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실의 커다란 창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수완은 서류를 내려놓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다음 주 팀빌딩 여행. 전 직원 가족 동반이라니, 평소에는 그런 제안을 절대 하지 않을 텐데.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회사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았다. 직원들 사이에 작은 균열이 생기고 있었고, 이를 봉합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특별한 이벤트가 필요했다.
“최 이사, 가족 동반 여행 명단은 다 나왔나?”
수완이 내부 전화를 통해 물었다. 상대방이 명단을 확인하며 대답했다.
“네, 회장님. 직원들 대부분 가족과 함께 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회장님은 혼자 오시는 건가요?”
수완은 잠시 멈칫했다. 혼자. 그 말이 귀에 거슬렸다. 혼자라니.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의 마음속에는 항상 누군가가 있었다. 어린 시절의 그리움 같은 것이었다.
“나는... 참석하지 않기로 했어. 미리 메일 보낼게.”
그녀는 전화를 끊고 책상 위에 놓인 작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는 곱게 말린 단발머리와 동그란 눈을 가진 여자가 보였다. 하지만 너무 작았다. 체구가 왜소해서 자주 아이로 오해받곤 했다. 그게 그녀에게는 달갑지 않으면서도 왠지 모를 쾌감을 주는 순간이었다.
퇴근 후,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옷장을 열었다. 오래전에 샀지만 한 번도 입지 않은 아동복이 걸려 있었다. 분홍색 원피스, 프릴이 달린 양말, 작은 리본 핀. 왜 샀을까? 아마도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진짜 어린 소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착각 때문이었다.
“이번 팀빌딩, 나는... 나는 딸로 참석하자.”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가족 동반이라면서? 그럼 나도 딸 역할을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어떤 가족인지는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자신을 어린 소녀로 대우해 준다는 사실이었다.
다음 날, 공항 로비는 북적였다. 직원들이 각자 가족과 함께 모여들었다. 수완은 분홍 원피스에 흰색 레깅스를 입고, 머리에는 큰 리본을 달았다. 화장은 거의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어려 보이도록 연한 파우더만 살짝 발랐다. 그녀는 긴장했다. 누군가 알아볼까? 하지만 직원들은 모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 저기 신입 사원 소호 씨! 혼자 왔어요?”
인사팀 직원이 소리쳤다. 소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끄덕였다. 그는 입사한 지 한 달도 안 된 신입이었다. 아무도 그의 진짜 신분을 몰랐다. 회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네, 가족이... 바빠서.”
소호가 짧게 대답했다. 그때, 그의 뒤쪽에서 조그만 발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분홍 원피스를 입은 어린 여자아이 같은 사람이 서 있었다.
“아, 이 아이는...”
소호가 당황했다. 수완은 재빨리 그의 옆으로 붙어서 조용히 속삭였다.
“나를 딸로 등록해 줘. 내가 회장인 건 비밀로 할게.”
소호는 깜짝 놀랐다. 그의 어머니가 바로 이 여자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행동할 줄은 몰랐다.
“왜... 왜 이러세요?”
“그냥. 오늘은 나를 딸로 대접해 줘. 딱 하루만.”
수완의 눈에는 반짝이는 빛이 있었다. 소호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의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직원들이 다가와서 명단을 확인했다.
“소호 씨, 가족이 안 오셨다면서요? 아, 그런데 이 아이는 누구예요?”
“아, 제 딸이에요. 갑자기 와서... 명단에 추가해 주세요.”
소호가 얼버무렸다. 직원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가족 동반이라는 취지에 맞게 수용했다. 수완의 이름이 명단에 '소호의 딸'로 기재되었다.
수완은 그 순간을 만끽했다. 자신이 진짜 어린 딸이 된 듯한 기분. 누군가가 자신을 보호하고 인솔해 주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비행기에 탑승할 때, 수완은 소호의 손을 잡고 걸었다. 직원들은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소호 씨, 딸 참 예쁘네요”라고 말했다. 소호는 어색하게 웃었고, 수완은 고개를 숙여 미소를 감췄다.
좌석에 앉자 수완은 조용히 스마트폰을 꺼내 회사 메일을 보냈다.
“회장님께서 건강상의 이유로 팀빌딩에 참석하지 못하십니다. 모두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는 완전히 딸 역할에 몰입할 시간이었다.
“아빠, 기내식 뭐 나와?”
수완이 소호를 바라보며 귀여운 목소리로 물었다. 소호는 그 모습에 놀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글쎄... 닭고기랑 생선 중에 고를 수 있어.”
“그럼 닭고기! 나 닭고기 좋아해!”
수완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주변 직원들이 그 광경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소호는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까지 변한 어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왔다.
비행기가 이륙했다. 수완은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회장이 아니야. 나는 그냥 어린 소녀야. 누군가의 딸. 그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그녀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동시에 그녀 안에 깊이 숨겨진 왜곡된 욕망을 일깨우고 있었다. 더 오래, 더 완벽하게 어린 소녀로 남고 싶다는 갈망이 서서히 몸속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