챔피언 결정전의 마지막 라운드. 임묵은 매트 위에서 숨을 가다듬었다. 관중석의 함성이 천장을 찢을 듯 울려 퍼졌지만, 그녀의 귀에는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희미하게 들렸다. 상대 선수의 발이 움직이는 순간, 임묵의 몸은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살짝 빠지며 상대의 중심을 무너뜨리고, 이어지는 업어치기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했다.
“산타 챔피언! 다시 한번 임묵 선수!”
심판의 선언과 함께 경기장이 환호로 들끓었다. 임묵은 천천히 일어나 상대에게 예를 표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매트 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관중석을 바라보지 않았다. 익숙한 승리의 순간이었지만, 오늘따라 그 환호조차 무겁게 느껴졌다.
경기 후 인터뷰장. 카메라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임묵의 얼굴이 하얗게 빛났다. 그녀는 여전히 운동복 차림이었고, 어깨에는 땀에 젖은 수건이 걸려 있었다.
“임묵 선수, 오늘도 압도적인 경기였습니다. 세 번째 전국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십니까?”
기자의 질문에 임묵은 잠시 마이크를 내려다보았다. 평소라면 짧고 담백하게 답했겠지만, 그녀는 이 순간을 오랫동안 준비해왔다. 마이크를 입 가까이 가져가는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오늘 경기를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순간 인터뷰장이 술렁였다. 기자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한 기자가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갑작스러운 은퇴 선언이군요. 부상 때문인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임묵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대답했다.
“누적된 부상이 많습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아요. 그리고 이제는 좀…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기도 하고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 속에는 오랜 고민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다른 기자가 연거푸 질문을 쏟아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신가요? 지도자로 전향하시는 건가요?”
“아직 정해진 건 없습니다. 일단은 푹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보려고요.”
임묵은 더 이상의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이고 인터뷰장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기자들의 목소리가 따라붙었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발걸음은 챔피언의 그것이라기보다는,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의 걸음 같았다.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 남짓, 버스로 다시 이십 분. 임묵은 좁은 골목길을 지나 낡은 임대 아파트의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닫는 순간, 그녀의 어깨에서 긴장이 풀려나갔다. 현관 센서등이 깜빡이며 켜졌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자, 방 안 가득 적막이 흘렀다. 벽에는 오래된 산타 대회 포스터가 몇 장 붙어 있었고, 구석에는 메달과 트로피가 담긴 박스가 놓여 있었다. 먼지가 소복이 쌓인 그것들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임묵은 천천히 운동복 지퍼를 내렸다. 지퍼가 갈라지는 소리만 방 안에 울렸다. 상의를 벗자, 그녀의 상체가 드러났다. 단단한 근육으로 무장한 팔과 어깨, 하지만 곳곳에 낡은 흉터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에는 오 년 전 전지훈련에서 입은 탈구 수술 자국이 길게 뻗어 있었고, 왼쪽 팔꿈치 안쪽에는 인대 봉합 자국이 푸르스름하게 남아 있었다. 옆구리에는 무수한 타박상들이 겹겹이 쌓여 피부색이 얼룩덜룩했다.
운동복을 완전히 벗자, 그녀의 몸 전체가 거울에 비쳤다. 한때는 날렵하고 탄력 넘치던 근육들이 지금은 지쳐 보였다. 복근의 라인은 여전했지만, 피부 탄력은 떨어져 있었고 관절 주변의 근육들은 만성 염증으로 인해 미세하게 부어 있었다. 그녀의 몸은 아직도 강인해 보였지만, 가까이서 보면 오랜 세월 갈아 넣은 흔적이 역력했다.
임묵은 거울 앞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손가락으로 쇄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원래는 그리 도드라지지 않았던 뼈가, 최근 몇 달 사이 부쩍 더 만져졌다. 갈비뼈도 마찬가지였다. 한 마디 한 마디 만져질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천천히 무너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선수 시절에는 느끼지 못했던 공허함이었다. 경기에서 이겨도, 메달을 따도 결코 채워지지 않았던 그 빈자리.
그때,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엄마’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임묵은 멈칫하다 전화를 받았다.
“묵아, 경기 잘했어?”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 반가움을 담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숨길 수 없는 쇠약함이 깔려 있었다. 임묵의 가슴이 조여왔다.
“응, 엄마. 오늘도 이겼어.”
“그래, 역시 내 딸이야. TV에서 봤는데, 아주 멋지더라.”
어머니는 웃음을 지어내며 말했지만, 목소리는 쉽게 갈라졌다. 임묵은 눈을 감았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보낸 지난 석 달이 떠올랐다. 희귀 자가면역 질환, 전문의조차 확신을 못 했던 치료 계획, 천문학적인 병원비 청구서들.
“엄마, 몸은 좀 어때? 의사 선생님 뭐라고 하셨어?”
“아휴, 별거 아니야. 그냥 옛날 병이잖니. 나는 네가 걱정돼서 그래. 또 다친 데는 없고? TV 보니까 엄청 세게 부딪히던데.”
임묵은 말문이 막혔다. 어머니는 항상 그랬다. 자신의 아픔은 숨기고, 딸의 부상만 걱정했다. 그녀는 몇 번이고 병원비를 위해 지금의 자신을 포기할 각오를 다졌다. 더 이상 산타 선수로 활동할 수 없는 몸이 된 지금, 어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할 방법은 다른 데서 찾아야 했다.
“진짜 괜찮아, 엄마. 걱정하지 마.”
“그래, 알았어. 그리고… 은퇴한다는 기사 봤어. 묵아, 정말 괜찮은 거니? 너 산타가 얼마나 소중한데, 엄마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지?”
순간 임묵은 숨이 탁 막혔다. 어머니의 쇠약한 목소리 속에 숨은 죄책감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녀는 애써 웃음기를 억누르며 말했다.
“아니야. 내가 결정한 거야. 이제 좀 쉬고 싶기도 했어. 새로운 일도 해보고.”
“정말이지?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어머니의 물음에 임묵은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사이로 어머니의 가쁜 숨소리만 들려왔다.
“엄마, 약 시간 됐지? 얼른 먹고 쉬어.”
“응… 알았어. 너도 밥 꼭 챙겨 먹고.”
“내일 병원에 들를게. 푹 쉬고 있어.”
전화를 끊자마자 임묵은 휴대폰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거울을 다시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낡은 운동복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챔피언 타이틀을 가진 여자, 하지만 병원비 한 번 마음 편히 내지 못하는 딸이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거울 속 자신의 쇄골을 쓰다듬었다. 뼈가 만져질 때마다, 그녀의 내면에 자리 잡은 공허함이 조금씩 더 커졌다.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육체, 하지만 어머니는 아직 싸우고 있었다. 임묵은 깊이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거울 속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다시 단단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결심해야 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비록 그 길이 자존심을 내려놓는 길일지라도. 임묵은 거울 앞에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방 안의 어둠이 그녀를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