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오후였다. 마을 앞 냇가에서는 버들개지가 흩날리고, 참새들이 지붕 위에서 지저귀고 있었다. 팔 살짜리 주봉춘은 마당에서 혼자 팽이를 돌리며 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이 핑 돌더니 온몸에 열이 확 올랐다. 그는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할머니가 발견했을 때 주봉춘은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열은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고, 온몸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온 마을의 의원을 불러왔지만 모두들 고개를 저었다. “이 병은 살아날 가망이 없습니다. 시험해 볼 약도 없습니다.”
할머니는 밤을 새며 울었고, 할아버지는 담배만 물고 한숨을 쉬었다.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셔서 조부모님만이 유일한 의지처였다. 그런데 그마저도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
그때, 하늘에서 한 줄기 신령한 기운이 내려왔다. 구름 위를 날아가던 태백금성이 우연히 지나가다가 땅을 내려다보았다. 천리안으로 본 어린아이의 얼굴에는 죽음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태백금성이 자세히 살펴보니 저 아이는 인연이 있는 존재였다. 마침 그가 이전에 인간 세상에서 퇴치한 돼지 요정의 정수가 아직 소멸하지 않고 하늘에 남아 있었다. 그 정수를 융합시키면 저 아이는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힘을 얻게 될 터였다.
“하늘의 뜻이로다.”
태백금성은 은은하게 빛나는 구슬을 꺼내 주봉춘의 방 안으로 던졌다. 그 구슬이 아이의 가슴 위에 떨어지자 순간 황금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구슬은 아이의 몸속으로 스며들었고, 기운이 온몸의 경락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주봉춘의 얼굴빛이 서서히 좋아졌고, 열도 내려갔다. 사흘 뒤, 아이는 눈을 떴다. 조부모님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주봉춘에게는 조금 다른 점이 생겼다. 귀가 전보다 좀 더 쫑긋해졌고, 이를 갈 때면 어금니가 평소보다 날카로운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겉모습은 여전히 어린아이 그대로였다. 시간이 흘러 주봉춘은 열 살이 되었다.
어느 여름날, 그는 냇가에서 놀고 있었다. 그런데 물가에 이상한 아이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였는데, 비단옷을 입고 있었지만 옷이 다 젖어 있었다. 얼굴은 눈물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주봉춘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너 왜 울어? 길을 잃었니?”
아이를 본 순간 소녀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이 인간 아이의 겉모습 아래 숨겨진 또 다른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돼지 냄새. 그건 요물의 기운이었다. 소녀는 본능적으로 겁에 질렸다. 그녀는 바로 용왕의 외동딸 오령아였다. 아버지와 말다툼을 하다 화가 나서 집을 뛰쳐나와 인간 세상으로 도망쳐 온 것이다.
주봉춘은 소녀가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나쁜 사람 아니야. 배고프니? 우리 집에 가서 찐빵 먹을래? 할머니가 방금 찌셨어.”
그 말에 오령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눈빛을 보았다. 그 눈은 순수하고 맑았다. 용녀는 인간도 아니고, 요괴도 아닌 이 기이한 소년에게서 악의를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용왕의 딸로서 오만한 성격이었지만, 이 순간만은 외로웠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아이는 친구가 되었다. 그해 여름, 그들은 함께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산에 올라 버섯을 캐며 지냈다. 주봉춘은 오령아를 위해 버들가지로 피리를 만들어 주었고, 오령아는 주봉춘에게 용궁에서 먹던 과자를 나눠 주었다. 평화로운 시간은 1년여 동안 이어졌다.
어느 날 저녁, 갑자기 하늘에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폭풍우가 몰아쳤다. 냇물이 갑자기 불어났다. 오령아가 강가에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 물속에서 무수한 해병들이 솟아올랐다. 그 선두에는 용왕이 직접 나타났다. 용왕은 분노에 차서 외쳤다.
“령아! 어서 아버지를 따라 돌아가자!”
오령아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아버지는 항상 저만 가둬 놓으려고 해요!”
“너는 용왕의 딸이야! 인간들과 어울리면 안 돼!”
그때 오령아가 주봉춘의 손을 잡았다. “봉춘 오빠도 인간이 아니예요! 그는 좋은 사람이에요!”
용왕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봉춘을 보았다. 잠시 뜸을 들이다니 혀를 차며 말했다. “저 녀석은 인간도 요괴도 아닌 잡종이다. 너와는 어울리지 않아. 따라와라!”
용왕이 손을 휘저으니 거센 회오리가 일어 주봉춘을 멀리 밀쳐냈다. 오령아는 소리쳐 울었지만 결국 용왕에게 이끌려 물속으로 사라졌다. 그 뒤로 주봉춘은 그녀를 다시 볼 수 없었다. 다만 가끔 강가에 앉아 그가 만든 버들피리를 불며 그리움을 달랠 뿐이었다.
세월이 흘러 주봉춘은 열네 살이 되었다. 그는 또래 아이들보다 체격이 좋았지만 성격은 조용했다. 그해 마을 큰잔치가 열렸다. 어른들이 술상을 벌이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누군가가 주봉춘에게 술잔을 건넸다.
“봉춘아, 너도 이제 다 컸으니 한잔 해야지.”
주봉춘은 술을 거절할 줄 몰랐다. 그는 술잔을 받아 한 번에 들이켰다. 술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얼굴이 빨개졌다. 잠시 후 술기운이 오르자 눈앞이 흐릿해지고 가슴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그때 옆자리에 앉은 마을에서 제일 예쁜 누나가 웃으며 지나가려 했다. 주봉춘의 눈에 그 모습이 들어오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며 참을 수 없는 충동이 솟구쳤다.
그 순간이었다.
주봉춘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코가 불쑥 튀어나오고 귀가 커졌다. 온몸에 거친 털이 돋아나고 얼굴은 그 돼지 요정의 얼굴로 변해 버렸다. 잔칫집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고, 어떤 이는 “돼지 요괴다!”라고 외쳤다. 주봉춘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돼지 발톱이 달려 있었다. 그는 공포에 질려 도망쳤다.
이튿날, 마을 회의가 열렸다. 사람들은 만장일치로 주봉춘을 마을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그 녀석은 주봉춘이 아니야! 틀림없이 돼지 요괴가 아이를 잡아먹고 둔갑한 거야!” 어떤 이는 말했다.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조부모님은 이미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남은 친척들은 오히려 그의 집 재산을 탐내며 그를 몰아내는 데 앞장섰다. “봉춘은 이미 죽었어! 이건 돼지 요괴야! 집과 땅은 마땅히 친척들이 나누어 가져야 해!”
주봉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집에서 나와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홀로 길을 걸었다. 그는 외곽의 폐허가 된 사찰까지 걸어갔다. 거기는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는 곳이었다. 폐사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꼈다.
그때, 앞에서 은은한 빛이 번쩍였다. 고개를 들자 한 노인이 나타났다.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신선 같은 모습이었다.
“두려워하지 마라, 아이야.”
태백금성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네가 병에 걸렸을 때 도움을 준 태백금성이다. 너는 돼지 요정이 아니다. 너는 인간의 몸에 돼지 요정의 정수가 융합된 존재다. 분명 말해 주마, 너는 인간이기도 하고 요괴이기도 하다.”
주봉춘이 울먹이며 물었다. “그럼 나는 계속 이 모습으로 살아야 하나요?”
“아니다. 두 시간 후면 본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과연 두 시간 후, 주봉춘의 얼굴이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놀라며 자신의 손을 만져 보았다. 부드러운 살결이었다. 태백금성이 말을 이었다.
“네가 앞으로 지켜야 할 계율이 있다. 첫째, 술을 마시지 마라. 둘째, 색심을 품지 마라. 이 두 가지 계율을 지키면 다시는 돼지 얼굴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계율을 어기면, 두 시간을 기다리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
태백금성이 팔찌 하나를 꺼내 주봉춘에게 건넸다. “이 팔찌는 항상 차고 있어라. 그래야 인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 심지어 앞의 두 가지 계율을 어겨도 팔찌를 차고 있으면 인간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절대 팔찌를 빼면 안 된다. 만약 빼면, 계율을 어겼을 때 돼지 요정의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돼지 요정의 모습이 유리할 때도 있다. 그 모습일 때 너는 힘이 세지고, 만약 고수나 신선의 가르침을 받으면 법술을 익힐 수도 있다. 위험한 상황에서 그 모습으로 변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다.”
태백금성은 주머니에서 황금 20냥을 꺼내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것은 미안한 마음에 보상으로 주는 것이다. 내가 너의 평범한 삶을 바꾸어 버렸으니…”
말을 마치고 태백금성은 신광과 함께 사라졌다. 주봉춘은 그 자리에 남아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폐사 안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그는 결심했다. 남쪽으로 가기로. 새 삶을 찾기 위해.
사흘 후, 그는 길을 가다가 길가에서 다친 작은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새끼 고양이는 다리가 부러져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주봉춘은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옷에서 헝겊을 찢어 상처를 싸매 주고 먹을 것을 조금 먹였다. 작은 고양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눈은 영롱하게 빛났다. 주봉춘은 고개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작은 것아, 여기서 이러면 안 돼. 나는 앞길이 막막한 사람이라 너를 데리고 갈 수가 없구나. 제발 살아남아라.”
그가 떠난 후, 작은 고양이가 갑자기 희미한 빛을 내뿜더니 젊은 여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녀는 바로 고양이 요정 묘묘였다. 수행 중 적을 만나 다친 것이다. 그녀는 주봉춘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은인… 나는 반드시 은인의 은혜를 갚을 것이다. 언젠가 반드시.”
주봉춘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향하는 곳은 해주성이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이 어떤 펼쳐질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 팔찌가 손목에서 가볍게 흔들릴 때, 마음속 어딘가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