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화 수는 방 안을 천천히 걸으며, 손가락 끝으로 거실 테이블 위의 찻잔 가장자리를 스쳤다. 찻잔 속 붉은 차는 마치 사람의 피처럼 짙었다. 그녀의 눈빛은 편안했고,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임봉은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의 눈은 텅 빈 것 같았지만, 그 깊은 곳에는 아직 남아 있는 이성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쥐어졌다 폈다를 반복하며, 땅바닥에 자국을 남겼다.
“네 동생이 참 예쁘지?”
백련화 수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그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임봉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은… 은혜로운 소저…”
“말해 봐.”
백련화 수가 찻잔을 집어 찻잎을 가볍게 저었다.
“임일의 어릴 적 일을 알고 싶어.”
임봉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기억 속의 임일은 언제나 환하게 웃고 있었고, 달리기를 하면 꼭 뒤를 돌아 자신을 부르던 아이였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이제 하나하나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뇌 속을 뒤집어 놓은 듯,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그… 그 녀석은…”
임봉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원래는… 집안의 자랑이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뭐?”
백련화 수의 목소리가 갑자기 차가워졌다.
“그는 항상 네가 그를 돌볼 거라고 생각했어. 맞지?”
임봉의 몸이 움찔했다. 맞다, 임일은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그를 지켜줄 거라고, 큰형이 영원히 그의 뒤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는 틀렸어.”
백련화 수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말했다.
“너도 알지? 그는 네가 한때 얼마나 그를 아꼈는지 항상 기억할 거야. 하지만 그 기억들은…”
그녀의 손가락이 허공을 가리키며,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끊는 듯했다.
“이제는 너를 괴롭힐 뿐이야.”
임봉은 숨을 쉴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맞다, 모든 기억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임일이 어릴 적 손을 잡아주던 온기, 그가 형이라고 부르던 목소리. 그 모든 것이 지금은 칼이 되어 그의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그를 미워해.”
백련화 수의 목소리가 마치 마법처럼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네가 그렇게 아꼈는데, 그는 어떻게 널 배신했는지 알아? 그는 너의 사랑을 당연하게 여겼어. 너를 이용했어. 너는 단지 그의 도구였을 뿐이야.”
“도구…”
임봉의 눈이 점점 흐려졌다.
“맞아… 도구… 그 녀석은 날 도구로만 봤어…”
“이제는 네가 그를 조종할 차례야.”
백련화 수가 앞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어 그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네가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를 치르게 해.”
임봉의 시선이 점점 단단해졌다. 그의 손가락이 꽉 쥐어지고, 뼈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내가… 내가 그 녀석에게 교훈을 주겠습니다.”
백련화 수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려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에는 회색빛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좋아. 이제 돌아가.”
임봉은 일어나 몸을 돌렸다. 그의 걸음걸이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지만, 그 등 뒤에는 한때 임일을 가장 사랑했던 큰형의 그림자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임일은 복도 끝에서 큰형이 걸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다가가고 싶었지만, 다리가 마치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임봉의 눈빛은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한 번도 자신을 보지 않았다.
“형…”
임일이 작게 불렀다.
임봉이 잠시 멈췄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가지 마.”
임일이 애원하듯 말했다.
“나랑… 말 좀 해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닥쳐.”
임봉의 목소리는 낯선 사람처럼 차가웠다.
“너 같은 녀석과 무슨 말을 하겠어.”
임일은 마치 누군가에게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그는 큰형의 눈에서 증오를 읽을 수 있었다. 그 증오는 너무나도 생생해서 그를 숨 쉴 수 없게 만들었다.
“형… 나는 왜… 왜 이렇게 변한 거야?”
임봉이 마침내 돌아섰다. 그의 눈에는 한 줌의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너를 똑똑히 봤기 때문이야. 너 같은 인간은… 애초에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그 말은 칼처럼 임일의 심장 깊숙이 꽂혔다. 임일은 벽에 기대어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큰형의 발소리가 멀어져 갔고, 자신의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만 남았다.
그날 저녁, 백련화 수는 저택에서 가장 큰 연회장에서 만찬을 열었다. 검은색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신사 숙녀들이 연회장을 가득 메웠다. 모두가 백련화 수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마치 별이 달을 둘러싼 듯했다.
임일은 구석에 서 있었다. 그의 옷은 초라했고, 머리카락은 엉망이었다. 그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 했지만, 백련화 수의 시선은 언제나 정확히 그를 향하고 있었다.
“임일아, 이리 와.”
백련화 수가 손을 흔들며, 목소리는 마치 설탕에 절인 독약처럼 달콤했다.
임일은 떨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 시선들 속에는 경멸, 조롱, 그리고 어떤 잔혹한 기대가 섞여 있었다.
“네 친구 진우도 여기 있어.”
백련화 수가 옆에 앉은 청년을 가리켰다. 진우는 한때 임일의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지금은 백련화 수 곁에 앉아 그녀에게 음식을 권하고 있었다.
“진우야…”
임일이 목이 메인 목소리로 불렀다.
진우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 눈빛은 낯선 사람처럼 완전히 무관심했다.
“응, 임일이구나.”
진우의 목소리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차가웠다.
“요즘 어떻게 지내?”
그 말에는 조롱이 담겨 있었다. 임일은 그의 입가에 숨기지 못한 비웃음을 볼 수 있었다.
“진우야, 나랑… 말 좀 해줄 수 있어?”
임일이 간청했다.
“그동안 왜 나를 피한 거야? 나는 네가 내 가장 친한 친구인 줄 알았는데…”
“가장 친한 친구?”
진우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연회장 안에서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너 같은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내 친구라고 자처해? 나는 너 같은 인간을 전혀 몰라. 아니, 한 번도 너를 내 친구라고 생각한 적 없어.”
임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몇 달 전만 해도 함께 술을 마시고, 함께 울고 웃던 사람이 바로 이 진우였다. 그런데 지금은…
“진우야, 너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우리는 함께 자랐잖아. 함께 영화도 보고, 함께 게임도 하고…”
“닥쳐.”
진우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그 모든 게 네 거짓말이야. 너는 항상 그렇게 남을 속여. 너는 모든 사람이 너를 위해 미치길 바라지? 하지만 이제는 꿈 깰 시간이야. 아무도 너 같은 인간을 좋아하지 않아. 아무도.”
그 말은 칼처럼 임일의 심장을 찔렀다. 그는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발을 밟았다.
“어이, 조심해!”
어떤 신사가 그를 거칠게 밀쳤다. 임일은 땅에 넘어졌고, 찻잔이 그의 옆에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날카로운 찻조각이 그의 손바닥에 상처를 냈고, 피가 흘러나왔다.
백련화 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웃음소리는 마치 종소리처럼 맑았지만, 임일의 귀에는 가장 잔인한 조롱으로 들렸다.
“아이고, 이게 무슨 꼴이야?”
백련화 수가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그의 손에 묻은 피를 닦아 주는 척했다. 하지만 그 손길은 마치 칼날처럼 아팠다.
“다들 봐, 이게 바로 우리 임일이야.”
그녀가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한때는 모두의 사랑을 받던 아이였지만, 지금은…”
그녀가 일부러 말을 끊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다시 임일에게 쏠렸다. 그 시선 속에는 조롱, 경멸, 그리고 잔혹한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이제는 저런 꼴이 되었어.”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몰락했구나.”
임일은 땅에 주저앉아, 손바닥의 피가 차가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주변의 웃음소리와 조롱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 소리가 머나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어렴풋이 가족들을 스쳤다. 아버지 임천은 무표정하게 케이크를 먹고 있었고, 어머니 이완은 백련화 수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둘째형 임택은 핸드폰을 보고 있었고, 큰형 임봉은 담담하게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아무도 그를 보지 않았다. 아무도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임일은 천천히 일어나,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무표정하게 몸을 돌려 연회장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의 등 뒤에서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 웃음소리는 마치 수천 개의 바늘처럼 그의 등 뒤에 꽂혔다.
복도에 들어서자, 임일은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벽에 기대어 천천히 몸을 웅크렸다. 눈물이 마침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그는 한참 동안 그렇게 울었다.
하지만 아무도 와서 그를 일으켜 세워주지 않았다.
밤이 깊어졌을 때, 임일은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창밖에는 별 하나 없는 어두운 하늘만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손바닥의 상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피는 이미 굳어 있었지만, 가슴 속 상처는 계속해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왜…”
그가 중얼거렸다.
“왜 모두가… 이렇게 변한 거야… 나는… 대체 무슨 잘못을 한 거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방 안은 고요했고, 오직 벽시계만이 똑딱거리며 밤이 흘러가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렸다. 임일이 고개를 들어 보니, 큰형 임봉이 문 앞에 서 있었다.
“형…”
임일이 다급히 일어났다.
임봉은 아무 말 없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작은 병이 들려 있었다.
“이거 발라.”
임봉이 병을 내밀며, 목소리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임일은 병을 받아 들었다. 그의 손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형… 고마워… 나는 네가…”
“닥쳐.”
임봉이 그를 가로막았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백련화 수의 명령을 따를 뿐이야. 너 같은 녀석 때문에 내가 곤란해지고 싶지 않아.”
그 말은 차가웠지만, 임일은 그의 눈빛 속에서 희미하게 남아 있는 망설임을 읽을 수 있었다.
“형… 나는 네가 전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믿어…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닥쳐!”
임봉이 갑자기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할지 알겠지.”
그가 몸을 돌려 문 밖으로 나갔다. 문이 쾅 닫혔고,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임일은 병을 꼭 쥐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완전히 고립된 섬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변의 모든 사람은 그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고, 자신만이 이 깊은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짚었다. 그곳에는 아직도 자신만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 기억들은 그가 이 어둠 속에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동력이었다.
“반드시… 방법을 찾을 거야…”
그가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반드시 모든 것을 되찾을 거야.”