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을 수 없는 운동복

站点:NovelAI.one内容:前8章在线试读ID:b102b185更新:2026-07-27 13:35
챔피언 결정전의 마지막 라운드. 임묵은 매트 위에서 숨을 가다듬었다. 관중석의 함성이 천장을 찢을 듯 울려 퍼졌지만, 그녀의 귀에는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희미하게 들렸다. 상대 선수의 발이 움직이는 순간, 임묵의 몸은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살짝 빠지며 상대의 중심을 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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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의 고별

챔피언 결정전의 마지막 라운드. 임묵은 매트 위에서 숨을 가다듬었다. 관중석의 함성이 천장을 찢을 듯 울려 퍼졌지만, 그녀의 귀에는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희미하게 들렸다. 상대 선수의 발이 움직이는 순간, 임묵의 몸은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살짝 빠지며 상대의 중심을 무너뜨리고, 이어지는 업어치기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했다.

“산타 챔피언! 다시 한번 임묵 선수!”

심판의 선언과 함께 경기장이 환호로 들끓었다. 임묵은 천천히 일어나 상대에게 예를 표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매트 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관중석을 바라보지 않았다. 익숙한 승리의 순간이었지만, 오늘따라 그 환호조차 무겁게 느껴졌다.

경기 후 인터뷰장. 카메라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임묵의 얼굴이 하얗게 빛났다. 그녀는 여전히 운동복 차림이었고, 어깨에는 땀에 젖은 수건이 걸려 있었다.

“임묵 선수, 오늘도 압도적인 경기였습니다. 세 번째 전국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십니까?”

기자의 질문에 임묵은 잠시 마이크를 내려다보았다. 평소라면 짧고 담백하게 답했겠지만, 그녀는 이 순간을 오랫동안 준비해왔다. 마이크를 입 가까이 가져가는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오늘 경기를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순간 인터뷰장이 술렁였다. 기자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한 기자가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갑작스러운 은퇴 선언이군요. 부상 때문인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임묵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대답했다.

“누적된 부상이 많습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아요. 그리고 이제는 좀…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기도 하고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 속에는 오랜 고민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다른 기자가 연거푸 질문을 쏟아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신가요? 지도자로 전향하시는 건가요?”

“아직 정해진 건 없습니다. 일단은 푹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보려고요.”

임묵은 더 이상의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이고 인터뷰장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기자들의 목소리가 따라붙었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발걸음은 챔피언의 그것이라기보다는,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의 걸음 같았다.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 남짓, 버스로 다시 이십 분. 임묵은 좁은 골목길을 지나 낡은 임대 아파트의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닫는 순간, 그녀의 어깨에서 긴장이 풀려나갔다. 현관 센서등이 깜빡이며 켜졌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자, 방 안 가득 적막이 흘렀다. 벽에는 오래된 산타 대회 포스터가 몇 장 붙어 있었고, 구석에는 메달과 트로피가 담긴 박스가 놓여 있었다. 먼지가 소복이 쌓인 그것들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임묵은 천천히 운동복 지퍼를 내렸다. 지퍼가 갈라지는 소리만 방 안에 울렸다. 상의를 벗자, 그녀의 상체가 드러났다. 단단한 근육으로 무장한 팔과 어깨, 하지만 곳곳에 낡은 흉터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에는 오 년 전 전지훈련에서 입은 탈구 수술 자국이 길게 뻗어 있었고, 왼쪽 팔꿈치 안쪽에는 인대 봉합 자국이 푸르스름하게 남아 있었다. 옆구리에는 무수한 타박상들이 겹겹이 쌓여 피부색이 얼룩덜룩했다.

운동복을 완전히 벗자, 그녀의 몸 전체가 거울에 비쳤다. 한때는 날렵하고 탄력 넘치던 근육들이 지금은 지쳐 보였다. 복근의 라인은 여전했지만, 피부 탄력은 떨어져 있었고 관절 주변의 근육들은 만성 염증으로 인해 미세하게 부어 있었다. 그녀의 몸은 아직도 강인해 보였지만, 가까이서 보면 오랜 세월 갈아 넣은 흔적이 역력했다.

임묵은 거울 앞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손가락으로 쇄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원래는 그리 도드라지지 않았던 뼈가, 최근 몇 달 사이 부쩍 더 만져졌다. 갈비뼈도 마찬가지였다. 한 마디 한 마디 만져질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천천히 무너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선수 시절에는 느끼지 못했던 공허함이었다. 경기에서 이겨도, 메달을 따도 결코 채워지지 않았던 그 빈자리.

그때,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엄마’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임묵은 멈칫하다 전화를 받았다.

“묵아, 경기 잘했어?”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 반가움을 담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숨길 수 없는 쇠약함이 깔려 있었다. 임묵의 가슴이 조여왔다.

“응, 엄마. 오늘도 이겼어.”

“그래, 역시 내 딸이야. TV에서 봤는데, 아주 멋지더라.”

어머니는 웃음을 지어내며 말했지만, 목소리는 쉽게 갈라졌다. 임묵은 눈을 감았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보낸 지난 석 달이 떠올랐다. 희귀 자가면역 질환, 전문의조차 확신을 못 했던 치료 계획, 천문학적인 병원비 청구서들.

“엄마, 몸은 좀 어때? 의사 선생님 뭐라고 하셨어?”

“아휴, 별거 아니야. 그냥 옛날 병이잖니. 나는 네가 걱정돼서 그래. 또 다친 데는 없고? TV 보니까 엄청 세게 부딪히던데.”

임묵은 말문이 막혔다. 어머니는 항상 그랬다. 자신의 아픔은 숨기고, 딸의 부상만 걱정했다. 그녀는 몇 번이고 병원비를 위해 지금의 자신을 포기할 각오를 다졌다. 더 이상 산타 선수로 활동할 수 없는 몸이 된 지금, 어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할 방법은 다른 데서 찾아야 했다.

“진짜 괜찮아, 엄마. 걱정하지 마.”

“그래, 알았어. 그리고… 은퇴한다는 기사 봤어. 묵아, 정말 괜찮은 거니? 너 산타가 얼마나 소중한데, 엄마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지?”

순간 임묵은 숨이 탁 막혔다. 어머니의 쇠약한 목소리 속에 숨은 죄책감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녀는 애써 웃음기를 억누르며 말했다.

“아니야. 내가 결정한 거야. 이제 좀 쉬고 싶기도 했어. 새로운 일도 해보고.”

“정말이지?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어머니의 물음에 임묵은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사이로 어머니의 가쁜 숨소리만 들려왔다.

“엄마, 약 시간 됐지? 얼른 먹고 쉬어.”

“응… 알았어. 너도 밥 꼭 챙겨 먹고.”

“내일 병원에 들를게. 푹 쉬고 있어.”

전화를 끊자마자 임묵은 휴대폰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거울을 다시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낡은 운동복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챔피언 타이틀을 가진 여자, 하지만 병원비 한 번 마음 편히 내지 못하는 딸이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거울 속 자신의 쇄골을 쓰다듬었다. 뼈가 만져질 때마다, 그녀의 내면에 자리 잡은 공허함이 조금씩 더 커졌다.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육체, 하지만 어머니는 아직 싸우고 있었다. 임묵은 깊이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거울 속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다시 단단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결심해야 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비록 그 길이 자존심을 내려놓는 길일지라도. 임묵은 거울 앞에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방 안의 어둠이 그녀를 감쌌다.

보잘것없는 수입

늦가을 오후의 햇살이 가늘게 내리쬐는 골목 안, 낡은 상가 건물 3층에 자리 잡은 그 산타 클럽은 기대보다 훨씬 초라했다. 벽에 붙은 전단지들은 가장자리가 누렇게 바랬고, 좁은 복도에는 땀냄새와 먼지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임묵은 낡은 운동복 차림으로 사무실 앞에 서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한때 전국 대회 트로피를 휩쓸던 자신이 이런 곳에서 코치 자리를 구걸하다니, 생각할수록 비참한 기분이 가슴을 짓눌렀다.

문을 열자 담배 연기와 싸구려 커피 향이 확 끼쳐왔다. 매니저라는 남자는 의자에 깊숙이 기대어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느끼하게 기름을 바른 머리칼 사이로 번들거리는 두피가 드러났다. 임묵이 들어서자 그제야 고개를 들고는 흘깃 훑어보는 눈빛이 불편했다. 그 시선이 자신의 몸, 특히 운동복을 팽팽하게 밀어 올리는 가슴께에 잠시 머물렀다가 스쳐 지나갔다.

"임묵 씨, 맞죠? 이력서는 봤어요. 경력은 화려한데." 매니저는 책상 위에 올려진 임묵의 경력증명서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하지만 알다시피 지금 업계 상황이 안 좋잖아요. 솔직히 산타 말고 다른 종목 경력은 큰 의미 없고, 더군다나 요즘 애들 가르치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그는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이렉트로 본론을 꺼냈다. "원래 강사료는 회당 8만 원인데, 경력자라고 특별 대우 해드리고 싶어도 저희 사정이 넉넉지 않아서요. 회당 6만 원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주 3회면 한 달에 12회, 세전 72만 원이네요."

임묵의 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한국 돈으로 50만 원도 안 되는 월급이라니. 예전 같았으면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을 것이다. 상대가 누구든 존중이 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정이 어려운 건 이해합니다만, 7만 원은 어떨까요? 책임지고 제대로 가르치겠습니다."

"글쎄요, 저도 윗선에서 압박이 심해서요. 6만 5천 원. 이 이상은 정말 어렵습니다." 매니저의 눈빛은 이미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병원에 누워 있는 어머니의 얼굴이 스쳤다. 임묵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언제부터 시작하면 될까요."

다음 날,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협소한 연습실 바닥에는 매트 몇 장이 깔려 있고, 통유리 너머로 학부모 대기실이 내려다보였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 대여섯 명이 저마다 새로운 선생님을 올려다보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웅성거렸다. 임묵은 아이들 앞에 서서 배꼽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산타 기초를 가르칠 임묵 선생님이에요. 다들 산타를 잘 타고 싶죠? 선생님을 따라 천천히, 즐겁게 배워봐요."

아이들은 유니폼이 아닌 제각각의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어깨와 무릎 보호대를 제대로 착용한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임묵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기본 스트레칭부터 시작했다.

10분쯤 지나서 간단한 점프 동작을 시범 보이려 할 때였다.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살짝 떠올랐다가 착지하는 순간, 오른쪽 무릎 안쪽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번개처럼 스쳤다. 순간 표정이 일그러질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 아무렇지 않은 척 동작을 마무리했다. 과거 전국 대회 결승전에서 입었던 그 부상은 겉으로 다 나은 듯 보여도 이렇게 영영 흔적을 남겼다.

"자, 다들 선생님처럼 해볼까요? 점프할 때 무릎에 힘을 너무 주면 안 돼요. 살짝 스프링처럼, 퐁퐁 튀는 느낌으로."

아이들이 왁자지껄하게 따라 하는 모습을 보며 임묵은 무릎을 살짝 감싸 쥐었다. 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과거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풍만한 곡선으로 가득했고, 몸이 무거워질수록 이 오래된 부상 부위에 가해지는 부담도 커질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간 연습실은 갑자기 적막해졌다. 임묵은 구석에 놓인 작은 의자에 앉아 물병을 들었다. 생수는 미지근했지만 목으로 넘기는 물줄기가 그나마 현실감을 주었다. 오늘 하루 수업을 마친 대가로 받은 것은 현금 6만 5천 원. 지갑에 고이 접어 넣으며 속으로 계산을 해봤다. 주 3회, 한 달이면 고작해야 이 정도. 전성기 때는 입상 상금만으로도 이 금액의 수십 배를 가볍게 벌었었다. 격투기, 산타, 그 어떤 무대에서건 관중의 함성과 함께 받아들던 두툼한 상금 봉투의 감촉이 아직도 손바닥에 생생한데 지금은 이렇게 쪼그라든 지폐 몇 장이 전부라니.

낡은 샤워실에서 대충 몸을 씻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이 옷은 전성기 시절 국가대표 후원사에서 받은 마지막 유니폼이었다. 몇 년이 지나도 질기기만 한 이 옷을 입고 있으면 과거의 그림자가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몸이 완전히 변해서 옷이 군데군데 끼는 게 느껴졌다. 가슴과 엉덩이 부분이 유난히 팽팽하게 당겨져 스스로도 민망했지만, 새 옷을 살 돈조차 아까웠다.

저녁이 가까워질 무렵,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집에 도착했다. 반지하 원룸 건물 계단을 내려가는데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오늘따라 현관문이 평소보다 더 낡고 초라해 보였다. 열쇠를 돌리고 문을 열었을 때, 부엌 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대답이 없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신발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부엌으로 뛰어들어갔다. 어머니가 싱크대 옆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얼굴은 핏기가 완전히 사라져 창백했고, 한 손은 가슴께를 움켜쥔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엄마! 정신 차려요! 엄마!"

임묵은 떨리는 손으로 119에 전화를 걸었다. 구급차가 오는 7분 동안, 그녀는 바닥에 앉아 어머니의 차가운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져 내렸다. 어머니의 입술이 가볍게 움직였다.

"미안하다, 묵아... 또 폐를 끼치네..."

"그런 말 하지 마요, 제발..."

응급실 특유의 소독약 냄새와 형광등 불빛이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흰 공간. 임묵은 복도 의자에 앉아 의사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긴 가운을 입은 의사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손에는 두꺼운 차트가 들려 있었다.

"보호자분이시죠? 어머님 진단 결과입니다. 매우 드문 케이스의 다발성 장기 섬유화입니다. 간, 신장, 그리고 폐 조직 일부가 점차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어요. 현재 상태라면 즉시 수술을 진행해야 합니다."

의사는 잠시 뜸을 들였다. 차트를 한 장 넘기며 무언가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차적으로 1차 수술비와 입원비 등으로 약 5천만 원 정도 예상하셔야 합니다. 이후 장기적인 치료와 이차 수술까지 감안하면 추가로 최소 3, 4천만 원은 더 필요할 거예요. 현재로서는 어머님의 장기들이 빠른 속도로 기능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어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5천만 원. 그리고 수천만 원이 더.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숫자가 현실감 있게 와닿지 않았다. 그저 눈앞이 캄캄해질 뿐이었다.

의사가 돌아간 뒤, 임묵은 병원 1층 구석에 있는 ATM 기기로 걸음을 옮겼다. 지갑에서 통장을 하나씩 꺼냈다. 주거래 은행 통장을 기계에 넣고 잔액을 조회했다. 숫자가 찍혀 나왔다. 8백만 원. 다음 통장, 2백 3십만 원. 적금 통장, 해약해도 1천 5백만 원. 비상금으로 모아둔 현금 포함, 그녀가 가진 전 재산은 고작 3천만 원 남짓이었다. 예전 같으면 한 달 생활비로도 부족했을 금액이 지금 그녀의 전부였다.

임묵은 통장들을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 ATM 부스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기계음만이 적막 속에서 윙윙거렸다. 눈물이 마를 새 없이 흘러내렸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주먹을 꽉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제껏 살아오며 수많은 시합에서 졌지만 이렇게 철저하게, 한 방에 무릎이 꺾이는 패배감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운동해도, 아무리 싸워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바로 돈이라는 현실 앞에 그녀는 완전히 무력했다.

중환자실에서 잠시 잠든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을 때, 창백한 조명 아래 누운 그녀의 얼굴은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임묵은 어머니의 주름진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바로 이 손이 자신을 키우기 위해 평생을 쉬지 않고 일했던 손이다. 지금 이 순간,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이 손을 영영 놓쳐야만 하는 일이었다.

"내가 어떻게든 살릴게, 엄마. 제발... 조금만 더 버텨줘."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떨렸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결심이 서려 있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어떤 일을 해서라도 돈을 구해야만 했다. 그 굴욕적인 선택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것들을 실제로 행동에 옮겨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작고 초라한 병실 안, 생명 유지 장치의 규칙적인 신호음만이 아무 말 없이 그녀의 결심을 증인처럼 울리고 있었다.

지하 경기장의 문

훈련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임묵은 휴게실 구석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운동복은 여전히 땀에 젖어 축축했고, 어깨와 허리 근육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 통증보다 더 무겁게 내려앉는 건 마음속 피로였다. 두 차례의 주술로 뒤바뀐 몸뚱이는 이제 낯선 육체를 억지로 끌고 다니는 듯한 이질감을 줬다. 150센티미터의 키, K컵의 가슴, 넓은 골반과 커다란 엉덩이. 산타 챔피언이었던 그녀의 단단하고 균형 잡힌 근육질 몸매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임묵 언니, 여기 좀 먹어요."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한 목소리가 고요를 깨뜨렸다. 소유가 비닐봉지를 흔들며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열정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그 웃음은 눈동자까지 닿지 않았다. 깊은 곳에는 오히려 어떤 무심함이 감춰져 있었다.

"야식이에요. 보니까 저녁도 안 먹고 여기 앉아 있길래."

소유는 봉지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볶이와 튀김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양념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임묵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근데 나 돈이……."

"에이, 이건 내가 사는 거예요. 신경 쓰지 말고 먹어요."

소유는 손을 내저으며 임묵 앞에 젓가락을 밀어 넣었다. 임묵은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떡볶이를 한 젓가락 집었다. 매콤한 양념이 입안을 자극하자 배가 고팠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음식을 씹기 시작했다. 소유는 맞은편에 앉아 팔짱을 끼고 그녀를 관찰했다.

"임묵 언니, 요즘 많이 힘들죠? 얼굴에 다 써 있어요. 피곤하고, 속상하고, 어쩌면 좀 절망적이기도 하고."

임묵의 젓가락이 살짝 멈췄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고 가볍게 웃었다.

"그렇게 보여요? 그냥…… 적응 중이에요."

"적응이요? 뭐, 그렇겠네. 몸이 이렇게 확 바뀌었으니. 아, 그런데 그거 알아요?"

소유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지고 레토릭한 어조를 띠었다. 그녀는 살짝 몸을 앞으로 숙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띠었다.

"이 클럽에는 지하 1층이 있다는 거."

"지하 1층이요?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임묵은 의아해 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 당연히 그렇죠. 일반인은 못 들어가니까. 일반 강습 회원 같은 건. 하지만 저는…… 거기에 좀 드나들거든요."

소유는 젓가락을 집어 튀김 하나를 집어 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녀는 여유롭게, 거의 무심한 듯 계속 말을 이었다.

"거긴 특별 경기장이라고 해요. 좀 달라요 위에랑. 뭐라고 할까…… 관중들이 아주 많아요. 그리고 출전료가……."

소유는 말을 끝까지 잇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임묵의 눈빛을 즐기기라도 하듯 눈꼬리를 약간 찡그리며 웃었다.

"얼마나 많은데요?"

임묵이 조급하게 묻자 마치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소유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음, 예를 들어서…… 우리가 평소에 강습 한 번 하고 받는 돈이 있잖아요. 그 백 배?"

"백…… 배요? 정말이에요?"

임묵의 목소리가 떨렸다. 젓가락을 든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소유는 그런 그녀를 보며 여전히 가볍게 웃고 있었다.

"백 배. 정말이에요. 물론, 좀 특별한 경기여야 하지만."

"어떤 경기예요?"

임묵이 묻자 소유는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우스꽝스럽게 생각하는 척을 했다.

"글쎄요, 직접 가 보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내가 설명해도 소용없더라고요. 보는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르니까."

말을 마친 그녀는 빈 젓가락 봉지를 쓰레기통에 던지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따뜻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었지만, 그 뒤에는 알 수 없는 어둡고 은밀한 만족감이 숨어 있었다. 마치 상처 입은 짐승이 절벽 끝에서 마지막 선택을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같은, 묘한 쾌감이 섞인 웃음이었다.

소유가 간 뒤에도 임묵은 한참 동안 휴게실에 앉아 있었다. 백 배라는 숫자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엄마의 투석 비용, 입원비, 점점 더 비싸지는 표적 치료제 가격. 은행 계좌의 잔액은 언제나 적자 직전이었고, 작은 산타 강습관의 월급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숫자였다. 그녀는 두 번이나 주술을 받았다. 몸을 바꾸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모든 대가를 이미 치렀다. 그런데도 아직 부족한 걸까.

밤이 깊어갈 무렵, 임묵은 결국 휴게실을 나섰다. 클럽 복도에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녀는 평소에 가 본 적 없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 끝에는 직원 전용 계단이 있었고, 철문 하나가 평범한 흰 벽에 숨듯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문 앞에는 표지판 하나가 작게 걸려 있었다. '지하 1층·관계자 외 출입 금지.'

임묵은 심호흡을 하고 문을 밀었다. 철문은 예상보다 무겁지도, 큰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아마 자주 드나드는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계단은 어둡고 좁았다. 벽에 설치된 오래된 소켓의 전구가 간헐적으로 깜빡이며 노란 빛을 내고 있었다. 계단을 한 걸음 내려설 때마다 공기가 점점 무거워졌다. 처음에는 땀 냄새, 그러다 점차 짙은 담배 연기와 싸구려 술 냄새, 그리고 낡은 지하실 특유의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계단 끝까지 다 내려가자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고, 귀를 찌르는듯한 왁자지껄한 소음이 밀려왔다. 임묵의 발길이 멈췄다. 지하 경기장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방 전체에 어둑어둑한 붉은 조명이 켜져 있어, 사람의 얼굴 윤곽만 흐릿하게 드러냈다. 관중석은 계단식으로 되어 있었고, 거의 남자들로 꽉 찼다. 그들의 옷차림은 제각각이었고, 더러는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한 직장인 같았고, 어떤 이는 땀에 젖은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였다. 그들 모두의 눈에는 똑같은 광기와 굶주림이 타오르고 있었다. 담배 연기가 공중에 짙게 깔려 천장의 스포트라이트 빛을 왜곡시키고 있었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욕설을 내뱉고, 또 다른 사람은 벌써 소주병을 손에 들고 흔들며 웃고 있었다.

임묵의 시선은 한가운데에 놓인 사각형 링으로 향했다. 일반 산타 링보다 눈에 띄게 작고, 로프도 낮았다. 링 바닥에는 검붉은 얼룩이 잘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어 오래된 피 냄새를 내뿜는 듯했다.

바로 그 순간, 경기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임묵은 숨을 죽이고 링 위를 응시했다. 두 명의 여자 선수가 각자 구석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녀들의 체형을 본 순간, 임묵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두 선수의 키는 모두 150센티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작고 달걀처럼 오동통했지만, 몸매는 기형적일 정도로 풍만했다. 가슴은 무거운 K컵으로, 운동복 위로도 그 부피와 탄력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넓은 골반과 지나치게 커다란 엉덩이는 마치 남미 플러스 사이즈 모델의 실루엣을 연상시켰다. 걸을 때마다 그 과장된 곡선이 함께 떨리고 흔들렸다. 그들의 몸은 싸움을 위해 태어난 체형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시선을 즐기기 위해 개조된 전시품처럼 보였다.

임묵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스쳤다. 같은 K컵. 그녀도 이제 그들과 똑같은 몸이었다.

경기가 시작됐다. 하지만 그건 임묵이 알고 있던 산타가 아니었다. 두 선수는 서로 천천히 접근했고, 하나가 느리고 연극적인 동작으로 팔을 휘둘러 상대를 끌어당겼다. 상대 선수는 마치 넘어지는 흉내를 내듯 링 바닥에 쓰러졌고, 두 사람은 곧바로 뒤엉켜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일부러 느렸다. 모든 관절과 근육의 동작이 관중들에게 최대한의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과장돼 있었다. 뒤틀리고 구부러질 때마다 풍만한 가슴이 무겁게 출렁였고, 두툼한 엉덩이와 넓적다리가 어둑한 붉은 조명 아래 기름칠 한 듯 번들거렸다.

관중들은 열광했다. 굵은 목청으로 그들의 이름을 외치고, 한층 더 노골적인 자세를 요구하며 야유와 웃음을 퍼부었다. 경기는 기술이나 체력, 전략 같은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오직 자극적인 화면과 왜곡된 쾌락을 위한 것이었다.

임묵의 명치께가 뜨거워졌다. 귀가 윙윙거렸다. 이게 그녀가 평생 바쳐온 산타인가. 그녀의 자존심과 영광의 전부였던 그 스포츠가, 이곳에서는 한낱…… 타락한 구경거리로 전락해 있었다. 그리고 그 몸, 마치 자신의 육체를 거울처럼 비추는 듯한 저 선수들의 몸은, 더 이상 숨길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현실을 그녀에게 직시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또 한 번의 종소리와 함께 경기는 끝났다. 두 선수는 지친 듯, 아니 지친 척을 하며 링 바닥에 축 늘어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팔다리를 무방비로 드러냈다. 순간, 관중석이 물이 끓듯 일렁였다. 남자들은 주머니에서 구겨진 지폐 뭉치를 꺼내 마구잡이로 링 위로 던지기 시작했다. 파란색, 녹색, 오만 원권, 만 원권짜리 지폐들이 종이꽃처럼 허공을 날아 느리고 음탕하게 두 선수의 땀 젖은 몸 위로 떨어졌다. 촤르르, 하고 가벼운 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두 선수 중 한 명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했고, 눈빛은 탁하고 공허했다. 그녀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주위에 흩어진 지폐를 한 장 한 장 줍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관중들은 다시 한 번 웃고 고함을 질렀다.

임묵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양손은 주먹을 쥐었고, 손톱이 살을 파고들 만큼 세게 움켜쥐었다. 잔인한 광경이었다. 비참하고, 굴욕적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림 위에 지폐들이 흩날리는 모습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눈에 아로새겨졌다. 백 배. 저 많은 돈. 저걸로 엄마의 이번 달 투석 비용을 해결할 수 있을까.

지하의 눅눅하고 뜨거운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심장이 세차게 요동쳤다. 그녀 안에서 어떤 것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자존심인지, 원칙인지, 아니면 그저 버텨왔던 마지막 환상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소리가 이미 무참히 부서져 내렸다는 사실이었다.

임묵은 천천히 몇 걸음 뒤로 물러서 등 뒤의 차가운 철문에 기댔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붙었다. 그녀는 여기까지 와 버렸다. 더 이상 뒤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이 문을 열고 들어온 이상.

KO의 야유

다음 날, 임묵은 다시 지하 클럽의 철문 앞에 섰다.

어둡고 눅눅한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군중의 웃음소리와 고함 소리. 공기 중에 맴도는 땀과 피, 값싼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제의 굴욕이 아직도 가슴 한켠에 박혀 있었지만,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자 발걸음은 저절로 앞으로 향했다.

"참가 신청하러 왔어."

접수대에 앉아 있던 직원이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 단단하게 다져진 어깨와 팔뚝. 일반적인 여성 선수들과는 확연히 다른 실루엣이었다.

"어제 처음 왔던 사람이지? 이름은?"

"임묵."

직원이 종이를 내밀었다. "오늘 상대는 키 165, 좀 풍만한 편이야. 몸무게 차이는 좀 있겠지만, 여기선 그런 거 신경 안 써. 규칙은 알지?"

임묵은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에 서명했다. 규칙이라 해봤자 별거 없었다. 무기는 사용 금지, 급소만 피하면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관중이 재미있어야 한다.

그녀는 대기실로 향하며 어깨를 풀었다. 몸은 가벼웠다. 수년간 쌓아온 훈련이 알려주는 감각, 긴장 속에서도 근육이 준비되는 느낌. 이곳은 지하 클럽이었지만, 링 위에 서는 순간만큼은 언제나 같았다.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 그 단순한 목표가 오늘은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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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음 경기! 오늘 처음으로 나오는 신인, 린모! 그리고 상대는 우리의 귀여운 폭탄, 미나!"

사회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자 관중석에서 탄성과 야유가 뒤섞여 터져 나왔다. 좁은 지하 공간은 담배 연기와 열기로 가득 차 있었고, 사람들은 링 주위를 빽빽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굶주린 짐승 같았다. 폭력과 육체, 땀과 신음이 뒤섞이는 광경을 기다리는 자들.

임묵은 링에 올랐다. 낡은 캔버스 천이 발밑에서 약간 미끄러졌다. 반대편 코너에 선 미나는 확실히 임묵보다 한 뼘은 작았지만, 몸매는 풍만했다. 가슴과 엉덩이가 타이트한 운동복을 빵빵하게 채우고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그 곡선이 과장되게 흔들렸다. 관중들은 이미 그 모습만으로도 환호성을 질러댔다.

미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신인이래서 겁먹었는데, 생각보다 호리호리하네. 긴장하지 마, 내가 살살 해줄게."

임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이미 상대의 중심을 읽고 있었다. 발의 간격, 어깨의 각도, 호흡의 리듬. 모든 것이 훈련된 감각으로 파고들었다.

심판이 손을 들었다. "시작!"

휘슬이 울리는 순간, 임묵의 몸은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그것은 의식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수년간 반복해온 훈련, 수백 번의 스파링, 링 위에서의 수많은 승부가 그녀의 몸에 새겨놓은 근육 기억. 상대가 움직이기 직전의 미세한 근육 떨림을 포착하자, 그녀의 오른쪽 주먹은 이미 최단 거리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정확히 미나의 복부에 꽂힌 정권.

단 한 방이었다.

미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숨이 턱 막히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앞으로 접혔고, 무릎이 꺾이며 캔버스 바닥으로 쓰러졌다. 풍만한 몸매가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지만, 그녀는 일어나지 못했다. 고통에 찬 신음만이 새어나올 뿐이었다.

순간, 경기장 전체가 얼어붙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떠들썩하던 관중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담배 연기 사이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들이 링 위를 응시했다. 휘슬이 울린 지 고작 3초. 이미 끝나버린 경기.

그리고 곧바로 폭발했다.

"뭐야 이게!"

"씨발, 장난하냐!"

"돈 돌려줘!"

야유와 욕설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파도처럼 링을 향해 쏟아졌다. 누군가가 맥주캔을 던졌고, 그것이 캔버스 옆에 철퍽 부딪혔다. 임묵은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들, 손가락질, 더러운 욕설들.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서 있었다.

쓰러진 미나를 향해 다가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이쪽으로 와."

소유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평소의 명랑한 미소는 사라지고, 짜증과 체념이 뒤섞인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임묵의 팔을 강하게 붙잡은 채 관중들의 야유를 뚫고 빠르게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 문이 닫히자 바깥의 소음이 약간은 줄어들었다. 소유는 임묵의 팔을 놓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 진짜 뭐 하는 짓이야."

임묵은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경기에서 이긴 거잖아. 저게 뭐가 문제야?"

소유는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쳤다. "문제?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야. 너무 빨랐다고. 관중들이 뭘 보겠어? 3초 만에 끝나는 경기를 보겠다고 돈 내고 온 사람들이야?"

"하지만 규칙상으로는…"

"규칙? 여기서 규칙은 두 번째야." 소유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첫 번째는 쇼야. 공방이 오가고, 몸이 부딪히고, 땀이 튀고, 살이 흔들리는 걸 봐야 사람들이 열광하는 거야. 적어도 몇 분은 끌어줘야지."

임묵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니까… 일부러 봐주라는 거야? 그런 거라면 나도 할 수 있어. 다음 경기부턴 조절하면 되잖아."

"조절?" 소유가 피식 웃었다.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임묵의 몸을 훑어내렸다. "문제는 그게 아니야. 네가 아무리 시간을 끌어봤자, 이 몸으로는 관중들이 전혀 좋아하지 않을 거야."

소유의 손가락이 임묵의 몸을 가리켰다. 납작한 가슴, 갈비뼈가 드러나는 마른 허리, 지방이라고는 거의 없는 단단한 근육질의 팔과 다리. 권투 선수로서는 완벽하게 다듬어진 몸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달랐다.

"봐. 여기 오는 놈들이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야." 소유가 자신의 풍만한 몸매를 손으로 훑으며 말했다. "저쪽 링 위에 쓰러져 있는 미나 같은 몸매. 부딪힐 때마다 출렁거리는 가슴과 엉덩이. 그게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거라고."

임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팔뚝을 감쌌다. 수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단련해온 근육. 그녀의 자존심이자 정체성이었던 이 몸이, 지금 이 순간 가장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소유는 그런 임묵의 표정을 읽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녀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동정인 듯, 아니면 약간의 우월감인 듯.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근데…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임묵이 고개를 들었다.

"여기 지하에, 사람들이 '신체 회복 마스터'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어." 소유의 목소리가 약간 낮아졌다. 그녀는 마치 누군가 듣고 있을까 봐 조심하는 듯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말이 회복이지, 사실은 네 몸을 아예 바꿔주는 사람이야. 체형, 크기, 부드러움까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지."

임묵의 눈이 약간 커졌다. "그런 게… 가능해?"

"가능하니까 내가 말하는 거지." 소유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 클럽에서 오래 버티는 애들은 다 한 번쯤 거기 들르는 편이야. 나도 그렇고, 아까 쓰러진 미나도 그렇고."

임묵의 시선이 자신의 손등으로 향했다. 굵은 마디, 딱딱하게 굳은 굳은살, 힘줄이 도드라진 손가락. 이 손으로 수많은 상대를 쓰러뜨렸다. 이 손이 그녀를 챔피언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이 손은, 이 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소유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생각해 봐. 한 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적어도 관중들 앞에서 야유받는 것보단 낫잖아."

소유가 대기실을 나간 후에도 임묵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벽에 걸린 낡은 거울이 그녀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키 170이 넘는 훤칠한 키, 좁은 골반, 선명하게 갈라진 복근과 탄탄한 승모근. 그녀가 십 대 시절부터 피 땀 흘려 만들어온, 전투를 위해 설계된 몸이었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광대뼈가 도드라지고, 턱선이 날카롭고, 눈매는 단호했다. 이 얼굴로 그녀는 수많은 링 위에서 승리를 선언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있는 이곳은 링이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규칙이 지배하는, 다른 종류의 싸움터였다.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 근육을 없애는 것을.

이 선수로서의 정체성을 지워버리는 것을.

그녀의 손이 천천히 복부로 올라갔다. 딱딱하게 뭉친 복근이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이것을 포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시는 예전의 싸움 방식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그녀가 쌓아온 모든 훈련과 경험이 무의미해질지도 모른다는 것.

하지만 그와 동시에, 병원 침대에서 고통스럽게 숨을 쉬고 있을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술비, 약값, 치료비. 숫자들이 마치 살아 있는 무언가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제 소유가 건넨 봉투 속의 얇은 지폐 묶음. KO승으로 받은 돈보다, 관중들의 마음에 들었을 때 받을 수 있는 돈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

임묵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거울 속 자신을 향해, 그녀는 조용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차피… 이미 자존심은 버렸잖아."

그 말은 대기실의 공기 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군중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제 곧 다음 경기가 시작될 것이고, 관중들은 이미 3초 전의 KO패를 잊고 다음 쇼를 기대하고 있을 터였다.

임묵은 대기실을 나서며 소유에게 물었던 그 방의 위치를 떠올렸다. 복도 끝, 가장 어두운 구석, 다른 사람들은 쉽게 가지 않는 곳.

신체 회복 마스터.

그녀의 발걸음이 그곳을 향했다.

소원의 대가

소유가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지상 클럽의 음악 소리는 이미 아득해졌고, 지하 1층의 복도는 형광등이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소유는 멈추지 않고 더 아래로 향했다.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좁고 가팔랐으며, 벽에 붙은 보라색 조명이 발밑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마스터님은 조용한 걸 좋아하셔. 규칙만 잘 지키면 문제없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

소유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그 명랑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임묵은 그 미소 뒤에 숨은 묘한 기대감을 읽을 수 있었다. 마치 신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지켜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임묵은 아무 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지난번 주술 때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처음 이 클럽에 왔을 때, 그녀는 아직 전직 챔피언의 자존심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주술로 그 몸은 이미 한 번 변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다시 한 번 더 깊은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계단이 끝나자 복도가 나타났다. 공기 중에는 은은한 한약과 쑥 타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복도 양옆으로 붉은 칠을 한 나무 문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었고, 문마다 작은 황동 명패가 붙어 있었다. 소유는 맨 끝 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 옆에는 작은 액자가 걸려 있었고, 거기에는 ‘신체 회복 마스터’라고 적혀 있었다.

소유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낮고 평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그녀가 문을 열자, 방 안은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사방은 고풍스러운 목재 가구로 꾸며져 있었고, 구석에는 청동 향로에서 엷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정면에는 붉은 침상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 한 중년 여성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검은색 전통 한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올백으로 단정하게 빗어 넘겼으며,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미소와 달리 칼날처럼 예리했다.

“어서 오세요. 꽤 젊은 얼굴이네요.”

마스터가 임묵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 시선은 마치 물건을 감정하듯 냉정했다.

소유가 한쪽에 물러서며 말했다. “이쪽은 신인이에요. 아직 클럽 기준에 완전히 맞지 않아서, 좀 더 조정이 필요해서 데려왔어요.”

마스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임묵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와서 말해보세요. 어떤 변화를 원하는지.”

임묵은 잠시 망설이다가 앞으로 나갔다. 그녀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평온하게 흘러나왔다.

“키를 줄이고 싶어요. 지금보다 10cm 정도, 168cm 정도로. 그리고 체지방률을 지금의 12%에서 25% 정도로 올렸으면 해요. 다른 선수들처럼 풍만하게, 클럽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하고 싶어요.”

마스터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더 차가워졌다.

“되돌릴 수 없는 길이에요. 뼈와 근육, 근막까지 전부 재구성해야 하는 작업입니다. 특히 키가 작아진다는 것은 단순히 척추를 압축하는 게 아니에요. 사지의 장골이 실제로 짧아지는 거죠. 그 과정에서 관절 위치가 변하고, 힘의 전달 경로가 바뀝니다. 당신이 무술을 해왔다면 알 거예요. 몸의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어요. 오래된 부상이 재발할 가능성도 매우 높습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향로의 연기만이 공중에서 천천히 흩어지고 있었다.

임묵은 주먹을 쥐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병원 침대에서 산소마스크를 쓴 채 창백하게 웃고 있던 얼굴. 그 얼굴이 그녀의 망설임을 지웠다.

“괜찮아요. 이미 각오했어요.”

마스터는 그녀의 눈을 잠시 응시했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확인한 듯, 마스터가 천천히 일어섰다.

“좋아요. 규칙은 이미 들었겠죠. 주술료는 선불이고, 결과에 대한 책임은 모두 본인이 집니다.”

임묵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스터가 침상을 가리켰다.

“옷을 편하게 하고 여기 엎드리세요.”

임묵은 운동복을 벗어 접어서 한쪽에 놓고, 침상에 엎드렸다. 그녀의 등은 아직도 선수 시절의 근육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고, 어깨는 넓었다. 하지만 곧 이 모든 게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자,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소유는 방 구석에 서서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무심했지만,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스터가 침상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양손이 임묵의 발바닥에 닿았다. 처음에는 따뜻한 온기만 느껴졌다. 마치 족욕을 하는 듯한 편안한 느낌. 하지만 곧 그 온기가 발바닥을 뚫고 뼈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시작합니다.”

그 순간, 발바닥에서부터 미세한 떨림이 올라왔다. 진동은 발목을 타고 정강이로, 무릎으로, 허벅지로 번져갔다. 임묵은 자신의 뼈 안에서 작은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마치 대나무가 갈라지는 것 같은, 미세하지만 분명한 ‘딱딱’ 소리.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날카로운 통증보다는 둔하고 깊은 압박감이 전신을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뼈가 분해되고 재조립되는 느낌. 근육 섬유 하나하나가 실처럼 풀렸다가 다시 엮이고, 근막이 찢어지듯 늘어나면서도 동시에 수축하는 모순적인 감각이 밀려왔다.

임묵의 등에서 땀이 솟았다. 그녀는 침상을 붙잡으며 숨을 들이켰다. 그때, 복부에서 묘한 온기가 번져 올랐다. 지방 조직이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배꼽 주변이 데워지고, 곧 허리로, 가슴으로, 궁둥이로 온기가 확산되었다. 마치 체내에서 밀물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단단했던 복근이 서서히 부드러운 층으로 덮여가는 것을. 갈비뼈 위로 살이 올라붙어 뼈의 윤곽을 감추었고, 허리 양옆으로 지방이 스며들어 곡선을 만들었다. 가슴 쪽에서는 피부가 팽팽해지면서 유선 조직이 부풀어 오르는 감각이 함께 밀려왔다. 처음에는 작은 언덕처럼, 그리고 점점 더 봉우리가 솟아올랐다. 가슴의 무게가 중력을 느끼기 시작했고, 옆으로 늘어지는 감촉이 생생했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궁둩이와 골반에서 일어났다. 장골이 바깥쪽으로 밀리면서 골반 전체가 확장되었다. 둔부 근육 위로 두꺼운 지방이 축적되면서, 마치 방석을 깔고 앉은 듯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줄어든 키 때문에 무게 중심이 아래로 쏠리면서, 그 부위의 존재감이 더욱 두드러졌다.

동시에 사지가 짧아지고 있었다. 팔과 다리의 장골이 미세하게 수축하면서, 관절의 위치가 조정되었다. 무릎과 팔꿈치 관절에서 뚜둑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뼈가 재정렬되었다. 어깨 폭도 살짝 좁아져서, 전체적인 프레임 자체가 축소되는 느낌이었다.

고통은 극심했지만, 그보다 더 강렬한 것은 ‘변화’ 그 자체의 생생한 감각이었다. 임묵은 자신의 신체가 마치 점토처럼 재구성되는 것을 의식으로 느꼈다. 압축되는 듯한 단단함과, 동시에 부풀어 오르는 듯한 팽창감이 공존했다. 근육은 여전히 그 자리에 존재했지만, 그 위를 두꺼운 지방이 감싸면서 힘의 결이 완전히 달라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향로의 연기가 어느새 사라지고, 방 안의 공기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다 됐습니다. 일어나 보세요.”

마스터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임묵은 천천히 눈을 떴다.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는 동작만으로도 모든 것이 낯설었다. 팔과 다리의 길이가 달라졌고, 몸통에 감겨 있는 살의 무게감도 완전히 새로웠다.

마스터가 거울을 건네주었다. 대형 전신 거울이었다.

임묵은 거울 속에 선 낯선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 숨을 멈췄다.

키는 확실히 10cm 이상 줄어 있었다. 시야의 높이 자체가 달라서, 거울을 보기 위해 고개를 약간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충격은 체형이었다. 단단했던 챔피언의 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체지방이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서, 선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모든 윤곽이 유연해진 체형이 서 있었다.

가슴은 확실히 커져 있었다. 그녀가 추정하기에 최소 C컵, 혹은 그 이상이었다. 스포츠 브라 없이 선 가슴은 묵직하게 아래로 처졌고, 옆으로 퍼진 형태였다. 배는 평평함을 잃고 부드럽게 둥글어졌으며, 허리에서 골반으로 이어지는 라인은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엉덩이였다. 궁둥이부터 허벅지 뒤쪽까지 이어지는 지방 덩어리가 마치 방석처럼 두껍게 처져 있었고, 옆으로도 확장되어 있었다. 그녀가 몸을 조금 틀자, 그 부위가 출렁이며 움직였다. 허벅지와 종아리에도 지방이 고르게 붙어서, 다리 전체가 원통형에 가까운 실루엣을 만들고 있었다.

임묵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광대뼈와 턱선을 덮은 살 때문에 얼굴형도 약간 둥글어졌다. 그녀는 거울 속 여자가 움직이는 대로 자신도 움직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게... 나야?

그녀는 관절을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팔을 들어 올리고, 무릎을 굽혔다. 근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근육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방 밑에 숨겨져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힘을 쓰는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무게 중심이 허리 아래, 특히 골반 쪽으로 쏠렸고, 관절의 가동 범위도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가 무심코 주먹을 쥐자, 팔 안쪽의 지방이 꽉 조여드는 느낌이 났다.

마스터가 그녀 뒤에서 거울 속으로 말했다. “규칙대로, 대가는 당신이 지불한 대로입니다. 이제 이 몸이 당신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되돌릴 수 없어요.”

임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거울 속의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수치심과 안도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가슴에서 치밀었다. 이 변화가 가져올 결과는 무엇일까. 하지만 적어도, 이제 그녀는 클럽이 요구하는 모습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것이었다.

소유가 구석에서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명랑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눈빛은 무언가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는 듯했다.

“잘됐네. 이걸로 연습할 때도 훨씬 유리해질 거야. 몸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괜찮아. 모두가 겪는 과정이니까.”

임묵은 아무 말 없이 침상 옆의 운동복을 집어들었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안정되어 있었다. 운동복을 입을 때, 가슴과 엉덩이 부분이 확실히 더 꽉 끼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이 운동복을 벗어도, 그녀는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마스터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어머니께 전해드리세요. 몸조리 잘 하시라고.”

임묵은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다. 그녀가 마스터를 바라보자, 그 중년 여성은 이미 관심을 끈 듯 향로에 새 향을 넣고 있었다.

소유가 먼저 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가자. 내일부터 연습 스케줄이 있어. 새로운 몸으로 어떤 퍼포먼스를 보여줄지 기대되네.”

임묵은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 번 더 보았다. 거울 속 여자도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작고, 풍만하고, 그녀가 한 번도 되어본 적 없는 모습의 여자가.

그녀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돌아서서 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계단을 오를 때, 허벅지 안쪽의 살이 스칠 때마다 낯선 감촉이 느껴졌다. 가슴의 무게는 예상보다 더 크게 느껴져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등을 약간 젖혀 무게 중심을 잡았다. 모든 동작이 다시 학습되어야 하는 새로운 신체였다.

소유가 앞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멜로디가 어두운 계단통 안에서 가볍게 울려 퍼졌다. 임묵은 주먹을 꽉 쥔 채, 한 걸음씩 지상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직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는 어머니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 얼굴은 지금의 모든 굴욕과 상실을 견딜 이유가 되어주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새로운 육체

침대에서 일어난 순간,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무릎이 휘청였다. 중심이 어딘가 이상했다. 손을 뻗어 벽을 짚었지만, 이미 몸이 앞으로 쏠리고 있었다. 바닥에 손을 짚을 뻔한 순간, 겨우 한쪽 무릎을 세워 중심을 잡았다. 가슴이 크게 출렁이며 아래로 쏠리는 무게가 팔뚝을 떨게 했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천천히 일어섰다. 발바닥이 바닥을 움켜쥐는 감각이 낯설었다. 그동안 수없이 반복해온 일어서기라는 동작이, 지금은 마치 처음 걷는 사람처럼 어색했다.

거실 구석에 놓인 체중계로 발을 옮겼다. 낡은 아날로그 체중계는 발을 올리자마자 바늘이 크게 흔들렸다. 숫자를 확인하고 눈을 몇 번 깜빡였다. 8킬로그램. 전부 지방이다. 근육이 아니라, 그냥 살이었다. 체중계에서 내려와 손으로 배를 쓸어보았다. 예전에는 만져지던 복근의 선은 사라지고, 부드럽게 접히는 살이 손가락 사이로 밀려들어왔다. 허리를 틀자 옆구리에 살이 접히며 낯선 감각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 속에도 단단한 중심 근육이 버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샤워를 마치고 옷장에서 예전 운동복을 꺼내 들었다. 탄력 있는 소재의 상의를 머리 위로 뒤집어썼지만, 가슴 부분에서 옷이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았다. 숨을 들이쉬고 억지로 잡아당겼다. 천이 가슴을 강하게 압박하며 겨우 몸에 밀착되었다. 너무 타이트해서 숨쉬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하의도 마찬가지였다. 엉덩이를 지나 허벅지 중간쯤에서 바지가 딱 멈췄다. 아무리 끌어올려도 넓어진 골반과 두꺼워진 허벅지가 천을 거부했다. 결국 포기하고 느슨한 면 티셔츠와 탄력 있는 레깅스로 갈아입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내가 아니었다. 풍만한 가슴이 티셔츠를 앞으로 밀어내고 있었고, 골반 라인이 확연히 넓어져 있었다. 걸을 때마다 가슴이 위아래로 미세하게 흔들렸고, 엉덩이 역시 리듬을 타며 좌우로 움직였다. 낯선 감각이었다. 내 몸인데 내 몸 같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보았다. 엉덩이가 의자 쿠션에 닿는 순간, 살이 푹신하게 눌리는 감각이 전해졌다. 예전에는 딱딱하게 느껴지던 의자가 지금은 마치 소파처럼 폭신하게 느껴졌다. 엉덩이와 허벅지의 경계가 모호해진 듯, 살이 좌우로 넓게 펼쳐졌다. 두 손으로 엉덩이 아래를 짚어보았다. 확실히 두꺼웠다. 뼈가 아니라 살이 의자를 채우고 있었다.

거울 앞으로 가서 격투 자세를 취해보았다. 양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 두 손을 턱 앞으로 올려 가드를 세웠다. 그런데 팔뚝이 가슴 측면을 압박하며 이물감을 전달했다. 예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하던 방해였다. 오른손으로 잽을 뻗어보았다. 팔이 앞으로 나가면서 가슴이 반동으로 크게 출렁였다. 중심이 흔들렸다. 계속해서 원투 펀치를 내질렀지만, 가슴이 움직일 때마다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다. 땀이 배어 티셔츠가 살에 달라붙었다. 잠시 멈추고 숨을 골랐다. 이번에는 발차기를 시도했다. 오른쪽 다리를 들어 앞차기를 내지르자, 허벅지 안쪽의 살이 서로 마찰하며 미세한 저항을 만들어냈다. 예전 같으면 날카롭게 뻗어나갔을 다리가, 지금은 묵직하게 허공을 갈랐다. 다시 한 번 발을 디딘 순간, 넓적다리 전체가 출렁이며 멈췄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숨이 가빴다. 이 몸으로 싸워야 한다. 적응해야 한다. 땀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닦아내지 않고 가만히 서서 생각했다. 한 경기 출전료가 얼마였지. 이긴다면 보너스가 붙고, 연승하면 추가 수당도 있었다. 계산을 머릿속으로 굴렸다. 앞으로 한 달, 아니 보름만 버티면 어머니 치료비의 절반은 모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더 많은 경기를 뛰어야 했다. 이 몸으로 가능할까. 복잡한 감정이 가슴을 쳤지만, 애써 무시했다.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휘파람 소리가 방 안으로 날아들었다.

“이야.”

소유였다. 문틈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더니, 나를 훑어보며 입꼬리를 한쪽으로 올렸다. 그 눈빛 속에는 감탄과 함께 뭔가 은밀한 쾌감이 숨어 있었다. 내가 변한 모습을 확인하며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제야 지하 경기에 어울리는 몸이 됐다.”

소유가 천천히 다가왔다. 팔짱을 끼고 내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시선이 내 가슴과 엉덩이에서 머물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창피함이 목까지 치밀었지만, 동시에 냉정하게 소유의 자세와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녀의 걸음걸이, 어깨의 높이, 시선의 방향. 경기장에서 만날지도 모를 상대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소유가 발걸음을 멈추고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센터에서 네 어머니 상태 좀 나아지셨대. 병원비 때문에 이러는 거 알지만, 린모, 너 지금 그 몸으로 경기 뛰는 거 꽤 위험할 텐데.”

목소리에는 동정이 담겨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지켜보는 호기심도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입을 열었다.

“적응하면 된다. 시간 문제야.”

소유가 고개를 갸웃하며 피식 웃었다.

“그래, 너 원래 그런 애였지. 금요일 밤에 신인전 하나 잡혔어. 네가 나갈 생각 있으면 말해.”

말을 마치고 그녀가 돌아서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넓어진 골반과 두꺼워진 허벅지, 그리고 그 위로 올라탄 레깅스의 선. 이 낯선 육체가 이제 나였다. 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아직 힘은 남아 있었다.

“나갈게.”

짧게 대답하자, 소유가 문고리를 잡은 채 고개만 돌려 나를 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좋아. 그럼 금요일에 보자.”

문이 닫히고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나는 다시 거울 앞에서 격투 자세를 취했다. 펀치를 내지를 때마다 출렁이는 가슴과 허벅지의 마찰. 이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체중이 늘어난 만큼 타격의 무게도 늘었다고 스스로에게 주입시켰다. 거울 속 내 눈빛은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견딜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발을 내딛어 중심을 잡았다. 이 몸으로 싸운다. 금요일까지 적응을 끝내야 한다.

첫 경기, 바로 적응

지하 클럽의 공기는 땀과 희미한 곰팡내, 그리고 싸구려 담배 연기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 몇 개가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으며 조잡하게 설치된 링 위를 비추고 있었다. 임묵은 대기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붕대를 감은 손으로 무릎을 꼭 쥐었다. 손바닥에서는 끈적한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몸은 여전히 낯설었다. 가슴의 과장된 무게감에 등이 약간 앞으로 굽어지고, 걸을 때마다 넓어진 골반과 엉덩이가 옆으로 크게 흔들리는 느낌이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이 살덩어리 같은 몸으로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야, 신인. 첫 경기라고 너무 얼어붙지 마."

소유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녀는 밝은 색 탱크톱에 레깅스를 입고 있었고, 통통하지만 단단한 팔뚝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겉으로는 격려처럼 보였지만, 임묵은 그 눈빛 속에 깃든 미묘한 관찰자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소유는 신인이 추락하는 모습을 보며 은근한 쾌감을 느끼는 부류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긴장은 되겠지만, 뭐 방법이 있나? 그냥 부딪히는 거지."

임묵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서며 손바닥을 펴고 쥐었다. 관절이 뻣뻣했다. 이 몸으로 어떻게 옛날 같은 스피드를 내겠나. 머릿속에는 신체 회복 마스터의 웃는 얼굴이 스쳤다.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던 여자. 그녀가 시술을 마치고 던졌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네가 원한 몸이야. 감당하는 건 네 몫이지." 감당.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링 반대편에서 상대 선수가 입장했다. 소개를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임묵보다 머리 하나쯤 더 컸고, 몸 전체가 묵직한 근육과 지방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경력 3년 차의 베테랑이라는 소문을 소유에게서 이미 들었다. 상대는 어깨를 돌리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고, 임묵 쪽을 슬쩍 흘겨보더니 입꼬리를 비틀었다. 새 몸뚱이로 와서 얼마나 버티나 보자, 하는 표정이었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목청껏 외쳤다. "자, 오늘의 메인 이벤트! 신인 임묵 대 베테랑 황지아! 배팅은 마감됐고, 이제 두 선수의 피와 땀을 직접 확인할 시간입니다!"

거친 함성과 휘파람이 클럽 내부를 흔들었다. 관중들은 대부분 싸구려 옷에 술 냄새를 풍겼고, 어떤 이들은 이미 링 주변 철제 펜스를 붙잡고 흥분에 들떠 있었다. 임묵은 천천히 링으로 올라갔다. 발판을 디딜 때마다 엉덩이와 허벅지가 출렁이며 주변의 공기를 흔드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와, 저게 뭐야!" 하고 외쳤고, 이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종이 울렸다.

황지아는 초반부터 거세게 밀어붙였다. 주먹과 팔꿈치가 연속으로 날아들었다. 하나하나가 묵직하고 정확했다. 임묵은 본능적으로 상체를 뒤로 젖혔지만, 가슴의 부피 때문에 균형이 완전히 달랐다. 한 방이 어깨를 스쳤고, 이내 팔꿈치가 갈비뼈 쪽을 가격했다. 숨이 턱 막혔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동시에 임묵은 상대의 호흡과 리듬을 읽어내고 있었다. 산타 챔피언 출신의 감각은 몸이 변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일부러 뒤로 물러서는 척하며 중심을 낮췄다. 그리고 황지아가 다시 들어오는 순간, 측면으로 살짝 빠지며 있는 힘껏 상대의 옆구리에 붙었다. 두 사람의 몸이 끈적하게 엉겨붙었다. 땀에 젖은 살이 서로 미끄러지며 마찰음을 냈다. 임묵은 자신의 넓은 골반과 커다란 엉덩이를 이용해 상대의 허벅지 바깥쪽을 압박했다. 일부러 강하게 치지 않았다. 대신 부드럽게, 그러나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주먹을 내지르는 대신 넙적한 손바닥으로 상대의 옆구리와 등판을 두드렸다. 마치 리듬을 타듯이. 때릴 때마다 자신의 팔뚝과 가슴이 크게 흔들렸고, 그 진동이 상대 몸까지 전달되었다.

"뭐야 저게, 춤추는 거야?" 관중석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떠들었다.

"아니야, 봐. 저 살 떨림! 저게 진짜 싸움이지!"

이내 웃음과 함께 박수 소리가 하나둘 퍼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링 바닥을 발로 구르며 리듬을 맞췄다. 퍽, 퍽, 퍽. 임묵은 그 소리에 맞춰 계속 상대를 쫓았다. 엉덩이를 이용해 밀쳐내는 척하다가 어깨로 부딪혔고, 팔목을 붙잡는 척하다가 손가락으로 상대의 허벅지 안쪽을 살짝 쓸어 올렸다. 황지아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이런 스타일의 싸움은 처음인 듯했다. 그녀는 황급히 팔꿈치를 휘둘렀지만, 임묵은 이미 한 발 물러선 뒤였다.

임묵의 마음속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한쪽에서는 날카로운 쾌감이 솟구쳤다. 그래, 이렇게 싸울 수 있구나. 이 살덩어리로도 상대의 움직임을 묶어낼 수 있구나. 하지만 동시에 위장 깊은 곳에서 끔찍한 굴욕감이 꿈틀댔다. 자신이 마치 동물처럼, 전시된 고깃덩어리처럼 몸을 흔들며 관중의 환호를 유도하다니. 엉덩이를 들이밀 때마다, 가슴이 출렁일 때마다 관중들의 눈빛이 달라붙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그 시선들은 칼날 같았고, 동시에 더러운 손길 같았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끝내! 끝내버려!" 관중들의 고함이 점점 격해졌다.

임묵은 마지막 힘을 끌어모았다. 황지아가 지쳐서 헛점을 보인 순간, 그녀는 자신의 엉덩이를 지렛대 삼아 상대의 허리를 강하게 밀어붙였고, 동시에 양팔로 목을 조르듯 감싸 안으며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쿵, 하는 묵직한 소리가 링을 울렸다. 먼지가 피어올랐다. 황지아는 잠시 허우적대다 이내 포기했다. 사회자가 달려와 임묵의 손을 붙잡아 올렸다.

"승자, 임묵!"

환호성이 천장을 뚫을 듯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 돈뭉치를 링 안으로 던졌다. 지폐 몇 장이 땀에 젖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임묵은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폈다. 온몸이 후들거렸다.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들러붙었고, 탱크톱은 땀으로 완전히 젖어 살갗에 달라붙었다. 그녀의 눈앞이 살짝 흐려졌다가 다시 또렷해졌다. 승리의 기쁨은 찻잔 속의 설탕처럼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대신 짙은 모멸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한 거지?

경기가 끝난 후, 임묵은 클럽 사무실 구석에 놓인 낡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맞은 자리가 욱씬거렸다. 몇 분 후, 건장한 남자가 돈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공연비를 연기자에게 지급하는 것과 똑같은 무심한 손동작이었다.

"오늘 경기 몫이야. 수고했어."

임묵은 떨리는 손으로 봉투 안을 확인했다. 2만 위안. 정확히 그 금액이었다. 한때 코치로 일하며 한 달 동안 밟고 일어서야 겨우 모을 수 있었던 돈이었다. 그녀는 잠시 말을 잃었다가 이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으로 지폐를 만지작거렸다. 종이의 감촉이 유리 조각처럼 따가웠다.

클럽 밖으로 나오자 새벽 공기가 폐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하늘은 아직 어두웠고, 골목에는 쓰레기와 빈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임묵은 구석에 쭈그려 앉아 스마트폰을 꺼냈다. 액정의 빛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었다. 그녀는 은행 앱을 열고 병원 계좌로 전액을 이체했다. 손가락이 확인 버튼을 누를 때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힘껏 눌렀다.

잠시 후, 그녀는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길게 울렸다. 몇 번의 벨 소리 후에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나지막하고 느렸지만, 숨소리 너머에는 고통을 참는 듯한 미세한 떨림이 숨어 있었다.

"묵아, 이 시간에 왠 전화니? 또 밤샘 훈련했어? 목소리가 잠겼구나."

"응, 좀 무리했어." 임묵은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다. "엄마, 수술비, 이제 좀 희망이 생겼어. 곧 큰 금액이 들어올 거야. 조금만 더 버텨줘."

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어머니의 숨소리가 약간 빨라지더니, 이내 목소리가 한결 힘을 얻은 듯했다.

"정말이니? 그래도 너, 무리하지 마라. 엄마는 괜찮아... 조금 아플 뿐이야. 네가 쓰러지면 안 돼, 알겠지?"

그 말에 임묵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목울대가 심하게 떨려 말을 잇기 어려웠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으려 애썼다. 목젖이 아릴 정도로 힘을 주고서야 겨우 말할 수 있었다.

"걱정 마. 다 잘될 거야. 그럼 끊을게, 얼른 주무셔."

전화를 끊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임묵은 소매로 얼굴을 거칠게 닦았다. 눈물과 땀, 그리고 클럽 안에서 묻은 먼지까지 뒤섞여 얼굴이 얼룩덜룩해졌다. 그녀는 맨손으로 벽을 한 번 힘껏 쳤다. 손바닥이 쓰라렸지만, 그 고통이 오히려 정신을 붙잡아 주었다.

울음을 그친 임묵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이 길밖에 없다.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포기할 수도 없다. 이 부끄럽고 더러운 몸이라도 엄마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녀는 일어서서 뒤돌아보지 않고 클럽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다시 내려갔다. 계단을 딛는 발소리가 어두운 통로를 따라 쿵쿵 울렸다.

암시장의 유혹

린모의 경기는 이제 입장료만으로도 수백만 원을 찍고 있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소유는 매니저처럼 그녀의 일정을 관리하며 더 큰 판을 주선했다. 지하 클럽의 주인은 린모의 등장만으로도 장사가 된다며 출전료를 두 배, 세 배로 올려주었다.

“오늘도 미쳤어! 저 가슴 좀 봐!”

관중석에서 터져 나오는 고함에 린모는 더 이상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링 위에서 그녀는 넓은 골반을 좌우로 흔들며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원래의 복싱 스텝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대신 엉덩이로 상대를 밀어붙이고, 두꺼운 허벅지로 상대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주먹보다 가슴이 먼저 상대에게 닿는 경우가 더 많았다. 관중들은 그 모습에 열광했다.

“진짜 K컵은 다르네!”

“허리 굵기도 예전이랑 완전 달라졌어. 저 덩치로 어떻게 저렇게 움직이지?”

링 밖에서 소유가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빛은 복잡했다.

경기가 끝나고 린모는 땀에 흠뻑 젖은 운동복을 입은 채 라커룸으로 들어왔다. 샤워를 하려는데 소유가 문을 두드렸다.

“또 제안 왔어.”

“또 특별 공연이야?”

린모의 목소리엔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소유는 휴대폰 화면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이번엔 제법 규모가 커. VIP 전용 복싱 시합 겸 이벤트인데…… 출전료가 천만 원이야.”

“뭘 해야 하는데?”

“링 위에서 춤추듯 움직이는 거야. 경기 중에 관객들이랑 가까이서 소통도 좀 하고…… 어쩌면 옷을 좀 덜 입어야 할 수도 있어.”

린모가 손을 멈추고 소유를 바라보았다.

“거기까지는 못 하겠어.”

“현명한 선택이야.”

소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진지했다.

“한 번 그 선을 넘으면, 다시는 못 돌아와. 너 지금도 충분히 벌고 있잖아.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 없어.”

린모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구석이 묵직했다. 충분히 벌고 있다고? 어머니의 병원비, 재활 치료비, 간병인 비용…… 숫자들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되었다. 지금 벌이로는 겨우 숨통만 트였을 뿐이었다. 완치는커녕, 제대로 된 재활 치료를 받으려면 적어도 몇천만 원은 더 필요했다.

“린모야.”

소유가 다가와 린모의 어깨를 잡았다.

“네가 요즘 대기실에서 거울 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거 알아?”

린모의 어깨가 살짝 굳었다.

“무슨 소리야?”

“네 몸이 바뀌는 걸 네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지만…… 관중들의 시선에 길들여지고 있는 건 확실해 보여서 하는 말이야.”

린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유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기 중에 관중들의 환호성이 커질수록, 그녀의 몸이 더 과감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소유는 린모의 어깨를 두드리고 라커룸을 나갔다. 린모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샤워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자신을 마주하는 건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 모습이 낯설었다.

가슴은 여전히 거대했다. K컵. 그 단어만으로도 관중들은 열광했지만, 정작 린모는 이 무게에 아직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브래지어를 풀면 어깨에 빨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허리는 짧고 두꺼웠다. 복근은 근육이 아니라 부드러운 살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골반. 넓은 골반은 치마를 입어도, 운동복을 입어도 숨길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엉덩이. 남미 플러스 사이즈 모델 같은 그 덩어리. 이 몸으로 처음 길을 걸었을 땐 중심을 잡지 못해 휘청거렸다. 그런데 지금은 이 몸에 맞춰 자연스럽게 엉덩이를 흔들며 걷고 있었다.

린모는 손바닥으로 거울을 짚었다.

‘내가…… 이 몸에 적응하고 있다고?’

익숙해지는 것. 그게 더 무서웠다. 소유가 말한 것처럼, 관중들의 시선에 중독된다면? 더 큰 돈을 위해 선을 넘는다면?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샤워기를 틀었다. 뜨거운 물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흘러내렸다. 물소리가 라커룸 가득 울려 퍼지는 동안, 린모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한 시간쯤 지나서 린모가 클럽을 나서려는 순간, 복도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임묵 선수. 아니, 린모 씨.”

돌아보니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깔끔한 정장 차림에 손목시계는 고급 브랜드였다. 그는 미소를 띠며 명함을 내밀었다.

“저는 김재현이라고 합니다. 스포츠 에이전시를 운영하고 있어요. 혹시 시간 잠깐 될까요?”

린모는 명함을 받아들지도 않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용건이 뭡니까.”

짧은 대답에도 남자의 미소는 흔들리지 않았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린모 씨는 이런 지하 클럽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관리하는 선수들 중 스타성을 보면, 린모 씨는 상위권이에요. 대중의 시선을 끄는 독보적인 매력이 있다고 할까요.”

남자는 말을 이었다.

“제가 후원 계약을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출전료, 트레이닝 비용, 의료 지원까지 전부 책임지겠습니다. 조건은 간단합니다. 저와 독점 계약을 맺는 거예요.”

“얼마를 얘기하시는 겁니까.”

린모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월 2천만 원입니다. 성과에 따라 인센티브는 별도고요. 물론 이것보다 더 큰 무대도 연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상업 광고, 방송 출연까지도 가능해요.”

2천만 원. 한 달에. 린모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 돈이면 어머니의 재활 치료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병원의 답답한 다인실이 아니라, 깨끗한 1인실로 옮겨드릴 수도 있었다.

“린모 씨가 가진 신체 조건은 최고의 자산입니다. 조금만 포장하면 센세이션을 일으킬 수 있어요.”

남자의 시선이 린모의 가슴께를 잠시 훑고 지나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린모는 그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그 눈빛은 클럽 관중들의 그것과 똑같았다. 다만 돈이 더 많고, 표현이 더 세련됐을 뿐이었다.

“거절합니다.”

린모는 명함을 받지 않고 몸을 돌렸다. 남자가 뒤에서 무어라 더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클럽 출입구를 나서면서 거리로 나왔다. 밤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

거부감보다 서늘한 이성의 계산이 먼저 떠올랐다.

‘거절하기엔 너무 큰돈이었어.’

입술을 깨물며 빠르게 걸었다. 발걸음이 예전보다 무거웠다. 엉덩이와 허벅지의 살이 걸을 때마다 출렁거리는 느낌이 났다. 운동선수 시절엔 없던 감각이었다. 린모는 운동복 위로 외투를 더 단단히 여몄지만, 골반 라인은 숨길 수가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린모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어깨는 넓지 않았지만, 골반은 확실히 튀어나와 있었다. 이제는 오히려 이 몸이 더 익숙해진 자신을 발견했다. 그게 더 괴로웠다.

집 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익숙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 린모는 불을 켜지 않고 거실을 가로질렀다.

“엄마, 안 주무셨어요?”

“응, 잠이 안 와서…… 수술 후엔 왜 이렇게 잠이 안 오는지.”

어머니는 침대에 기대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린모는 어머니 옆에 앉았다.

“따뜻한 우유라도 데워드릴까요?”

“됐어. 이렇게 옆에 앉아만 줘.”

어머니의 손이 딸의 손을 찾아 더듬었다. 앙상한 손가락이었다. 수술 후 체중이 빠지면서 관절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린모는 말없이 그 손을 감싸 쥐었다.

딸의 손등 위로 어머니의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묵아. 엄마 때문에…… 너무 고생이 많다.”

“아니에요, 엄마. 무슨 그런 말씀을.”

“거울 봤어. 네 몸…… 네 몸이 어떻게 그렇게 변했는지…… 너, 무슨 일 한 거니?”

린모는 숨을 멈췄다.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가 어둠 속에 가라앉았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냥…… 운동을 좀 다르게 한 것뿐이에요.”

거짓말이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주술로 육체를 두 번이나 개조했다고, 그 대가로 몸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상대를 가슴으로 밀어붙이고, 엉덩이를 흔들며 관중들의 환호를 받는 게 일상이 되었다고 어떻게 고백할 수 있을까.

어머니는 더 묻지 않았다. 그저 딸의 손을 더 꼭 쥐었을 뿐이었다.

“엄마는 괜찮아. 이제 많이 좋아졌어. 그러니까 너…… 네 몸 아끼면서 해라.”

어머니의 목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규칙적인 호흡 소리가 들렸다. 약 기운에 잠든 것이었다.

린모는 어머니의 이마에 묻은 땀을 닦아주고 조용히 일어났다.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오늘 하루를 되짚었다.

VIP 제안. 천만 원. 남자의 후원 제안. 월 2천만 원.

숫자들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소유의 경고도 다시 떠올랐다.

“한 번 그 선을 넘으면, 다시는 못 돌아와.”

린모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바라보았다. 운동선수의 손은 아니었다. 굳은살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대신 부드럽고 통통한 손가락. 이 손으로 어머니를 지키려고 했다.

병원에서 받은 고지서를 떠올렸다. 재활 치료 비용은 한 달에 800만 원. 1인실 입원비는 300만 원. 기타 약제비와 간병비까지 합치면 한 달에 1,500만 원이 넘게 들었다. 지금 그녀가 버는 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뼈를 깎는 심정으로 아끼고 아껴도 적자였다.

‘아직 더 필요해.’

린모는 주먹을 쥐었다. 내일은 소유에게 말할까. 더 많은 경기를 잡아달라고. 아니면…… VIP 제안을 다시 생각해볼까.

거울 속의 자신을 다시 바라보았다. 넓은 골반. 두꺼운 엉덩이. K컵의 가슴. 이 모든 게 돈으로 환산되고 있었다.

‘자존심은 이미 오래전에 버렸어.’

린모의 입술 사이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창밖은 깜깜했다. 새벽이 오기엔 아직 멀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몸의 여기저기가 욱신거렸다. 특히 가슴과 엉덩이에 쏠리는 무게감이 낯설면서도 이젠 제법 익숙했다.

한참 뒤, 린모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소유의 번호를 찾아 메시지를 썼다가 지웠다. 다시 썼다가 지웠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분명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눈빛만은 예전 산타 챔피언이었던 임묵의 것이었다.

‘더는 물러날 수 없어.’

린모는 결국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대신 휴대폰을 뒤집어 놓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잠이 들 때까지, 그녀의 귀에는 소유의 경고와 남자의 제안이 번갈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