는 상처 치료를 핑계로, 나중에는 단순히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녀가 좋아하는 차를 가져오고, 진료소를 청소하는 것을 도왔다. 그는 그녀가 하는 모든 작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은 손님이 없으시네요?"
혼풍이 차를 마시며 물었다. 소의선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네, 요즘은 전쟁 때문에 다치신 분이 많았는데... 모두 회복하셨어요. 다행이죠."
그녀의 말투에는 미묘한 허전함이 섞여 있었다. 혼풍은 재빨리 그 기회를 잡았다.
"그동안 쉬시는 것도 좋을 거예요. 저도 여기서 이렇게 좋은 분과 대화할 수 있어서 참 기쁩니다. 당신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시는군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부끄럽네요."
소의선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동안 그녀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은 적이 거의 없었다. 소염은 항상 수련과 임무에 바빴고, 그녀에게는 늘 차가운 등만 보여줬다. 하지만 혼풍은 달랐다. 그는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고, 그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어느 날 저녁, 혼풍은 그녀에게 작은 꽃다발을 건넸다.
"진료소 앞에 핀 야생화예요. 당신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요."
소의선은 꽃다발을 받아들고 잠시 말을 잃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혼풍은 놓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이런 선물을 받지 못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당신 같은 사람은 항상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요. 다른 사람을 돌보느라 자신을 돌보지 않는 당신을 보면, 누군가 당신을 더 잘 돌봐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혼풍의 말은 달콤했지만 그 안에는 계산이 숨겨져 있었다. 그는 시스템이 제공하는 공략 진행도를 확인했다. 소의선의 호감도가 조금씩 상승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의선이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혼풍 씨... 저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시는 이유가 있나요?"
그녀의 눈에는 의심과 기대가 섞여 있었다. 혼풍은 당황하지 않고 부드럽게 웃었다.
"단지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입니다. 숨길 게 없다면, 나는 당신에게 끌리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소의선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꽃잎을 만지작거렸다.
"당신 말이 맞아요... 하지만 그 사람은 나를 제대로 바라봐 주지 않아요."
"기다리는 것이 너무 힘들지 않나요?"
혼풍이 부드럽게 물었다. 소의선은 입술을 깨물었다.
"때로는... 누군가 나만을 위해 존재해 주기를 바랄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생각은 이기적이죠?"
"전혀 이기적이지 않아요. 당신도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자신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혼풍의 말은 마치 칼날처럼 그녀의 마음을 찔렀다. 소의선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흘렀다.
"혼풍 씨... 당신은 저에게 너무 잘해 주세요. 감사해요. 하지만..."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이 결정을 내릴 때까지."
혼풍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소의선의 망설임과 갈등을 이용해 더욱 깊이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날 밤, 혼풍은 자신의 은신처에 앉아 시스템 대시보드를 바라보았다.
<소의선 호감도: 65%>
"아직 멀었군. 하지만 충분히 진행 중이다."
그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이미 소염의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소염이 수련에 집중하느라 소의선을 무시했다는 소문을.
며칠 후, 소의선은 혼풍을 찾아와 말했다.
"혼풍 씨... 저와 함께 산책하지 않을래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혼풍은 순순히 동의했다.
그들은 마을 밖 작은 숲길을 걸었다. 가을의 나뭇잎이 발밑에 쌓여 바스락거렸다. 소의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을 만난 후로, 저는 제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하게 됐어요. 누군가를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쳤지만, 그 누군가는 나를 보지 않더군요."
그녀의 목소리에 쓰라림이 섞여 있었다.
"당신은 충분히 잘해 왔어요."
혼풍이 위로하듯 말했다. 그는 어깨에 걸린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앞으로는 누군가 당신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이 곁에 있을 거예요."
소의선은 그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당신 곁에 있을 때면 좀 더 평화로워져요."
그녀의 말에 혼풍은 내심 기뻐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완전히 이기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의선은 여전히 소염의 마음을 완전히 놓지 않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다른 여자들보다 더 많은 인내가 필요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다가가자."
혼풍이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는 이미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소염의 다른 여자들을 공략하기 위해, 그리고 그 모든 여자들을 하나씩 자신의 품에 안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