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던 어느 날, 여덟 살 난 주봉춘이 깊은 병에 걸렸다. 열이 펄펄 끓고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애타게 약을 지어 먹였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하늘을 지나가던 태백금성이 구름 위를 거닐다가 우연히 천리안으로 땅을 내려다보았다. 죽어가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태백금성은 인연을 느꼈다. 자기가 최근에 퇴치한 돼지 요정의 정수가 아직 광채를 잃지 않고 있음을 깨달은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 정수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져 주봉춘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주봉춘의 부모님은 아이의 열이 갑자기 내려가는 것을 보고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봉춘은 그날부터 남들과 달라졌다. 가끔 코에서 돼지 특유의 소리가 나고, 밥을 먹을 때면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먹었다. 그래도 자라면서 다른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지냈다.
열 살이 되던 해, 주봉춘은 동네 옆 냇가에서 놀고 있었다. 그때 강가에 혼자 앉아 있는 예쁜 계집아이가 눈에 띄었다. 이상하게도 그 아이는 머리에 작은 뿔이 나 있었다. 주봉춘이 다가가 인사하려는데, 그 아이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뒤로 물러섰다.
"너, 너 돼지야?!" 계집아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주봉춘은 당황했다. 거울을 보면 자신도 가끔 이상한 점을 느끼긴 했지만, 남에게 들킨 적은 없었다. "무슨 소리야? 나는 사람이야!"
계집아이, 그러니까 용왕의 딸 아오리러는 긴장한 채로 주봉춘을 살폈다. 분명 겉모습은 평범한 인간 소년이지만, 요괴의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기운이 사악하지는 않았다. 아오리러는 집을 뛰쳐나와 혼자였기에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미안해. 내가 잘못 본 것 같아. 나는 아오리러라고 해."
"나는 주봉춘이야."
그렇게 두 아이는 친구가 되었다. 아오리러는 용궁의 구속을 싫어해 자주 도망쳐 나왔고, 주봉춘은 그녀와 함께 물놀이를 하고 벌레를 잡으며 시간을 보냈다. 주봉춘은 아오리러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다. 하지만 아오리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봉춘의 순수한 웃음과 다정한 말투에 마음이 열렸다.
어느 날 아오리러가 "너는 사람이 아니면서도 사람보다 더 착하구나"라고 말했을 때, 주봉춘은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던 어느 비 오는 날, 하늘에서 갑자기 많은 게와 새우 병사들이 나타났다. 용왕의 명령으로 아오리러를 찾아온 것이었다.
"공주님, 폐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어서 돌아가셔야 합니다!"
아오리러는 주봉춘의 손을 꼭 잡았다. "나도 네 곁에 있고 싶어."
하지만 병사들은 아오리러를 억지로 끌고 갔다. 주봉춘은 손을 뻗었지만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다. 주봉춘은 며칠 동안 냇가에 앉아 아오리러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주봉춘은 열네 살이 되었다. 마을 잔치에서 처음으로 술을 맛보게 되었다. 어른들이 마시는 막걸리를 한 모금 마셨을 때 얼굴이 빨개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때 마침 맞은편 자리에는 마을에서 가장 예쁘다는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주봉춘은 술기운에 그 아가씨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마음속에 이상한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주봉춘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코가 튀어나오고 귀가 커졌다. 온몸에 거친 털이 돋아나고 돼지의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돼지 요괴다! 돼지 요괴가 나타났다!"
주봉춘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털북숭이 돼지 앞발이 되어 있었다. 무서워서 도망치려 했지만 사람들이 몰려와 돌을 던졌다. 주봉춘은 비틀거리며 마을을 빠져나왔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부모님도 병으로 먼저 가셨다. 남은 친척들이 주봉춘을 찾아와 말했다.
"너는 진짜 주봉춘이 아니야! 그 아이는 이미 죽었어. 너는 돼지 요괴가 그 아이 몸을 빼앗은 거야!"
재산을 탐낸 친척들은 주봉춘의 집을 차지하려는 속셈이었다. 주봉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쫓겨나듯 고향을 떠났다.
길을 걷다가 무너진 사찰에 도착했다. 지붕은 반쯤 무너져 내렸지만 비를 피할 수는 있었다. 주봉춘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울었다. 돼지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 갑자기 환한 빛이 사찰 안을 가득 채웠다. 흰 수염의 노인이 나타났다. 바로 태백금성이었다.
"주봉춘아, 두려워하지 마라."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팔 년 전 너를 살린 자다. 네 속에는 사람의 영혼과 돼지 요정의 정수가 함께 있다. 너는 순수한 돼지 요괴가 아니다. 지금 네 모습은 두 시간만 지나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 것이다."
주봉춘은 울먹이며 물었다. "제가 왜 이렇게 변한 겁니까?"
"술을 마시고 색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술을 멀리하고 색계를 지키면 사람 얼굴을 유지할 수 있다. 만약 다시 변하더라도 두 시간만 기다리면 돌아온다."
태백금성은 손목에 찰 수 있는 은빛 팔찌 하나를 내밀었다. "이 팔찌를 차고 있으면 술을 마시거나 색심을 품어도 돼지 얼굴로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위험할 때는 팔찌를 빼면 돼지 요괴의 힘을 쓸 수 있다. 돼지 요괴는 힘이 세고, 훗날 도사를 만나면 법술도 배울 수 있다. 다만 위급할 때만 사용하거라."
태백금성은 주봉춘에게 금 스무 냥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네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 이걸로 생활을 꾸려가거라."
그러고는 태백금성은 사라졌다. 주봉춘은 팔찌를 차고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과연 두 시간 후에 사람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주봉춘은 남쪽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해주성이라는 큰 도시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길을 걷던 중 길가에서 다친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다리에 피가 흐르고 있어 안쓰러운 마음에 옷자락을 찢어 상처를 감싸주고 물을 먹였다.
고양이는 주봉춘을 바라보며 신비로운 눈빛을 반짝였다. 하지만 주봉춘은 그것이 요괴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고양이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다시 길을 떠났다.
사실 그 고양이는 묘묘라는 이름의 고양이 요괴였다. 큰 요괴와 싸우다가 상처를 입어 인간 모습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상태였다. 묘묘는 주봉춘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은인, 이름도 모르지만 반드시 다시 찾아가 은혜를 갚을게요."
주봉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해주성을 향해 걸어갔다. 봄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앞으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